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 막다른 길 (4)
* * *
두 사람이 동시에 한 사람과 싸우면 두 배의 전투력을 발휘할 것이라 모두들 생각하고 또 그것은 창공 일행도 마찬가지였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현재 프리그와 직접적으로 맞붙어 싸우고 있는 인원은 총 넷. 나유, 어택, 륀, 아스터. 네 명이 한 명을 둘러싸고 동시에 교전. 조력자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마법사 열 명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프리그다. 넷이서 싸운다 해도 손쉽게 승리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최소한 비등비등한 싸움이 이루어져야 하는 게 아닌가? 전후좌우에서 동시에 무기가 짓쳐 들어오는 것이다. 팔이 넷에 무기도 넷이라면 또 모르되, 프리그의 팔은 두 개에 불과했고 잡은 무기는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 검 하나뿐이다.
프리그에게 상당히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그의 표정에는 여유가 흘러넘쳤다. 표정만 여유로운 게 아니라, 몸짓에서도 다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네 사람이 필사적으로 공격을 하는 데 반해 그의 몸놀림은 오히려 여유롭기까지 하다.
"이야앗! 하앗!"
"이이이익!"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른다. 앞에서 내리치는 나유의 칼날을 가볍게 빗겨내고, 춤추듯 몸을 돌려 아스터의 검을 가볍게 피하는 프리그. 이제껏 공격다운 공격은 한 번도 하지 않은 그였으나, 방어만으로도 우위에 선 싸움을 하고 있다.
이렇게 된 데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로, 합격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동료가 바로 옆에 붙어 있으니 무기를 휘두름에 있어서도 아군이 다치지 않도록 생각하면서 휘둘러야 하고, 내 공격이 동료의 공격을 방해하지 않도록 신경도 써야 한다.
사실 이제껏 일행의 싸움은 그들이 소수였고, 적이 다수였으니 이런 상황은 상정할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게다가 단 한 명을 상대로 넷이 달라붙어 싸워야 할 거라고 예상이나 했을까.
두 번째는 단순한데, 프리그의 실력이 월등했다. 그와 싸운다는 건 마치 깨지지 않는 바위에 죽도록 곡괭이질을 하는 것과 같았다. 힘들고 미쳐버릴 것 같은데,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공격을 멈출 수도 없다. 프리그가 방어를 멈추고 공세로 전환한다면 도대체 어떤 참극이 벌어질지 두려웠기 때문에. 이쯤 되면 적을 쓰러뜨리려 공격하는 게 아니라 적이 공격하지 못하도록 이쪽에서 소모적인 공격을 펼치는 지경이다.
"공격이 단순하군. 검이 아깝다."
얼마나 여유가 넘치는지 나유더러 무기에 비해 실력이 부족하다 비웃기까지 하는 프리그. 땀방울이 이마에서 송골송골 배어나와 얼굴을 타고 흐른다. 전력질주를 한 것처럼 숨이 가쁘다. 힘이 빠지기 시작하니 당연히 공격이 더욱 단순해질 수밖에.
그러나 나유를 격분시키기엔 충분했다.
"닥쳐!"
화르르륵!
새벽별에서 푸른 불길이 솟구치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그 모습을 본 프리그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건."
"받아라아아아!"
크게 휘둘러진 새벽별. 검로를 따라 허공에 그려지는 불길. 분명 위력적일 테지만 그 무지막지한 휘두름과 갑자기 뿜어진 열기 때문에 나유의 옆에 있던 어택과 아스터는 공격을 멈추고 한 발자국 물러서야 했다.
게다가.
태앵!
"검에 불을 붙이면 뭐가 달라지나?"
프리그의 방어는 여전히 견고했고, 나유의 공격은 이번에도 허무하게 가로막혔다. 오히려 새벽별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 게 더 방해가 된 셈이다.
아니, 어쩌면 아주 의미없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륀이 정신을 가다듬고 주문을 외울 틈이 생겨났으니까.
"Ellig..."
"안 돼."
하나 그마저 프리그에겐 의미가 없었다. 마법은 고도의 집중을 요구하는 활동. 주문 영창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짧았지만 프리그가 검을 휘두르는 시간은 더욱 짧았다. 결국 이번에도 륀은 가까스로 검을 들어 막아내야 했다.
"크흐윽!"
방어에만 집중하는 프리그가 유일하게 선공을 가하는 순간. 그것은 륀이 마법을 사용하려 시도할 때였다. 륀으로선 아주 미칠 지경이었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마법에만 집중하기 위해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넷이서 공격해도 아슬아슬한데 륀이 빠지는 순간 프리그가 단번에 나머지 셋을 압도할 가능성, 시야가 차단되어 자칫 마법이 엉뚱한 대상에게 발현될 가능성을 고려한 결과다. 창공의 화살이 이럴 때에 힘을 쓰지 못하는 것처럼.
그러고 보니 창공으로부터의 지원이 없었다. 아린의 연주 또한 들리지 않는다. 아니, 들리긴 들렸는데 귀에 딱딱 꽂히던 그 연주가 아니다. 아이가 멋모르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엉망진창. 심지어 느껴지는 어떠한 효과도 없다.
륀은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지 확인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지만 프리그는 고개를 돌릴 틈조차 주지 않았다.
'별일은 아니겠지만...!'
제발 그러길 바라며, 다시 검을 휘두른다. 한편 나유는 이를 악물고선 새벽별에 붙은 불을 껐다. 공격은 통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동료에게 방해가 되었으니까. 분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판단할 수 있었다.
쉬지 않고 빗발치는 칼날과 둔기. 그리고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공격을 흘려보내는 프리그. 이 무의미한 싸움이 대체 언제까지 지속될지 의문이었다. 아마도 전부 지치거나, 프리그가 공격으로 태세를 전환할 때까지이리라.
"죽어라아아!"
"하아아앗!"
우연찮게,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넷의 무기가 동시에 프리그의 정수리로 내리쳐진다. 싸움이 시작되고 나서 정말 처음으로 제대로 된 합격이었지만 프리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당황하기는 커녕 침착하게 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공격을 막아낸다.
채앵!
프리그의 오른손은 손잡이를 쥐고, 왼손은 검신을 받치고 있다. 네 사람분의 힘이 동시에 실렸지만 부들대지도 않는다. 모든 공격이 한없이 덧없기만 하다.
"이천 년만에 살아났건만, 내 적수가 너희들이라니 다시 죽고 싶은 심정이다."
"뭐ㄹ."
"하!"
만세를 부르듯 한 번 몸을 떨치니 그를 짓누르고ㅡ적어도 모양새는ㅡ있던 무기들이 동시에 번쩍, 들린다. 그 상태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아 전방위를 타격하는 프리그.
무시무시한 소리가 나며 그를 둘러싸고 있던 네 사람이 텅 빈 가방처럼 힘없이 나가떨어진다.
"안 돼!"
그 모습에 히사시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지만 용기를 낼 수 있는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쏘아보는 프리그와 마주하자, 히사시는 제자리에 멈춰서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꽉 깨물어야 했다. 추하게 이를 딱딱 부딪히고 싶지 않다면. 사실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지금 프리그의 앞에서 제정신을 유지하지도 못했으리라.
"아으으..."
한 번의 공격으로 모든 힘이 다 빠진 듯, 네 사람은 땅 위에서 신음하며 몸을 꿈틀거리고 있다. 전혀 대응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 그러나 프리그는 관심도 없다는 양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뭐야, 대체. 난 무엇을 위해 그런 귀찮은 짓을 한 거지?"
"무슨..."
히사시가 힘겹에 입을 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이어지는 프리그의 목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시체가 썩지 않도록 보존하고, 토막내서 지나가는 길에 뿌리고... 그냥 내가 먼저 이스트리로 쳐들어가 다 죽여버릴 걸 그랬어. ...거기 너. 네가 죽을래?"
"에?
"귀찮다, 귀찮아. 어차피 너희들 중 하나면 죽으면 돼. 사람 죽이는 일이 이렇게 지루하긴 또 처음이다. 빨리 죽이고 일보러 가련다. 대답해. 네가 대표로 죽을래? 아니면... 평소에 꼴보기 싫었던 놈 있으면 얘기해 봐. 그놈 죽여줄 테니... 헛!"
허공을 날카롭게 가르는 소리. 한껏 여유를 부리던 프리그가 재빨리 팔을 움직여 검을 곧추세운다. 파열음이 울려퍼지고, 도탄된 화살은 튕겨나가 저 멀리 사라졌다. 푸른 빛무리를 꼬리에 달고서.
"쿨럭... 퉤!"
바닥에 피 섞인 침을 뱉는 창공. 이번엔 프리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를 향했지만, 창공은 무심하기만 했다.
"너."
뭔가 이상했다. 두려움... 께름칙함... 위구... 무심하고 당당하기만 했던 프리그의 눈빛이 창공과 마주하고 나선 온갖 부정적인 감정으로 흔들리는 게 대놓고 엿보였다.
아니, 잘 보면 그의 시선은 창공을 향하는 게 아니었다. 정확히는 창공이 들고 있는 활. 고풍스럽고, 유약을 칠한 듯 번쩍이는 활을 향하고 있다.
"대체 그 활을 어디서...?"
"하."
창공이 대답했다. 제대로 된 대답은 아니다.
"이천 년 전 시체라 그런지 이천 년 전 골동품을 대하는 태도가 남다르군."
"...그래. 그 활을 어떻게 구했는지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드디어 재미 좀 보겠구나. 널 죽이고 활을 부러뜨려 해묵은 원한을 갚겠다."
"아린아. 빨리 수습해서 뒤쫓아. 질 나쁜 스토커한테 걸린 모양이야."
그 말만 남기고 뒤돌아 뛰어가는 창공. 어떤 대단한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었다. 아니지만, 별다른 계획이 없는 것도 사실. 어차피 죽음이 눈앞으로 다가왔으니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벌인 일인지도 몰랐다.
멘탈이 완전히 나가버린 상태이던 아린이 지시를 잘 따르고 있나 확인할 틈도 없었다. 칼 든 살인마가 쫓아오고 있는데 어떻게 뒤를 돌아보랴.
이끼 잔뜩 낀 나뭇등걸과 땅 위로 튀어나온 뿌리를 뛰어넘고, 풀숲을 헤치고, 얼굴에 달라붙은 거미줄을 손으로 문지른다.
어디로 이어지는 길인지 고민할 시간이 없다. 실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곳은 막다른 길이었으니까.
"씨발."
절벽 끝에 선 창공은 한숨을 내쉬며 화살을 장전했다. 쏴아아, 하고 저 밑에서 거센 물줄기 소리가 난다. 이제와서 죽음이 무서운 건 아니고 미련이 남은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의 처지가 어딘가 우스웠다.
가만히 있었으면 누군가 하나는 죽었겠지만 자신은 짧은 삶이나마 누렸을 것을,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널 죽이겠다! 널 반드시 죽이겠다!]
꿈에서 피맺힌 절규를 내뱉던 노인의, 예전에 그가 직접 절벽에서 밀어버렸던 노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오늘 소원성취하겠군, 늙은이."
저벅... 저벅...
사냥꾼은 천천히 다가왔다. 사냥감에게 퇴로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다시 만난 소감이 어때?"
"좆같은데."
활을 들어 올리며 대답하는 창공.
"방금 이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죽기 전에 너무 길게 말하면 유언장 공백이 부족할 거라고. 유언은 그게 다인가? 그게 다라면 반대로 공백이 너무 남지 않겠나."
"나는."
시간을 끌어보려 아무 말이나 하려 했지만, 아무래도 프리그는 사람을 죽이기 전 시간을 끄는 취미가 없는 것 같았다. 무섭게 달려드는 걸 보면.
곧바로 시위를 팽팽히 당기고, 얼마 남지 않은 체력을 끌어모아 화살에 마나를 전달한다. 피가 저 아래에서 울컥, 올라오지만 다시 삼켜버린다.
피잉!
꼬리를 달고 날아가는 화살. 인간의 능력으로는 보고서 쳐낼 수 없는 짧은 거리. 그러나 프리그는 너무나 간단하게 마력이 담긴 화살을 쳐낸다. 창공의 바람과는 달리 폭발하지도 않고 저 멀리 날아가는 화살. 뒤늦게 일어나는 폭발은 마치 놀리기라도 하는 모양새다.
결국 남은 길은 단 하나뿐. 도저히 살아남을 희망은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저 밑으로 뛰어내리는 것. 그나마 노인 때처럼 땅이 아니고 물이라 조금은 나아 보였다. 이미 정한 이상 망설임은 없었다. 두려움도.
전에는 떨어뜨렸던 자가, 이번에는 떨어진다.
"어딜!"
"...!"
두 발이 공중에 뜬 순간,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 어깨에서 어리까지. 천 개의 칼날로 베어낸 후 천 개의 인두로 지지는 듯한 아픔.
"창공아아아아아아!"
찢어지는 비명소리는 빠르게 눈앞을 스치는 광경 앞에서 너무나 아련하고 흐릿했다.
풍덩!
창공은 자신이 물에 빠졌음을 가까스로 인지할 수 있었다. 온몸을 감싸는 차가운 감촉. 반대로 뜨거운 고통.
검찰청어린이집때의기억초등학교입학식때의기억중학교에서선생과말다툼을했을때의기억고등학교때는별기억이없고서울대입학은부모에겐당연했지그러다어느날눈떠보니탄광에서노예가되어화장실에서딸잡다가걸리고어쩌다가탈출하고또탈출하고기사로서임에다사제와마법사불타는검찢어진폐와절벽에서떨어진노인의꿈이
내 아이를 가진 여자.
차갑다.
뜨겁다.
아프다.
...
..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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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