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 막다른 길 (3)
* * *
"안녕?"
깔끔한 옷차림. 피보다 붉은 적색 머리칼. 서글서글한 인상을 주는 동그란 눈동자. 인상적인 머리카락의 색만 아니었다면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청년으로 보일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드는 사람이다.
다만 눈동자는 공허하고, 표정은 없었으며, 자연스럽게 앉은 자세에서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부자연스러움 때문인지 그저 평범하고 순박한 청년이라 하기에는 위화감을 잔뜩 풍긴다.
결정적으로 손에 들린... 정체불명의 오물로 얼룩덜룩 잔뜩 더러워진 칼에서는 한없이 불길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이쯤 되면 '그 시체는 네가?' 라거나 '그것들 내가 한 거다' 라는 말은 필요가 없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문구의 참뜻을 이런 불쾌한 방식으로 음미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너희가 여기까지 찾아올 줄 알고 있었어."
목소리는 어떤가. 짐짓 쾌활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그러나 고저가 없다. 사람의 성대에서 나오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차라리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낸 인조 목소리라 하면 납득할 수 있겠다.
"길가에 널린 시체 쪼가리들을 보고도 여기까지 순순히 오리라고 말이야. 알잖아. 개개인은 등신들이라도, 여럿이서 모이면 괜히 용기가 나는 거지. 그래서 머리 나쁜 놈들은 항상 다 같이 죽더라고."
"말을 잘 골라서 해야 할 텐데."
물론 시니컬한 면이야 창공도 뒤지지는 않는다.
"죽기 전에 너무 말이 많으면 유언장 여백이 부족해지니까."
"오, 이런."
평화롭게, 대화로 해결이 되리라는 생각은 일절 없다. 창공뿐 아니라 모든 일행들이 그랬다. 애초에 시체를 토막 내서 이정표로 써먹은 자가 '오늘은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하고 물러날 턱이 없지 않은가.
누군가는 죽어야 오늘의 이 불쾌하고 돌발적인 만남이 끝날 수 있다. 모두들 말없이 무기를 꽉 부여잡는다.
"그래. 차라리 네가 더 마법사답구나. 포를렌탈 교수의 최후는 정말인지...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이제 와서 놀라운 사실도 아니었지만, 역시 포를렌탈 교수... 그리고 그녀를 호송하던 마법사들은 전부 이 사내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 같았다. 륀은 까닭 모를 공포를 분노로 치환하며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섰다.
"당신이... 마법사 열한 명을 전부 죽인 건가?"
"음, 그렇지. ...아니. 사실 도움을 좀 받긴 했어. 나도 참 영락했군. 마법사 한 무리와 신의 만남을 주선하는 데에 남의 손을 빌려야 하다니."
"도움이라는."
"쉿. 어쨌든 주범은 나란 말이다. 이 프리그가 마법사들을 죽이고... 시체를 토막 내고... 완전히 썩어 문드러지지 않도록 조치하는 건 조금 힘들었어."
"말이 참 많군."
창공은 언제든지 시위를 당길 준비를 한 채 자신을 프리그라 지칭한 사내와 대화했다. 분명 프리그는 현재 무방비하게 바위 위에 앉아있을 뿐인데, 선공을 가져가자니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압박감이 무겁게 어깨를 짓누른다.
그럼에도 먼저 움직여야 하는가? 아니면 때를 기다려야 하는가?
결국은 현상 유지.
"말이 많단 말이지... 글라키스가 듣는다면 실컷 비웃을 말이로군. 수다쟁이 프리그라. 그래. 나치고는 참 쓸데없는 서론이 길구나."
"글라키스라고...?"
익숙한 이름. 창공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지만 프리그는 이미 자아도취되어 들리지 않는다는 듯 계속해서 말만 이어갔다.
"하지만... 젠장, 이천 년이라고. 십 년이면 강산도 바뀐다고들 하는데 그럼 그동안 족히 이백 번은 넘게 강산이 변했다는 거 아니야. 이 정도로 긴 세월을 상상할 수나 있어? 기껏해야 이삼십 년은 살았을 너희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을 지나 다시금 이 땅에 나왔으니, 아무리 나라 해도 혀를 쉬게 둘 수가 없더군."
주요한 키워드는 두 개. 이름과 시간. 사람은 각자 익숙한 것에 손길이 먼저 닿는 법이다. 창공이 '글라키스'라는 이름에 신경이 쏠려 있을 때, 쌍둥이는 '이천 년'에 집중했다.
다이셀리시아 사람인 그녀들에겐 너무나 익숙한 울림을 주는 말이었으니까.
"이천 년..."
아스터가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당신은 설마... 키트라 제국 멸망전 때의...?"
"그렇지."
정답이라는 양 프리그가 고개를 세차게 위아래로 끄덕인다.
"내가 깨어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말이야... 도무지 이 썩어빠진 세상은 이천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바뀐 게 하나 없더군! 심지어 나라들도 몇몇을 제외하면 바뀐 나라가 없다니, 그제나 저제나 참 지루하고 재미없는 세상이로군. 아하, 마법사들은 바뀌었구나. 한심하고 추잡하게."
"뭐야?"
"마법사들! 비참하게 목숨을 구걸하던 포를렌탈의 모습을 너희가 봤어야 했는데. 다른 마법사들이 죽어나가는 꼴을 보면서 넋이 나갔는지 살려달라는 말밖엔 못 하더라고. 빌어먹을... 나 때 마법사라고 하면 귀족들보다 더 대가리 뻣뻣한 놈들이었는데."
"당신이 마법사에 대해서 뭘 안다고 지껄여?"
프리그는 륀의 노기 서린 목소리에도 어깨만 으쓱거렸다.
"원래 포를렌탈 그년은 조금 따먹은 다음에 죽이려고 했는데 그 꼬라지를 보니 서던 좆도 죽더라고. 너는 조금 다를까? 난 강간할 때 질질 짜면서도 입으로는 반항하는 여자가 좋더라."
"당신 같은 남자한테 범해지느니 차라리 자결하겠어."
"오... 그럼 네가 죽는 걸로 할까?"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프리그는 제 허벅지를 두드리며 작게 웃었다.
"너희들 중 한 명만. 한 명만 목숨을 내놓으면 돼. 저울이라는 건 말이지. 꽤나 정교해서 깃털 하나만큼의 무게만 차이나더라도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거든. 너희는... 우리의 반대급부야. 젠장, 나도 귀찮다고. 서로 쉽게 쉽게 가자."
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죽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둘째치고서라도, 저울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들은 아예 짐작이 안 된다.
'아니면 이놈이 왕들이 말했던 그...'
어쩌면 창공 일행이 해결해야 한다는 균형의 어그러짐과 관련이 있는 사내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프리그나 전에 만났던 글라키스는 죽어야 한다는 뜻일까?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와중,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프리그의 최소 목적. 창공 일행 중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단 한 명의 목숨을 거두러 왔다는 것.
"서로 쉽게 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도록 하지."
한숨을 쉬며 말하는 창공. 축 늘어져있던 그의 양 어깨가 한순간에 긴장되어 힘이 잔뜩 들어가고, 시위가 잔뜩 당겨진다. 눈 깜짝할 새에 모여드는 파란 빛무리. 프리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지만, 이미 늦었다.
아니, 늦었을 터였다.
"쿨럭!"
화살은 시위를 떠나지 못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시위는 느슨해지고, 잔뜩 만곡되었던 활몸은 원래의 모양대로 돌아간다. 허리를 숙이는 창공. 그의 입에서 끈적한 피가 주르륵, 흘렀다.
"오빠...!"
"창공아!"
"나가... 나가라고! 맞서 싸워!"
필사적으로 짜낸 창공의 외침에 혼란에 빠졌던 나유가 고함을 치며 프리그에게 달려갔다. 그 뒤를 어택, 륀, 그리고 아스터가 따른다. 이제 뒤에 남은 사람은 셋. 창공, 아린, 히사시. 그때까지도 창공은 계속해서 간헐적으로 피를 토해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정상이었건만, 그건 착각에 불과했던 모양이었다. 마나가 움직이자마자 가슴 안쪽에서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피가 역류한 것을 보면.
"서 상! 괜찮으십니까?"
"네 눈에는... 이게 괜찮아 보이냐?"
"오빠! 무리하지 마요... 무리하면 안 돼요..."
"김아린!"
창공은 허리를 세우고 아린의 한쪽 어깨를 으스러질 듯 꽉 움켜쥐었다. 고통에 신음하려던 아린은 맞닥뜨린 창공의 얼굴을 보고선 멍한 표정을 했다.
항상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그의 얼굴에 끔찍한 고통이 드러나 있었기 때문에.
"뭐해... 어서 연주해. 다른 사람들은 다 싸우고 있잖아... 병신처럼 가만히 있을래?"
"오, 오빠... 오빠아..."
"고다! 너보고 나가서 싸우라고는 안 할 테니까 놈이 이쪽으로 오면 죽도록 막아!"
"알겠, 알겠습니다!"
아린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공포 때문에. 죽음의 공포 때문에.
갑자기 시작된 싸움 때문은 아니다. 항상 싸움은 갑작스러웠으니까.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도 아니다. 아이는 낳고 싶었지만 자신이 죽어야만 한다면 구차해질 생각은 없었으니까.
다만 사랑하는 사람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창공 자신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녀가 인생의 동반자라 생각하는 사람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아린의 머리와 가슴을 잠식했다.
손이 벌벌 떨리고, 호흡이 가빠진다. 저 앞에서 들려오는 칼 부딪히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는 벽 너머에서 들리듯 불분명하다. 시야가 점점 어두워진다.
"연주해! 김아린!"
오로지 하나만. 창공의 목소리 하나만이 보이지 않는 장막을 뚫고 아린에게 꽂혔다.
"네... 네...! 연주, 연주할게요!"
하지만 무엇을? 자신 있는 모차르트? 창공이 좋아하는 베토벤? 비발디? 슈베르트? 아니면 처음 활을 잡았을 때 연주했던 연습곡들?
자세만 잡으면 떠올랐던 악보가, 눈앞에 그려졌던 악보가 흐리기만 하다. 오선은 삐뚤빼뚤 곧지 못하고, 음표들은 각자 자리에서 이탈해 유리창의 빗물처럼 흘러내린다.
그러다가 결국 간신히 그녀의 손이 움직였다. 활이 현을 긁고, 기어이 음이 생성된다.
하지만 그 음은 무엇도 아니었다. 음도, 화음도, 음악도, 연주도 아니었다.
다만 바이올린을 모르는 사람이 아무렇게나 현을 긁어대는 것처럼, 무의미한 소음과 불협화음의 연속일 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