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163화 (163/178)

〈 163화 〉 드러남 (5)

* * *

늦은 밤. 술 마시며 왁자지껄 떠들어대던 사람들도 이젠 지쳐 돌아가고, 술병과 음식을 나르던 주인도 지쳐 카운터에 엎어져 자고 있을 무렵의 여관 1층. 남녀 여럿이 한 테이블에 둥글게 앉아있다.

분위기가 무겁다. 단지 사위가 고요하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그들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은 고요하다는 느낌보단 답답하다는 느낌이 훨씬 강했다. 내리깐 시선과 말을 잃은 입. 자정이 넘은 장례식장을 보는 듯하다.

"궁금한 게 있는데."

이쯤 되면 박제된 시체들이 아닌가 생각이 들 때쯤, 간신히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어택이었다.

"요양하기만 하면 나을 수 있는 건가?"

고저 없는 목소리 끝에서 희미하게 간절함이 묻어 나온다.

"...아니."

그러나 좌절이 가득 담긴 륀의 목소리는, 주변은 물론이고 그녀 자신마저 어두컴컴한 공간 안으로 인도한다. 헛된 희망 따위는 품지 말라고, 품지 말자고 작은 아우성을 치는 것처럼.

"이미 많이 늦었어. 요양이 아니라 생명 연장이라고 봐야겠지. 그나마도 얼마나 가능할진... 일단 최대한 노력은 해 봐야지. 마법사들 중에서도 질병에 대해 연구하는 교수가 없는 건 아니야. 나 개인적으로도 연구할 수 있을 거고. 전공은 다르지만."

"하... 미치겠네."

"뭐가 됐든 여기에 있는 것보단 나아. 푸아송은 괜찮은 곳이니까. 위급할 때엔 사제도 있고... 얼마나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아스터가 몸을 작게 떨었다. 씁쓸한 무력감. 사제의 신성력으로 외상은 치료해도 병은 치료할 수 없다. 병의 치료는 기적의 영역.

기적을 일으키는 건 인간의 힘이 아닌 신의 힘일 터이나, 아스터는 지금 자신이 신앙심과 간절함이 부족해 기적을 일으킬 수 없다며 수없이 자책을 하고 있었다. 인간을 초월하지 못했음을 한탄하는 인간의 속은 죽기 직전의 고목처럼 시커멓게 썩어들어간다.

"그래도 원래 건강한 사람이었으니까 다른 사람보다는 잘 버틸 거야. ...그러길 바라야지. 가서 잘 챙겨 먹고 살을 찌우면서 어떻게든..."

"저기, 정말 마법으로는 어떻게 안 되는 겁니까? 다른 일은 다 되는데 병을 못 고친다니."

히사시의 조심스러운 목소리. 하지만 륀에게는 자신의 무능을 탓하는 소리로 들렸는지 그녀의 눈이 번뜩였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러고 있다는 거야?"

"그게 아니라."

"아니면 할 줄 아는데 일부러 안 하고 있기라도 한다는 건가?"

"죄송합니다. 실언이었습니다. 결코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만..."

"하아아..."

세상의 종말을 목도한 사람이 내뱉을 만한 한숨.

"인체에 적용하는 마법은 무생물에 적용하는 마법과는 차원이 달라. 방향성이 정해지지 않은 체내 마력과 인위적 조작이 이루어진 마력이 부딪히면 십중팔구 끔찍한 결과가 나오지. 마법을 통한 병의 치료는 감기와 같은 가벼운 병 위주에 그치는 형편이고 그나마도 아직까진 실험적인 단계야. 설명이 됐어?"

"네..."

"마법 약초학 교수들도 충분히 검증되었다고 생각한 약초를 인체에 사용했다가 이제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부작용이 나오는 판인데... 나도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를 고치고 싶어. 그러니까 날 자극하지 마."

분노는 옅었다. 아니, 옅게 느껴졌다. 그 위를 좌절과 한탄이 두껍게 덮고 있어 잘 느껴지지 않으니.

삐걱... 삐걱...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 모두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그쪽을 향한다. 나유였다. 그녀는 슬프고 지친 표정으로 힘없이 웃으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린이는 잠들었어."

"수고했다, 나유야."

창공과 독대를 마치고 나온 아린은 제 방 침대에 엎어져 계속 울기만 했다. 때로는 훌쩍이며, 때로는 소리 없이, 때로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나유도 슬프고 의기소침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럼에도 자신보다 더 절망적일 아린을 달래야 했다.

"그래서. 어디까지 얘기하고 있었는데?"

"요양. 내 고향에."

"..."

나유는 영혼 없는 눈으로 륀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깨끗하고 조용해? 거긴?"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사람들 모여 사는 곳들 중에선 그곳이 제일 나았어. 대도시도 옆에 있어서 위급할 때엔 도움을 청할 곳도 많고. 사람이 들어가기 힘든 산골짜기를 제외하면 거기보다 더 좋은 곳은 카르디 해 섬에 있는 귀족들의 별장밖엔 없겠지."

"그럼 거기로 가는 건 안 돼?"

"귀족들 별장이라니까. 섬 전체가 사유지라 출입이 안 돼."

"너 마법 교수잖아. 궁성도 약속 없이 출입할 수 있던데..."

"궁성과 별장은 달라. 별장은 공식적인 장소가 아니니까. 게다가 카르디 해에 별장을 가진 귀족들은 하나같이 거물들이야. 이미 자문단을 맡은 마법사도 있을 테고. 난 그들이 원하는 걸 줄 수 없어."

순간 륀은 그런 귀족들에게 몸을 바쳐서라도 별장의 사용권을 얻어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다시 창공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일단 최후의 방법으로 남겨 두고, 수많은 생각 속 하나로 묻어두었다.

"정말... 정말 괜찮은 곳이야. 그곳에 연구실을 차려서 논문을 받아 연구를 해야겠지. 필사적으로 하면 뭐라도 방법이 나올 거야."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그녀는 차마 꺼내지 못한 뒷말을 삼키며 한껏 우울한 감상에 잠겼다. 곧 나유에게 방해받고 말았지만.

"아마도 창공이는... 요양이라고 하면 싫어하겠지. 자존심이 너무 높으니까. 지금껏 병도 숨겼잖아. 그래, 숨겼지. 너만 빼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도대체 왜 너야? 왜 너만 병에 대해 알고 있었지? 대체 왜 창공이는 너에게만 귀띔을 한 거야?"

"지금 그런 게 중요해?"

"아니. 하지만 뭔가 이유가 있을 거 아니냐고. 아무에게도, 심지어 임신한 아린이에게도 숨겼는데."

그거야 내가 주인님을 거스를 수 없는 성노예니까.

이 말도 함부로 내뱉을 수 없기에, 륀은 다시 말을 삼켰다. 같은 여자지만, 다른 여자의 질투심을 정면으로 받아내야 할 때면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었다.

"그는 내게 말했고, 난 그가 말한 대로 했을 뿐이야. 이유? 서창공에게 물어봐."

"이제 둘 다 그만해. 이런 거 가지고 싸울 때가 아니야."

마침 어택이 좋은 명분을 주자, 두 여인은 적개심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

"뭐가 됐든 이대로 여정을 계속하는 건 불가능해. 어차피 임산부도 있고, 당사자가 좋든 싫은 병자는 요양을 해야겠지."

"아, 좋은 생각이야."

"륀. 여기에서 푸아송까진 얼마나 걸려?"

"어림잡아 한 달 반에서 두 달. 키르케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야 아퀴탄 국경이 나와. 국경에서 푸아송까지 거리도 좀 있고."

"생각보다 먼데. 버틸 수 있을까."

"버티지 못하면 요양도 의미가 없어. 그는 버텨낼 거야. ...버텨야 해."

다시 계단 쪽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아린인가? 아니다.

"차, 창공아..."

"창공 님! 무리하시면."

"하."

그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입가에 걸린 삐뚜름한 미소. 평소의 그다. 이제 일행들은 그를 평소처럼 대할 수 없게 되었지만.

"내가 언제부터 누워만 있어야 하는 사람이 된 거지. 난 아직 안 죽었어, 아스터."

"죄송해요. 하지만 늦은 밤인데 주무시지 않고..."

"일찍 잔다고 키 클 나이는 이미 지났는데."

비어있는 자리에 앉아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는 창공. 담배였다. 륀이 기겁하며 입에 물린 담배를 재빠르게 잡아채 빼냈다.

"...뭐 하냐."

"당분간 금연이야."

적을 앞에 둔 것만 같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륀을 노려보던 창공은 반쯤 기침이 섞인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젠 내 맘대로 담배도 못 피우는 신세가 됐다 그거지."

"당신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어. 이러지 마."

"그래서 날 네 고향에 처박아 두고 침대 위의 봉제인형으로 만들려고?"

"이미 합의된 사항이야."

"제발 담배 좀 끊으라면서 질질 짜지그래."

"내가 울어서 당신이 말을 듣게 할 수 있다면 하루 종일도 울 수 있어."

나유도 옆에서 륀을 거들었다. 비록 연적 관계이긴 해도, 창공이 최대한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같으니까.

"창공아... 제발 이러지 마..."

"안 그래도 머리 아픈데 너까지 왜 이래. ...하, 그래. 알았어. 이러다가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바지 붙잡겠네. 담배 끊어라. 그래. 내가 어쩌겠어. 들어야지. 다음 부탁은 요양지로 떠나는 건가?"

"..."

"솔직히 다들 알고 있잖아. 치료를 위한 요양이 아니라 그냥 하루라도 더 살아있는 게 목적인 요양이라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글쎄."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는지 륀은 제 입으로 말해놓고도 손을 한 번 움찔거렸지만, 이미 내뱉은 말. 다음은 기호지세였다.

"솔직히 이런 모습...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보여.

"뭐라고?"

"화내도 좋지만 다 듣고 화내. 당신 말대로 여정을 계속하면 반 년도 못 가.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갑자기 죽어버린다고. 그럼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어? 무슨 도움이 되는데? 그냥 우리 말대로 해. 제발. 내가 최선을 다해 알아볼 테니까. 당신이 하루라도 더 살아있을 수 있다면 뭐든, 뭐라도 할 테니까. 그러다가 기적적으로... 나을 방법을 찾을 수도 있으니까."

"..."

"원래는 당신 이렇게 막무가내로 고집부리는... 어리석은 행동 싫어하잖아."

잠시 침묵을 고수하던 창공은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오늘따라 제발이라는 말을 많이 듣네."

"당신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라면."

"하루 종일도 할 수 있다고? 하루 종일 울부짖고 하루 종일 제발이라고 하는 소리를 듣느니 항복하지. 그래, 좋아. 너희들 마음대로 해. 마음대로."

이어지는 탄식.

"어차피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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