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 남겨진 사람들 (2)
* * *
어제 창공이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오늘.
사실 잘 모르겠다.
대각선으로 크게 그어지는 칼. 솟구치는 피. 추락하는 모습.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생생하게 앞에 떠오른다. 태양을 바라보다 눈을 감아도 그 빛의 잔상이 한동안 남아있는 것처럼, 그 장면은 완전히 내 머릿속에 박혀버렸다.
잊을 수 있을까. 그 모습을. 아마 안 될 것 같다. 죽는 날까지, 어쩌면 죽어서도 남아 날 영원히 괴롭히겠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더라?
아니, 중요하지 않다. 시간은, 더 이상 내 인생에서 시간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이제 내게 남은 시간은 오로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인데. 내게 남은 시간의, 인생의 길이는 고통의 길이일 뿐인데.
잠시나마 행복했던 시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20년 동안의 의미 없는 삶. 그 뒤에 찾아온 몇 달 남짓의, 집 아닌 곳에서 지낸 애달프면서 수줍고 행복했던 내 시간은 이제 없다.
긴긴 겨울이 지나고 간신히 봄이 왔다고 생각했다. 움츠리고 있던 꽃이 폈고, 난 따스한 봄바람을 받으며 달콤한 꿈을 꾸었다. 결국 언젠가는 지나가고야 말 계절이기에, 지금의 행복을 이 손안에 최대한 그러모으려.
그러나 봄은 가혹한 운명의 수레바퀴에 너무나 쉽게 짓밟혔고, 여름과 가을은 오지도 않은 채 난 갑자기 겨울을 맞이해 버렸다. 꽃은 얼어붙어 떨어지고, 훈훈하던 바람은 칼날처럼 매섭기만 하다.
이제 봄은 오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 겨울이 찾아왔고, 난 차디찬 얼음 아래에 몸을 눕힐 운명인 것이다.
"...일단 시청에 신고는 넣어봤어."
목소리. 물속에 머리를 담그고 있는 듯, 먹먹하게 울린다. 그러다가 불분명하던 목소리는 차츰 자신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곳은 이스트리 강의 지류라, 계속 물살을 타고 내려온다면 여기까지 떠내려 오는 모양이야. 도시 중간을 타고 흐르는 데다 밤에도 여러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이라 발견이 안 될 수가 없대."
아니... 택이 오빠의 목소리는 원래부터 제대로 된 모습이었다. 흐리멍덩하게 무너진 건 내 정신 쪽이겠지. 무슨 말인지는 들린다. 받아쓰기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아마 한국말이 아닌 모양이지.
"형님. 그럼 일단 기다리는 것 밖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 외에..."
떠들라지.
"..."
내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마룻바닥이 보이는 걸로 봐선 틀림없다. 그러면서 나뭇결의 모양이나, 개수, 얼룩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자국들을 보면서... 그냥 보고 있다.
그러다가 무심코 깨닫는다. 내가 왼손으로 쥐고 있는 검집. 불을 뿜는 멋진 검, 새벽별.
[가장 어두울 때를 위한 빛]. 칼날에는 그리 적혀 있다고 했다.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닌가?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마지막 희망. 깊고 깊은 절망 밑바닥에 가라앉아 겨우 자신의 빛만 뿌리는, 얄팍하고 헛된 희망이 필요한 때인데.
그러나 새벽별이 아무리 날카롭다 해도, 뜨거운 불을 뿜어낸다 해도 죽은 사람이 살아돌아올 수는 없다.
따라서 희망은 없다. 내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내 모든 걸 주었던 남자가 사라져 버려였으니까.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바라본다.
"며칠이나 지났지?"
무어라 말하던 택이 오빠가 움찔거렸다.
대충 그렇게 보였다.
"엊그제... 였지."
"솔직하게 말해 봐."
오빠를 바라봤다.
라기보단... 오빠와 나 사이의 공간을 바라봤다. 그 어딘가를.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
"아직 모르잖아. 떠내려가다가 누군가에게 구조됐을 수도 있고, 아니면 강가에 떠밀려 가서 몸을 추스르고 있을지도. 창공이라면..."
"사람이야."
내가 화났나?
그런 것 같기도 한데...
모르겠다. 머리랑 입이랑 따로 움직여서.
"창공이도 사람이라고. 칼에 베이면 아프고, 폐병에 걸리면 피를 토하고, 숨을 못 쉬면 죽어. 정말 살아있다고 생각해?"
"가능성은."
"가능성? 그래. 가능성은 있겠지. 오늘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가 아침햇살에 눈을 뜨면, 지구에 있는 내 집일 가능성은 있겠지. 병에 걸려 시한부가 된 사람이 칼에 베이고, 절벽에서 떨어져 급류에 휘말렸다가 멀쩡히 돌아올 가능성은 있겠지. 사실 이 모든 게 다 꿈이라는 가능성도 있겠지."
"나유야..."
"아니,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어. 이게 다 꿈이었다면. 창공이가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그날 시체를 발견했을 때 이스트리로 돌아왔다면. 어쩌면, 어쩌면 우리가 서로 만나지 않았다면."
뜨거운 것이 내 볼을 타고 흘렀다.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게 잔혹한 꿈이었다면 차라리 괜찮았을 텐데. 깨어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끝남절망추락좌절슬픔아픔비탄체념낙담불행암흑실의비관낙망죽음파탄파국허망허탈통곡막다른골목빠져나갈수없는함정잔인답답억울실망처량고독혼자원망후회자책울음쓸쓸혼란그늘밤길.
이제 세상에 내 자리는 없어.
"떠날래."
* * *
그는 죽었다.
어택은 가능성의 측면을 이야기했지만, 그러면서 딱히 그렇게 생각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사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랬다.
일행을 떠나겠다 선언한 남나유를 말리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정말로 그가 죽었다.
내 육체를 지배하던, 정신을 더럽히던, 이제 와선 정말로 그랬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정말로 사랑했던. 내 주인님이었던.
서창공이 죽었다.
시체를 본 건 아니지만 그 병에, 그 부상에, 그런 곳에서 떨어지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란 없다. 시체조차 발견되지 않은 걸 보면 한밤중에 바다로 흘러갔거나, 강바닥에 가라앉았거나.
"...!"
소란이 일어나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저 다툼에 끼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 방. 이스트리의 한 여관에 있는.
걸터앉아 침대 시트를 천천히 손바닥으로 쓸었다. 오래된 일이니 당연하지만, 흔적은 없다. 하지만 기억은 남아있다. 이곳에서 그에게 범해졌던 기억이.
더러운 구멍을 잔뜩 쑤셔지면서 성의 기쁨에 몸부림을 쳤던. 그의 성기를 숭상하는 눈길로 바라보며 정성스럽게 봉사했던. 남에게 복종한다는, 교수인 내가 노예의 신세로 추락한다는 느낌에 쾌락이 끓어올랐던.
"아..."
가랑이의 느낌이 이상해 살펴보니 이미 속옷이 축축하게 젖어 있다. 그는 떠났지만, 내 몸에 지워지지 않을 흔적은 남긴 셈이다.
하지만 이제... 어떻게 하지.
쉬운 것부터 해야지. 그래야 효율이 좋으니까.
그가 나를 범하는지 여부는 관계없이, 난 매일 언제든지 봉사할 수 있도록 관장을 했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따라서 난 가방에서 관장 도구를 집어 들었다. 욕실에서 마법으로 불태워 처분한다면, 륀 퐁파두르가 한때 성노예였다는 증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셈이다.
이날만 기다려오지 않았던가.
결국 그는 사라졌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버렸다. 처녀라 불릴 자격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난 결국 처녀로 남았다. 아스터도 그럴 테지.
사랑하는 동생은 많이 슬퍼하는 모양이지만, 시간이 약인 법이다. 세상은 넓고 좋은 남자는 많다. 서창공이라는 남자는 이제 빛바래고 아련한 기억의 한 장으로 사라지리라.
"..."
난 내 손에 들린 관장 도구를 바라봤다. 이까짓 더러운... 치욕스러운 도구. 당장 불태워 버리자. 지금 당장. 아무도 모르도록. 나조차 잊어버리도록.
...
태우자.
...
잊자.
...
옷을 벗었다.
가지런히 개어 바닥에 내려놓는다. 스타킹과 가터벨트는 그대로.
속옷을 벗었다. 팬티는 이미 젖어있다. 축축하다. 벗어서 역시 바닥으로.
정신을 차려보니, 난 이미 관장액을 조합해 도구에 가득 채운 채였다.
"뭐지."
그는 죽었다.
더는 이런 더러운 일을 할 필요가 없다. 내 몸은 나의 것이다. 그 어떤 부정한 인간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진리의 도서관이다. 게다가, 이렇게 해 봤자 단순한 자위보다 못한 행위일 뿐이다. 안아줄 남자가 없는데 여자가 몸을 깨끗이 하다니, 우습지 않은가.
...
미지근한 관장액이 뱃속에 들어찬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모르겠다.
데구르르...
텅 빈 주입기가 욕실 바닥을 굴렀다. 뱃속을 가득 채우는 불쾌한 느낌. 어서 내보내고 싶다.
대체 이런 행위의 어디에 의미가 있지?
그래서 변기에 앉았다.
아니, 다시 일어섰다.
참았다. 꾸르륵, 소리가 들려오고 고통과 쾌감의 사이에 있는 어중간한 느낌이 전신을 달린다. 그래도 참았다.
허락을 받기 전엔 함부로 내보낼 수 없으니까.
"...누구의?"
그는 죽었어, 륀.
이제 아무도 네 행동을 강제하지 못해. 아침저녁으로 관장을 할 필요 없어. 치욕스럽게 개목줄을 차고 밤거리를 알몸으로 거닐 필요 없어. 남자에게 아양을 떨며 그의 쾌락을 위해 봉사할 필요 없어.
주인님은 없어. 사실 처음부터 그딴 건 필요하지도 않았어.
넌 자유야, 륀 퐁파두르. 자랑스러운 웨리의 교수. 지식의 탐구자.
"그래도... 그래도..."
그렇다면 왜 이렇게 허탈하지? 날 노예로 부리던, 비참한 시궁창에 처박은 남자가 사라졌는데 왜 이렇게 쓸쓸하지? 날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서라면 남자들이 줄을 설 텐데, 내가 왜 욕실 바닥에 엎드려서 배설감을 참아야 하지?
넌 진리를 위해 인생을 바치기로 한 마법사야.
"주... 주인..."
주인님 따위는 없어.
"주인님..."
필요하지 않아. 네 인생은 오롯이 네 소유야.
"주인님의 허락이 있어야... 륀이 관장을 끝낼 수 있어요... 제발... 너무 고통스러워요... 뱃속이... 배가 터질 것 같아서..."
이러지 마. 제발.
싫어.
그만해.
돌아와 주세요.
그는 죽었어.
아니야.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니야.
죽었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