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 남겨진 사람들 (5)
* * *
기도를 끝낸 아스터는 눈물을 완전히 닦아낸 뒤, 흐트러진 의복을 정돈했다. 헤어날 수 없는 비탄에 빠진 와중에도 성직자로서 몸에 밴 품위 유지 의식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단순히 그것이 완전히 일상 속 루틴이 되기도 했거니와, 아무리 슬프다 할지언정 자신보다 더 슬퍼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런 티를 내는 건 그 사람들에 대한 무례라는 그녀 자신의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항상 의연하게. 꿋꿋하게. 휘어져도 부러지지는 않는다. 아니, 약자를 보호할 때엔 휘어지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자신의 검처럼 꼿꼿하게.
그런 아스터가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아린의 방이었다. 창공은 죽었고, 일행은 두 쪽으로 분열되었다. 그들을 떠나보낼 때엔 의외로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아린이지만, 그 속은 얼마나 타들어갔을까.
너무나도 잘 짐작이 되었기에 아스터는 수시로 아린을 찾아가 위로했다. 자신도 위로받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담고서. 아린을 위로하는 게 자신을 위로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서.
뚜벅. 뚜벅.
서늘한 복도에 오직 아스터의 발걸음 소리만이 벽 이리저리 부딪히며 옅은 반향을 남긴다. 거대한 납골당, 차갑고 딱딱한 관으로 양쪽 벽면이 빼곡히 들어찬 공간을 걷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가야 해.'
이윽고 아스터는 아린의 방 앞에 이르렀다. 본디 나유와 함께 쓰던 2인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유마저 떠났으니 얼마나 외로울까. 다시 한번 마음속에 연민을 되새기며 노크를 하려던 그녀의 귀에 문 너머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 미안해애애..."
"아린 님? 아린 님...!"
황급히 손잡이를 돌려 보지만 잠겼는지 돌아가지 않는다. 응급상황이라고 판단한 아스터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선 다음 힘차게 문을 들이받았다.
쾅!
본디 그렇게 튼튼하게 만들어지진 않았는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 방 안에 들어선 아스터의 눈에 보인 건, 첫 번째로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는 아린과... 방 한가운데 매달려 대롱대롱 흔들리는 올가미였다.
상황을 파악하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실 시간이 걸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보면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는 광경이다. 아스터는 무서운 기세로 아린에게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아린 님! 괜찮으세요? 괜찮으신 거죠!"
"아... 아, 아스터 씨..."
"오, 신이시여."
첫 번째로 드는 생각은 감사. 아린과 뱃속의 아이는 모두 무사했다. 적어도 무사해 보였다. 신체적으로는.
두 번째로는 연민. 도대체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힘들었기에 자살까지 시도했을까.
마지막 세 번째로는 슬픔. 똑같은 상실을 공유하는 사람으로서의 슬픔.
교리에 따르면 자살은 금지되어 있다. 금지를 넘어서 지옥에 떨어져도 할 말이 없는 대죄이다. 비록 아린이 교인은 아니고 믿을 의무도 없으나, 종교인 아스터는 따끔하게 그녀를 혼내야 했다.
혼내야 하는데... 아스터가 할 수 있었던 건 아린을 끌어안고 그저 함께 울어주는 일밖엔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종교인으로서 잘못된 태도일지는 모르겠지만 아스터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다만 부둥켜안고 한참 눈물을 흘릴 수밖에.
"...고마워요."
이윽고 간신히 진정한 아린이 아직 울음기 잔뜩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미안해요."
"아니에요. 살아만 있다면..."
아스터는 아린을 침대로 인도한 뒤 의자 위에 올라가 밧줄을 이리저리 잡아당기며 매듭을 풀어냈다. 보이기엔 허술해도 실제로는 튼튼하게 묶여 있었기에 여간 어렵지 않았지만.
톡,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떨어져 바닥에 추욱 늘어지는 밧줄. 뺨을 타고 흐르는 한 줄기 땀을 닦아내며, 아스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다시는 이러면 안 돼요. 아린 님의 생명뿐만 아니라."
"네. 알아요."
아린의 손이 배를 감쌌다. 그 안에 있는 것을 소중히 지키려는 듯.
"그래도 확실하게 깨달았으니까요."
"다행이네요, 정말."
"오빠가 없는 세상이라도... 낳아서 잘 길러야겠죠. 하늘이의 반은 오빠니까. 이제 지구로 돌아가는 건 단념했어요. 아마 안 될 테니까. 제 꿈도..."
씁쓸함, 아련함. 그리움. 아스터는 어떤 위로의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떤 말로 아린을 위로할 수 있을까. 아는 바, 불가능했다.
"그치만 딱 하나 남았으니까요. 제게. 오빠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안겨 준 선물."
"선물이군요. 아린 님에게도... 제게도."
"똑똑하게 예쁘겠죠. 말도 잘하고. 음... 오빠처럼 말 잘하는 건 안 되는데."
"창공 님께서는 배려가 약간 부족하셨으니까요."
"알려주고 싶어요. 세상은 힘든 일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살 가치가 있다고. 얼굴을 보기 전부터 널 기다리고 사랑해 온 사람이 있다고."
"아들일까요, 딸일까요."
"오빠 닮은 아들이었으면 좋겠네요."
"저도요."
촉촉한, 새빨간 두 여인의 눈이 서로를 마주했다.
"아직도 원하신다면, 제 고향으로 안내하고 싶어요. 저희 부모님 두 분 다 좋으신 분들이세요. 분명 여러모로 의지가 될 테죠."
"그럴까요?"
아린은 이미 충분히 힘겨웠다. 어떻게든 살아가려 의지를 불태우고 있지만, 그럼에도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이 갑자기 행복으로 뒤덮이지는 않는다.
지친 몸을 쉬일 곳이 필요했다. 퐁파두르 자매의 고향. 아퀴탄의 푸아송 남작령. 그곳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을까.
따지기엔 정보가 부족했고, 시간이 부족했고, 몸과 마음의 여유가 부족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아스터에 대한 믿음은 충분했다.
"가요. 그곳으로. 오빠가 가려고 했던 곳에."
"그랬... 죠. 비록 창공 님께선 가실 수 없게 되었지만, 아린 님은 반드시 데려다 드릴게요. 원하시는 때까지 머무를 수 있도록."
이윽고 그녀들은 륀에게 다시 한번 푸아송 남작령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할 것을 제의했다.
"그래?"
시큰둥한 반응. 얼핏 보기에는 쌀쌀맞기조차 했다. 실제로 아스터는 그리 생각했는지 낯빛이 불편하게 변했으나 그저 그뿐, 별다른 의사 표현은 없었다.
하지만 아린에겐 륀의 목소리 저 낮은 밑바닥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는 듯했다. 연인이라곤 하나 창공과 륀 둘의 사이는 거짓된 관계에 가까웠다. 아린도 이제껏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륀에게는 어떤 마음이 있었던 걸까.
이젠 다 늦어버린 이야기지만.
다음날, 세 여인은 이스트리를 떠났다. 이제껏 탔던 마차는 너무 커져버렸기에 이스트리 교구에 넘기고 대신 작은 크기의 마차를 받을 수 있었다.
이젠 정말로 이스트리와 작별하는 것일까. 이 항구도시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던가. 안타깝게도 만남보다는 헤어짐이 더 많았지만, 동시에 창공과의 달콤쌉싸름ㅡ사실 달콤함은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ㅡ한 추억이 서린 장소이기도 했다.
아쉬움이 드는 까닭은 그런 추억도 추억이기에, 이제는 사랑하던 남자와의 추억이기에, 그런 추억이 서린 장소를 떠난다는 생각 때문이리라.
목적지는 같았으니 방향도 같다. 그렇지만 길은 달랐다. 창공을 하루빨리 요양하기 좋은 곳으로 데려갈 필요가 없으니 무리해서 길이 좋지 않은 지름길로 잡을 필요가 없었고, 더욱이 그곳이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곳임에야.
"..."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귀를 스치는 소리라고는 오로지 바람 소리와 마차 바퀴 소리, 새들 지저귀는 소리.
그럼에도 여행길이 언제나 조용할 수는 없는 법. 그것은 갑작스럽게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찾아왔다.
"무슨 일이시죠?"
아스터가 마차를 멈추었다. 길가에서 손을 들어 멈추라는 신호를 보낸 사람 때문이었다.
행색은 추레하다. 거친 직물로 짠 옷. 군데군데 기운 자국이 가득하다. 수염은 덥수룩하고 머리는 이리저리 헝클어져 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딱히 특별한 건 아니었다. 평균적인 농민의 모습이 이러했으니.
"사제님... 맞으십니까?"
"그럼요. 교황청 직속 복음화성 사제, 아스터 퐁파두르랍니다. 제가 어떻게 형제님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실은 고해성사를 조금 요청드리고 싶어서... 가까운 곳에 사제님이 안 계서서 말입니다."
"어머나."
아스터로선 고민하고 말고도 없었다. 사제는 고해성사를 요청받았을 때 거부할 수 없었으니까.
"아무래도..."
"빨리하고 다녀와. 내가 여기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륀도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마법사인 자신이 간섭할 문제가 못 되는 일이니까.
"형제님. 혹시 이 근처에 적당한 장소가 있을까요?"
"예, 사제님. 이 근처에 지금은 어떤 분도 안 계시는 성당이 하나 있습니다. 주임 사제님이 옛적에 떠나신 뒤로는..."
"교단에 보고를 드려야겠군요."
멀어지는 목소리. 이내 침묵.
여기까지 아무 문제는 없었다.
진짜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너무 늦는데."
"성사를 보는 사람들이 많은 건 아닐까요?"
"글쎄."
륀은 무언가를 끄적이던 수첩을 접어 품속에 집어넣고선 아스터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내가 알기로 고해성사라는 게 그리 오래 걸리는 게 아니야. 뭐, 신앙심 깊고 교리에 대해 빠삭하다면 죄를 낱낱이 고하느라 오래 걸릴 수는 있겠다만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이 그럴 것 같지는 않고."
"한 번 다녀올까요?"
"당신은 여기에 있어. 위험할 수 있으니까 나 혼자 다녀오지. ...아, 무슨 일 있으면 소리 질러. 최대한 빨리 돌아올 테니."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별생각은 없었다. 사실 그 농부가 악한 마음을 품었다 한들, 사제 양성 과정에서 수년간 병장기 다루는 법을 교육받은 아스터를 제압할 수는 없으니까. 거기에 마법 교수인 륀도 갔지 않은가.
걱정은 없었다.
없을 터였다.
"교수님."
"아무래도 일이 난 것 같아."
"네?"
"흔적도 없어. 아스터도, 그 뜨내기도. 애초에 그 성당인지 뭔지는 있지도 않아. 젠장, 어떻게 된 거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