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165화 (165/178)

〈 165화 〉 막다른 길 (2)

* * *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해요."

"내 말은, 이스트리로 돌아갈 건지... 아니면 계속 앞으로 나아갈 건지."

창공은 어택의 말에 잠시 고민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일차적으로 생각하면 뭐가 어찌 됐든 일정을 중단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라치아니 교수의 죽음은 분명 의문투성이지만 그게 전부. 이 세상에 하고많은 의문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말로 그럴까? 그라치아니 교수의 죽음에 얽힌 의문은 정말로 창공 일행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별개의 요소일까?

어택은 그렇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기에 이리 말했고, 창공 또한 같은 생각에 도달한 지 오래였다.

모든 문제는 이스트리에 도착했을 때부터. 비타행을 정면으로 가로막았던 원양어선 조합 영업방해, 포를렌탈 교수가 말했던 '주인님'의 정체, 그녀를 호송했던 교수들의 실종, 하필 특정 시점, 특정 위치에서 창공 일행의 눈에 띈 그라치아니 교수의 시체.

이 모든 게 다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었다.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모든 사건들을 하나로 잇는 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훨씬 개연적이다. 비록 지금은 그 실이 어둠 속에 정체를 감추고 있을지라도.

'교수는 분명 오래전에 살해됐어. 시체가 파리가 알을 까고, 구더기가 부화해서 몸 밖으로 나왔을 정도니까. 따라서 살해 장소는 이곳이 아니야. 아무리 통행량이 적더라도 이렇게 시체가 노상에서 썩는 동안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을 린 없으니.'

게다가 시체의 부패 정도와 우화한 파리. 이 둘은 서로 다른 사망 추정 시각을 나타내고 있다. 즉, 범인이 시체에 어떠한 조작을 가했을 가능성이 크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 했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다만 가장 중요한 사실. 범인의 손에 놀아나던 시체는 바로 오늘... 살해 장소, 그리고 보관 장소에서 이동해 이곳에 놓였다.

'마치 우리에게 보이려는 것처럼.'

창공은 곧 결론을 내렸다.

"계속 가죠."

"...괜찮겠냐?"

"이게 누군가의 수작질이라면 피해봤자 다른 방향으로 접근을 시도할걸요. 만약 포를렌탈 교수와 연관된 놈이 맞는다고 하면, 그놈은 이스트리에서부터 우릴 방해하던 놈이란 말이죠. 애써서 우리 보라고 이런 짓거리까지 할 정도로 지독하기도 하고."

"피해봤자 찾아올 거라는 말이지. 하지만 앞에 함정을 깔아놓지 않았을까."

우울한 표정으로 시체를 내려다보던 륀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아니... 차라리 함정으로 뛰어드는 게 나을 거야. 서창공의 추측이 옳다면."

"무슨."

"교수 10명이 실종됐어. 한 명은 이렇게 발견됐고.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는 개인, 혹은 집단이 우리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해 봐. 이스트리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잠이나 제대로 오겠어? 우리 정신력을 갈수록 소모되고, 지친 틈을 타서 어떻게든 기습을 하겠지. 그럼 우리의 필패야."

"언젠가 있을 습격의 날까지 불안에 떨면서 지내기보단 이번 기회에 아예 뿌리를 뽑는 게 낫다는 말이지. 그건 이해했어. 그런데 륀. 그... 지부라는 곳에 범인의 흔적을 발견한 것 같다고 연락을 취하는 게 좋지 않을까."

륀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합리적이긴 하겠지. 마법사들의 조력을 받을 수 있다면. 하지만 당사자인 동키르케 지부는 대다수의 전력을 잃어 반신불수가 된 상태고, 웨리는 내부 사정 때문에 당분간 움직이지 못해. 안타깝게도."

"우리끼리 해결하는 수밖에 없단 말이지... 이 모든 게 범인의 계산 아래라면 이번 싸움은 좀 힘들어지겠는데."

"득의양양해서 방심하고 있기만 바랄 뿐이야. ...이런 짓을 벌일 자가 겨우 그런 실수를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합의도 봤으니 이제 가던 길 가자고. 주변 경계하면서."

"아, 그전에..."

망설이는 륀. 그라치아니 교수의 시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복잡하다. 같은 마법사로서 이렇게 노상에다 버려두고 가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걸까. 하지만 창공은 마법사가 아니었고, 시체에 인류애를 발휘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수습은 안 돼. 불가능해."

"그건 나도 알지만... 마음이 조금 그래서."

"...언니의 말이 맞아요, 창공 님. 적어도 길 옆에 눕혀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스터마저 륀의 편을 든다. 서로 연적 관계라거나 교단과 웨리 사이의 갈등은 둘째치고서라도 사제로서 그냥 지나치자니 마음에 걸린 탓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맨손으로는 잡으면 안 돼. 이 정도로 부패한 시체는."

"제 가방 안에 천이 있어요. 그걸 어떻게 쓴다면 고인을 옮기는 것 정도는 가능할 거예요."

"...그럼 둘이서 해. 택이 형. 우린 돌아가죠."

"어? 어..."

마차의 문은 열려있었다. 궁금해하는 아린을 위해 나머지 사람들이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썩 듣기 좋은 광경은 아니니만큼 그녀의 안색은 밝지 않았지만.

"아, 오빠... 정말인가요? 정말로."

"궁금하면 가서 보던가. 태교에 좋진 않겠지만."

"이럴 수가... 그러면 여긴 위험해요. 일단 이스트리로 돌아가서 대책을 강구해 보는 게 어떨까요...?"

"글쎄다."

창공은 일행에게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해 설명했다.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는다. 적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모르는 걸 넘어 그럴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계속 나아가자는 말은 그리 재미있는 말이 아니었으니.

"오빠. 나랑 잠깐 둘이서 얘기 좀 해요."

"싫어."

그는 무의식중에 품속을 뒤적거렸지만 그곳에 담배는 없었다.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뻔히 예상 가는데 들어야 되겠냐? 아니면 넌 나랑 단둘이 아니면 말을 못 해?"

"너무 무모해요. 감당할 만한 수준을 넘어선다고요."

"지금은 돌아갈 수 있겠지. 결국엔 피할 수 없는 싸움이야."

"아무리 피할 수 없다지만 굳이 상대방이 원하는 시기에 싸울 생각인가요?"

"동시에 우리가 원하는 시기가 될 수 있어. 이스트리로 돌아가게 된다면 우린 싸우는 시간마저 택할 수 없게 될 거야."

일단 누군가 일행을 노리는 자, 혹은 집단이 있을 거라는 전제에는 일행 모두가 동의했다.

그렇다면 창공의 의견은 지금 당장 맞붙어야 한다는 것이다. 긴장과 경각심이 최대에 달한 바로 지금. 쇠도 달구어졌을 때 치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사람의 집중력에는 한계가 있다. 수 시간, 혹은 수 일 정도라면 적습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집중이 영원하지는 않은 법. 설령 총알 빗발치는 전장일지라도.

경각심이 흐트러지게 되면 그 자리에는 필연적으로 공포가 잠식해 들어온다. 시체를 보고 감각이 곤두선 지금, 적에 대한 경계가 최고조에 달한 지금을 놓칠 수는 없다는 게 창공의 논지.

아린도 그의 말에는 전반적으로 동의했다. 아니. 동의하는 걸 넘어서 그녀도 지금이 바로 나아갈 타이밍이라고는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뜻 그렇게 하자고 말을 꺼낼 수가 없다.

위험을 감수하는 것? 좋다. 리턴에는 리스크가 따르니까.

그러나 그 리스크가 창공의 목숨이라면... 아린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는 제 손을 배 위에 올린 채였다.

"다른 사람들은?"

창공의 물음에 가장 먼저 응답한 건 륀과 어택이었다. 어쨌거나 지금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의견에 기꺼이 동의한 것이다.

"김 상, 아무래도 서 상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창공이 말이 틀린 적은 그다지 없으니까...?"

다음으로는 히사시와 나유. 히사시가 적극적이지는 못해도 겁쟁이는 결코 아니다. 그도 물러난 채 언젠가 있을 습격의 때까지 기다리는 건 싫었다. 그러느니 확실하게 일을 매듭짓는 게 낫다.

남은 사람은 아린과 아스터였지만, 이미 대세는 결정된 뒤.

"창공 님. 괜찮으시겠어요? 너무 무리하시면..."

"무리하지 않는 게 정답만은 아니야. ...게다가 의외로 아무 일 없을 수도 있고."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하지만.

창공은 굳이 마지막에 든 생각을 말로 입에 담지 않으며 일행들을 둘러봤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지 아린의 입술이 자꾸만 달싹거렸지만 그는 깔끔히 무시했다.

"그럼 가죠."

* * *

덜컹덜컹.

길은 갈수록 험해졌다. 그리 좁지는 않았지만 넓지도 않다. 주변 풍경은 수려했지만 제대로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풍경 속에 적이 숨어있다고 생각하노라면 오히려 섬찟하기만 했으니.

적은 어디에 숨어있을까. 지금쯤 일행을 지켜보고 있을까? 아니면... 이번 사건은 그저 엄청난 우연일 뿐일까?

제발 마지막이길 바라는 사람이 몇 있었지만 그들조차도 그러리라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이 모든 게 다 우연이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엄청난 우연들이 겹치고 겹쳐야 하는 걸까.

피할 수 없는 싸움을 앞두었고, 싸우기로 결정했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해진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리고 마차가 갑자기 멈추었다. 멈춤과 동시에 신속히 밖으로 나가는 일행들. 무기를 들고 주변을 경계하지만 적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전방 20m는 떨어진 곳. 갈림길이 있었는데, 그 정가운데. 새빨간 색깔의 덩어리 하나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마치 이정표처럼.

가까이 다가가서 확인해 보니 사람의 팔이었다. 특이한 점은 검지를 똑바로 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확히 갈림길의 한 방향을.

"장난을 참 좋아하는 놈이네."

창공이 보이지 않는 적에게 빈정댔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모든 게 단순한 우연일 거라는 최후의 희망은 사라졌다. 적은 분명히 일행을 노리고 있다.

"륀. 지도 너한테 있지. 우리가 원래 가야 할 길이 어디야?"

"...이쪽."

잘린 팔이 가리키는 곳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지도에 따르면 이쪽은 그냥 막다른 길이야. 마을도 없어. 아마 사냥꾼들이나 약초꾼들이 사용하는 길일까. ...그다지 들어가고 싶진 않지만 피할 수는 없겠지."

"지독하고 특이한 상대야. 피해 간다고 해서 피할 수 없어. 결국 마주쳐야 할 거야. 가죠. 누군지 얼굴이나 한 번 봅시다."

물론 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리고 그 마음은 안쪽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팔이, 팔들이 방금과 같은 형태로 놓여있었다. 악의가 너무 대놓고 느껴지는 터라 헛웃음까지 나올 정도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한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간다는 건 말이 되질 않는다.

안쪽. 안쪽의 안쪽. 더 깊숙한 안쪽.

그는 거기에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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