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 막다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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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혐오스러운 묘사가="" 있습니다=""/>
억지든 아니든 당사자가 동의하고, 일행들도 동의했으니 그다음 일처리는 일사천리였다. 창공의 병이 나을 때까지 쌍둥이의 고향, 아퀴탄의 푸아송에서 쉬는 시간을 보내기로.
말이 좋아 쉬는 시간이지 각자가 품고 있는 소망은 조금씩 다른 데가 있었다. 누군가는 병세가 나아지지는 못해도 더 진행은 되지 않기를, 누군가는 완벽히 나을 수 있기를, 또 누군가는 남은 시간이나마 행복한 추억을 쌓을 수 있기를 바랐다.
정작 당사자인 창공 본인은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진폐증은 현대 의학으로도 완치가 불가능하고, 잘 쉬며 악화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질병. 그럴진대 이곳 다이셀리시아에서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건 그의 생각에 아무래도 무리였다.
마법이 섞였다고는 해도 고작해야 중세 수준의 세상에서 뭘 바란단 말인가. 더군다나 그 잘난 마법으로도 병을 고치지 못하는 판국에야. 병을 인지했을 때부터 일종의 체념 상태였던 그의 마음가짐은 이제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마지막 여정. 더는 움직일 수 없기 전, 몸이 머리의 명령을 듣지 못하게 되기 전에 갈 수 있는 데까지라도 가 보려 했던 계획은 어느 날 갑자기 허망하게 끝나버렸다. 지구에 있을 때에도 희미했던 삶의 목표, 이제 와서 갑자기 뚜렷해질 것도 뭣도 없다.
이제 끝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는 한적한 곳에 위치한 집에 들어가 침대에 눕거나 주변을 산책하며 지낼 테고, 아무 의미 없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나날만 반복될 것이다. 밤이 되면 여인들의 살결이 그를 감싸겠지만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죽음이 확정된 삶은 상상하기만 해도 이토록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다. 자신의 수명을 모르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죽음이 임박해서야 창공은 깨달았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창밖의 하늘을 바라봤다. 요양지로 향하는 마차가 죄수 호송칸처럼 느껴지고, 창밖의 풍경은 감옥으로 들어가기 전 바라보는 마지막 자유로운 풍경처럼 느껴진다.
베네치아에서 탄식의 다리를 봤을 때엔 거기에 얽힌 낡은 이야기를 산산이 바스러진 해골이 되어버린 남들의 이야기로만 들었건만, 그게 자신의 이야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여간 블랙 코미디가 아닌 셈이다.
지금 그가 떠올리는 건 부모의 얼굴도, 고향의 풍경도, 지금은 아린의 뱃속에 있는 아이의 모습도 아니었다.
학교 앞 작은 카페에서 팔던 자몽 허니티. 그 시원한 한 잔. 아무 걱정 없이 여자들을 갈아치우며 지루하고 단조롭지만 수많은 길 중에서 스스로 선택한 미래를 준비하던 그 시절의 상징이 떠오를 뿐이다.
본래 창공은 말이 많은 편이 아니고, 마차로 이동할 때에는 더욱 그러했지만 이 적막은 너무나 무겁고 찝찝했다. 우울하고 습한 죽음의 향기.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사람, 필사적으로 부정하며 몰아내려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내려앉는다.
그렇게 점점 아래로, 아래로 침전된다. 우울은 우울을 부르고, 침묵은 침묵을 낳으며. 아무리 재치 있는 사람이라도 이래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마차가 멈춘 건 그때였다.
"다들 나와 봐야 할 것 같은데."
어택의 목소리에서 미묘한 놀라움과 흥분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보통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예감에 다들 마차를 나섰다. 아니, 나서려던 참에 뒤따르는 말 한마디.
"아니, 그. 아린이는 그냥 안에 있어."
"무슨 일인데요?"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지금은 그대로 있어."
이렇게 말하면 더욱 궁금해지는 게 사람의 마음이지만 그렇다고 어택이 헛소리를 하는 사람도 아니다. 아린은 궁금증을 꾹 눌러 담으며 그대로 앉고, 다른 사람들은 재빨리 밖으로 나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마주했다.
"헉..."
"이게 대체?"
길 한가운데 놓인 무언가. 전체적으로 검붉고, 형편없고, 초라했다. 아무렇게나 주물럭댄 점토 찰흙 위에 거적때기를 뒤집어 씌운 형상이랄지. 원래부터 이런 형상은 아니었을 것이나, 그 원래의 형상을 추측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명백한 힌트가 존재했다. 시끄럽게 윙윙 소리를 내며 위를 맴도는 파리떼, 코를 찌르는 고약한 냄새. 단순한 악취가 아니다. 수인한도를 가볍게 뛰어넘는 정도의 불쾌감과... 미약한 공포감.
쌍둥이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은 알펜시아 산맥에서 이런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있다.
"시체다."
"망할... 길 한복판에다가 시체를 버려 놓다니. 도적에게 습격당한 건가?"
"글쎄."
창공은 손에 든 활에 화살을 매기고 주위를 경계했다. 그를 걱정하는 눈빛이 느껴졌지만 아직 싸우지도 못할 정도로 골골대는 상태는 아니었다.
"아스터. 지금 이 길. 평소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이야?"
그들이 잡은 길은 이스트리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길. 크고 좋은 길은 아니지만 키르케를 최대한 빨리 가로지르기 위해선 지름길을 택해야 했고, 그 결과가 바로 여기였다. 들판길도, 그렇다고 산길도 아닌 애매한 위치.
"...이곳 사람이 아니라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스트리 주변이니까요. 통행인이 없지는 않겠죠. 아무리 못해도 1시간에 행렬 하나쯤은 지나가지 않을까요."
"그럼 이건 이상하겠네."
어택과 륀이 뭔가를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서창공. 당신 말은, 시체의 부패 상태가 너무 심하다는 거지."
"맞아. 이건 하루 이틀 정도가 아니야. 시체를 본 경험이 많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일주일은 넘었어."
그는 눈살을 심하게 찌푸리면서도 가까이 접근하며 시체를 살폈다.
"택이 형. 이리 와서 이 옷같이 생긴 것 좀 걷어 줘요."
"알았어. 젠장, 내 방망이한테 미안함을 느끼게 될 줄은."
"차, 창공아... 나는 좀 뒤로 물러나도 될까?"
"그렇게 해."
헛구역질을 해대는 나유는 마차 가까이 붙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시체에 가까이 붙었다. 히사시는 당장에라도 졸도할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의외로 잘 버티고 있었다.
버틴들 어떤 보상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잠시만. 잠깐만 기다려 봐."
"왜 그래?"
방망이 끝으로 옷이라 추정되는 누더기를 걷어내려는데, 륀이 어택을 급하게 말렸다.
"이 옷... 어디에서 본 것 같은데."
"어디에서. 우리가 아는 사람이야?"
"피 때문에 잘은 안 보이지만 원래 색깔은 아마 초록색 계열이 아니었을까... 이 자수... 평민은 이런 옷 안 입어. 그럼 귀족? 아니지. 내가 최근에 귀족을 본 기억이... 아."
그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다.
"그, 그라치아니 교수...?"
"뭐라고?"
시몬 그라치아니. 이스트리에서의 일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마법 교수. 멀쩡히 헤어졌던 그가 이런 처참한 시체가 되었다니, 쉽게 믿기지 않았다.
"오, 신이시여... 부디 그의 영혼을 가여이 여기소서..."
아스터는 땅에 무릎을 꿇고 그라치아니 교수를 위한 기도를 올렸다. 이건 그녀의 일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역시 그들만의 일이 있었다.
"맞아? 확실해?"
"엎어져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도... 뒤집어 보면 확실해지지 않을까."
"으윽, 그럼 뒤집을까?"
"아뇨, 형. 일단 이 옷부터 걷어내 봐요. 다 찢어져서 걷어내긴 쉽겠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하면서도 일단은 창공이 시킨 대로 수행하는 어택. 어쨌거나 진지한 상황에서 창공이 무턱대고 헛소리를 할 인사는 아니었으니까.
옷가지가 걷히고, 햇빛 아래 드러난 살은 실로 역겨웠다. 썩어 문드러져서 물렁거리는 살, 더욱 코를 찌르는 고약한 냄새. 파리가 날고, 잘 참던 히사시가 끝내 구역질을 했다.
"야. 그냥 너도 뒤로 빠져."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곤 했지만 그를 탓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어쨌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역겨운 장면은 맞다. 평소 티를 잘 안 내는 어택도 히사시를 살짝 부러워할 정도였으니.
문제라면 창공은 아직 어택을 뒤로 빼낼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음."
썩어문드러진 살 위로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액체가 무엇인지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당신... 대체 뭐가 보고 싶은 거야...?"
"택이 형. 이젠 뒤집어 보죠."
"씨발... 씨발..."
철퍽!
도저히 사람 몸을 뒤집었을 때 나는 소리라고는 믿기 어려운 끔찍한 흉성. 그러나 드러난 광경보다 더 끔찍하지는 않았다.
고통으로 벌어진 입. 그 안에서 파리떼가 수도 없이 날아오른다. 콧구멍에서도, 눈알이 썩어 시커먼 공동이 드러난 부분에서도. 어느 부분은 새까맣게, 어느 부분은 알록달록. 아무렇게나 물감을 뿌려놓은 것 같다. 예술성이라고는 전혀 없었지만.
특이한 사항이라면 앞부분에도 등에처럼 작은 구멍들이 숭숭 뚫려있다는 점이다. 안에는 텅 빈, 때때로는 역겨운 액체가 흘러나오는 구멍들.
"확신이 없어지네."
어택은 시체와 냉정하기만 한 창공의 목소리 중에서 무엇이 더 소름 돋는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확신을?"
"이 구멍들. 구더기가 다 자라서 파리로 나온 구멍이거든요."
"아 씨발..."
결코 그렇지는 않겠지만 아스터가 눈을 감고 중얼거리며 기도를 하는 모습은 차라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기도도 할 수 없는 륀은 지팡이와 치마 밑단을 터질 듯 꽉 쥐고 창공의 얼굴을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었기에.
"륀. 어때. 그라치아니 교수의 얼굴처럼 보여?"
"...아마도. 사실 너무 부패한 뒤라 옷이 아니었다면 얼굴만으로는 그라치아니 교수의 시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을 거야."
"사실 그것만으로도 이상한 일이지. 얼굴을 간신히 알아볼 수라도 있었다는 게."
륀과 어택은 어서 시체 곁에서 벗어나고 싶었기에 되도록 빠르게 말해달라는 표정으로 창공을 쳐다봤다.
"여름철엔 시체 부패가 빨라.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팔다리를 제외한 부분들은 다 썩어 문드러져서 누가 누군지 구분조차 가지 않을 정도로. 대략... 일주일 정도려나. 그쯤 되면 형체도 없이 완전히 물러진다는 거지."
"그럼 당신 말은 그라치아니 교수가 사망한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일주일도 안 됐다는...?"
"내 생각엔 아닌 것 같아. 이 구더기가 나온 구멍들. 보아하니 완전히 파리로 변해서 날아간 것 같아. 아니면 방금 날아갔거나. 물론 여름철에는 구더기의 생육이 더 빨라지긴 하지만 일주일도 안 돼서 우화할 정도까진 아니야."
"사망 시점을 나타내는 증거가 서로 상반되어 있다고? 대체 뭐가 맞는 거지?"
"보다 확실한 쪽은 구더기려나. 글쎄, 내가 말한 건 지구에서의 기준이라 여기 파리들은 어떨지 모르겠네. 하지만 이 시체에 인위적인 조작이 가해졌다는 심증은 형성할 수 있겠지."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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