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161화 (161/178)

〈 161화 〉 드러남 (3)

* * *

"죽이겠다! 죽이겠다! 반드시 죽이겠다!"

창공은 눈을 떴다. 이제는 정겹기까지 한, 기운찬 노인의 고함소리를 모닝콜 삼아. 창밖은 아직 어슴푸레했지만 시계를 보지 않아도 시간을 알 수 있었다. 5시에서 6시 사이. 매일 꾸는 꿈에서 매일 같은 결말이 나는 시각이었으니까.

뜨거웠다. 아니, 따듯하다고 해야 할까. 부드럽고 푹신하기도 하다. 양옆에서 느껴지는 온기. 여자의 향기. 나유와 아스터는 창공의 옆에 딱 달라붙어 곤히 잠든 채다.

그러고 보니 창공은 어젯밤의 결말이 잘 기억나질 않았다. 두 여인에게 적어도 각 다섯 번씩은 사정한 것 같은데, 정확히 몇 번이나 했는지, 어쩌다가 셋이 침대에 쓰러져 잠들게 되었는지 기억이 흐릿했다.

힘이 빠져서 축 늘어진 둘을 마음껏 범하다가 지친 끝에 오늘은 이쯤 한다 선언하고 누웠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알몸의 두 여자가 양옆에 누워있는데도 아래쪽이 전혀 반응하지 않는 걸 보면 양껏 하긴 했다.

'불편하네.'

그리고 아침이 되어 그가 처음 느낀 감정은 바로 불편이었다. 빵 사이의 햄처럼 가운데에 꼭 끼어서 옴짝달싹도 못 하니까. 그렇다고 힘을 주어 둘을 떼어냈다가 깨어나기라도 하면...

'아마 다시 달려들 거고.'

그의 성욕만큼이나 여자들의 성욕도 대단했다. 서로 매일매일 교감을 나누지 못하는 탓에 한 번 기회를 잡으면 뽕을 뽑겠다는 심산인지는 몰라도 저녁부터 밤까지, 새벽부터 아침까지 범해 달라고 애원했으니까.

하지만 본래 성욕이란 차올랐을 땐 세상의 모든 것을 불사를 듯 맹렬하면서도, 충족되고 나면 살갗 하나 제대로 태울 수 없는 불똥보다도 못한 것이다. 오늘 아침의 창공은 후자였다. 그냥 귀찮고 피곤하다.

어떻게든 몸을 살살 움직여 침대에서 빠져나온 창공은 욕실로 향했다. 욕조 안의 물은 밤새 식어 미지근함과 시원함의 중간 정도에 위치했다. 물소리가 최대한 나지 않도록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몸을 씻는다.

이곳저곳에 말라붙은 체액들은 잘 씻기지 않지만 어쨌든 문질러 씻어낸다. 그래야 하니까.

생각해 보면 륀이 돌아오지 않았더랬다. 포를렌탈 교수를 만날 수 있는지 동키르케 지부에 문의하러 우체국에 다녀오겠다더니, 저녁시간이 지나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필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이따가 들어야겠네.'

다음 일행의 목적지는 포를렌탈 교수에게서 이끌어낸 정보로 정할 생각이었는데, 이렇듯 계산이 어그러지면 짜증이 났다. 짜증이 나지만 동시에 어쩔 수는 없다. 세상 대부분의 일은, 특히 일의 시작은 한낱 개인의 힘으로는 통제 불능이었으니.

"...!"

지금 그가 피를 토하는 것처럼.

"애미..."

축축하고 뜨듯한, 동시에 불쾌한. 손바닥에 와닿는 피의 느낌은 그랬다. 그게 자기 입에서 나온 피라면 더더욱. 검붉다. 안 그래도 미끈한 피는 기관지 내의 점액과 섞여 더욱 끈적하고 미끈했다.

바가지에 물을 떠서 닦아내야 한다. 바닥에 묻은 피까지도. 그래야 이따가 나유와 아스터가 들어오더라도 들키지 않을 테니.

기침은 바로 그때 올라왔다.

"으흑...! 케흑! 컥! 커헉!"

손으로 입을 틀어막을 수도 없다. 저 안쪽의 폐부터 기관지, 기도, 목구멍이 차례대로 찢어지는 느낌. 거꾸로 차오르는 피의 감각은 마치 저 아래에서부터 분출되는 용암과도 같았다.

"으웨에에엑... 카학!"

통제불능이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도 할 수 없다. 바깥의 둘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도. 그저 바닥에 엎드려서, 무력하게 몸부림치며 창공은 계속 피를 토했다.

"창공 님? 무슨 일이세요?"

아스터의 놀란 목소리. 별일 아니라 말하려 손을 들어 올리던 창공은 다시 터지는 기침에 몸의 통제를 상실하고 다시 널브러졌다.

"드, 들어갈게요! 무슨 일 있는 거죠! 그죠!"

"그어허커억..."

문이 열린다. 창공은 그대로 포기했다.

"세상에... 창공 님!"

아스터가 그의 상체를 안아들고 비스듬히 받친다. 커다랗고, 부드러운 가슴이 얼굴에 와닿았지만 세상을 뒤덮은 고통 탓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하얗고 완벽한 피부에 더럽고 끈적한 핏방울이 튀긴다.

"오, 신이시여... 안 돼..."

창공의 몸에 얹어진 손에서 뽀얀 빛이 뿜어진다. 그러나 기침은 잦아들지 않았다. 잦아들기는커녕 오히려 반발이라도 하는 양 목구멍은 맹렬하게 피를 토한다.

그는 이제까지 남겨두었던 추측을 미련 없이 내려놓았다. 아스터의 신성력으로는 이 병을 치유할 수 없다고.

'당신 소원이 드디어 이루어지려는 모양이군, 노인네.'

절망이나 공포 대신 창공이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올린 생각은 꿈속에 등장하는 노인에 대한 것이었다.

"...무슨 일이야...? 아...?"

난리 통에 나유도 일어났는지 눈을 비비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한껏 졸린 표정이던 그녀는 이 처참한 광경을 목도하고선 정신이 번쩍 들어 외쳤다.

"창공아!"

"킥킥킥..."

실소를 흘리는 창공. 이제껏 감추려 잠자리도 륀하고만 가졌는데, 하룻밤의 방심이 결국 이 꼴을 만들고 말았다. 아니, 사실 언제까지고 감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게 하필이면 오늘일 줄은 몰랐지만, 원래 인생이라는 게 그런 법이 아니겠는가.

그 스스로는 어딘가 허탈하고 우스운 면이 있어 웃었을 뿐이었지만, 아스터와 나유에겐 창공의 웃음이 너무나 섬뜩하기만 했다.

"일단... 일단 침대에 창공 님을 눕혀야 해요..."

창공의 웃음을 바라보며, 아스터는 무너지려는 정신을 다잡고 나유와 함께 그를 침대로 옮겼다. 피를 닦고, 옷을 입히고. 그는 힘없이 여인들의 손길에 자신의 몸을 내맡겼다.

너무나 어색했다. 이토록 무력한 그의 모습이.

"아스터... 치료.... 빨리 치료해 봐..."

"죄송, 정말 죄송합니다... 제힘으로는 이토록 위중한 병의 치료까지는..."

달콤한 밤을 보내고 난 뒤에 맞이하는 잔혹한 아침은 그녀들이 견디기에는 너무나 가혹했다.

'치료가 안 돼? 왜...?'

나유는 멍하니 창공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아스터의 말이 마치 사망선고처럼 들린다. 사망선고는 그녀의 마음 안에서 회오리치며 무수한 상처를 만들어낸다. 할퀴어진 상처에서 피가 방울방울 맺히지만, 머리가 텅 비어 아픔마저 느낄 수 없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혹시나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를 의심해 보지만 현실이었다. 깨어날 수도, 빠져나갈 수도 없는.

"이스트리에서 가장 실력 좋은 의사를 수소문해 볼게요."

"그럴 필요 없어."

속삭이듯 흘러나오는 창공의 목소리. 조금만 힘을 줘도 다시 기침이 나올 것 같아 의도적으로 성량을 제한하고 있었다.

"나유야."

"으, 응...! 창공아!"

"가서 륀을 불러. 아니, 모두 다 내 방으로 부르는데 륀에게 가장 먼저 찾아가."

"륀은 대체 왜..."

"불러."

창공은 더는 말할 생각이 없다는 듯 눈을 감았다.

* * *

"..."

한여름의 따스한 아침이건만, 방 안 공기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대다수는 륀의 입에서 나오는 설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할 수 없다기보단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륀 자신조차도. 미리 알고 있었고, 설명하는 자신조차도. 죽음을 향해 착실히 나아가던 창공의 여정이 정말로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생각.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무서우리니만치 현실감이 없다.

실제로 지금 침대에 누운 창공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다. 멀쩡할 뿐만 아니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생활하며 활을 쏘고 뜀박질도 했다.

어쩌면 륀은 그런 창공의 모습을 보며 사실은 그런 병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을지 몰랐다.

"그래서...?"

날카로운 정적을 꿰뚫은 첫 목소리. 나유의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낫는데?"

"낫는 병이 아니야. 진행을 최대한 늦출 수밖에. 서창공이 피를 토하는 주기는 점점 짧아질 거야. 더 늦기 전에...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야 해."

"낫는 병이 아니라고...?"

정작 이야기의 주인공은 창공은 마치 남의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듣는 것처럼 침대 위에 태평하게 누워있다. 짜고 벌이는 질 나쁜 장난이라고 믿고 싶을 정도로.

"아니, 잠시만요. 륀 상."

"뭔데."

"하지만 서 상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희와 같이 동굴도 탐험했다고요. 활도 잘 쐈고... 또..."

"비타 탐험이 그의 병을 악화시킨 거겠지. 동굴 속. 흐르지 않는 공기. 먼지 풀풀 날리는 광산과 다를 바가 없었던 셈이야. 서창공의 병은 바로 그런 광산에서 얻은... 병이고."

그나마 말이라도 꺼내는 히사시와는 달리, 어택은 완전히 죽은 표정으로 묵묵히 창공의 얼굴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말이, 말 이전에 생각이 물거품처럼 생겨났다가 덧없이 사라졌으니까.

"결국 한계에 부딪힌 거야. 더는 여정을 계속할 수 없어."

고저 없는,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 나유는 륀의 태도에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게 뭐란 말인가.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남자가 목숨이 경각에 달했는데,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저게 무슨 태도란 말인가.

륀이 창공에게 느끼는 감정은 알 바 아니었다. 중요한 건 나유 자신이 화가 났다는 사실. 한발 내디디며, 소리를 지를 준비를 한다.

"너는...!"

그러나 화산처럼 터지려던 분노는 곧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빠르게 냉각되어 저 밑바닥으로 꺼졌다.

"..."

마주친 륀의 눈동자. 마음의 창은 언뜻 보기에 텅 비어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무심의 장막 아래, 그곳에서 몸부림치는 감정이 진하게 느껴졌다.

슬픔? 분노? 절망? 체념? 좌절? 비관? 낙망?

무어라 한 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는, 그러나 어두운 감정임은 확실한 괴물이. 나유는 숨이 막혀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죄송하지만."

그리고.

"다들 자리 좀 비켜주실래요."

다른, 하지만 똑같은 느낌의 목소리로.

"오빠랑 단둘이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서요."

아린이 말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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