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173화 (173/178)

〈 173화 〉 세상 바깥에서 온 사람들

* * *

아마 초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그냥 시답잖은 장난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딱 아무것도 모르는 초등학생 다운 생각이다.

우리 반에서 어떤 놈이 집에 있는 지폐 몇 장을 가져왔었다. 별건 아니고, 그냥 5만 원짜리 몇 장 가져와서 친구들에게 유세를 떨 작정으로. 지폐들을 부채처럼 펼치고 제 얼굴에 부치며 어울리지도 않는 꼴값을 떨고는 했다.

멍청하게도.

아니나 다를까, 점심시간이 지나고 보니 가방 안에 고이 모셔두었던 돈은 이미 어디론가로 사라진 뒤였다. 그놈은 울고불고 지랄을 떨며 선생에게 돈이 없어졌다 하소연을 했고, 선생은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모두 눈 감아."

반 모두를 책상에 앉혀놓고 눈을 감게 시키는 것이다. 뭐 누군가는 눈을 꼭 감았을 테고, 누군가는 실눈을 뜨고서 주변을 염탐했으리라.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지만.

"선생님은 너희들에게 정말 실망했어. 친구의 돈을 훔치는 게 얼마나 나쁜 짓인지 몰라서 그래? 나는 안 했다면서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 너희는 다 같은 반 친구들이니까. 친구의 잘못은 내 잘못이야."

하면서 초등학생 수준으로도 헛웃음이 나오는 도덕에 관한 일장 연설을 늘어놓은 뒤, 마지막에 한 마디.

"훔친 사람은 조용히 손만 들어. 아무도 눈 뜨지 말고. 지금 솔직하게 나오면 특별히 봐 줄 테니까."

난 그냥 눈을 감고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누가 훔쳤는지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딴 걸 내가 알아서 어디에 쓰겠는가. 그냥 빨리 자백하고 이 지루한 시간이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내 바람과는 달리 어느 누구도 손을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너희들 정말 이럴 거야?"

선생은 그 뒤로도 몇 마디 지껄였지만, 자기가 손을 안 들겠다는데 뭘 어떻게 하겠는가. 곧 얌전히 항복 선언을 했다.

"좋아. 다들 눈 떠. 하지만 명심해. 돈 훔쳐 간 사람. 나중에 꼭 벌받을 거니까."

이렇게 지나갔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이때, 내 머릿속에 재미있는 생각이 하나 떠오르고야 만 것이다. 사실 그때 기준으로나 재밌었지 지금은 생각하지도 않을 일이지만, 누구나 어릴 때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곤 하지.

"야. 모여 봐."

난 내 옆자리 놈들을 조용히 불러모으고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나 돈 훔친 사람 누군지 안다."

사실은 몰랐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난 반 구석에서 책상에 머리를 처박고 자던 놈을 가리켰다.

"쟤야."

"엠창?"

난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리킨 놈은 우리가 다니던 학교에 어울리지 않는... 정확히 말하면 학군 자체에 어울리지 않는 놈이었다.

항상 꾀죄죄하고, 옷도 낡았고, 가방도 그저 그렇고... 까놓고 말해 좀 그럴듯한 가정의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어떻게 해서 다니게 된 거지 새끼랄지. 급식비도 못 내서 지원받는다는 건 비밀도 아니었다.

왜 걔를 콕 찝었냐면... 가장 그럴듯하게 보였으니까. 당연히 누군가의 돈이 도둑맞았으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 제일 가난한 사람에게 눈길이 가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개연성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거짓말을 할 때엔 반드시 개연성이 있어야 한다. 초등학생도 아는 본능적인 사실이다.

"와... 거지가 돈까지 훔치네."

"너희들한테만 알려주는 거니까 다른 애들한테 말하지 말고. 특별히 너희들한테만 알려주는 거야."

게다가 난 이런 말을 하면 이놈들은 반드시 널리 퍼뜨릴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원래 남한테 말하지 말라고 하면 말하고 싶어지는 것 또한 본능이 아니던가. 여기에는 충분히 퍼지고 퍼지다 보면 끝내 이 가짜 소문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찾아낼 수 없을 거라는 계산도 들어 있었다.

죄책감은 딱히 들지 않았다. 그냥 별거 아닌 장난인데다가, 실제로 범인이 걔가 맞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리고 아니면 아닌 거니까. 아무튼 반 아이들과 선생이 우스워 보였기에 충분히 할 수 있겠다고 꾸민 일이었다.

결과는 뭐... 소문이 반 전체에 퍼지는 데엔 1시간으로 충분했다. 아니, 솔직히 1시간도 아니다. 쉬는 시간 10분에다가 수업 시간에 선생 몰래 돌리는 쪽지가 함께라면.

"야. 네가 훔쳤다며?"

그리고 소문을 마지막으로 들었던 놈들 중, 가장 멍청하고 용감한 놈이 거지에게 다가가 위협적으로 질문했다.

"뭐?"

"돈 네가 훔쳤잖아. 너 왜 아까 손 안 들었어?"

"그, 그거 나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네 집에 돈 없는 거 다 알아."

등신들의 특징이 뭔지 아는가? 떼로 몰려다니지만 한 사람만큼의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데, 누군가 등을 밀어주기만 하면 저희들끼리 부화뇌동해서 물어뜯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대부분은 그런 등신들로 이루어져 있지.

"구라치지 마!"

"너 맞잖아!"

"가방 열어 봐!"

주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가방 지퍼는 힘없이 열리고 너덜너덜해질 기세로 탈탈 털렸다. 가방 안에서는 교과서밖에 나오지 않았다. 몽당연필이랑 볼품없는 지우개도 나오긴 했다.

자, 지폐는 나오지 않았다. 등신들은 순순히 물러났을까?

"다른 데 숨겼지!"

"나 아니라고!"

장담하건대, 전쟁 포로 몸수색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다. 책상 속은 물론이요, 사물함에 주머니까지. 거지는 울고불고 지랄을 했지만 난 상관없었다.

아니, 상관없는 게 아니지. 난 그때 내 책상에 앉아 즐겁게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만들어낸 한 편의 희극을. 놀랍지 않은가. 말 한마디에 내가 설계한 대로 모두가 움직인다는 게. 놀라우면서도, 우습기 짝이 없다.

너무나 우스웠다. 애꿎은 가방이 실내화에 짓밟히는 것도, 거지가 울면서 결백을 주장하는 것도, 아무런 증거도 나오지 않았지만 거지를 몰아세우는 다른 놈들을 보는 것도. 대체 얼마나 멍청하면 이런 거에 넘어가지?

세상이 너무나 쉬워 보였다.

"그만! 그만해! 무슨 일이야!"

선생이 들어와서 깜짝 놀라 소리칠 때까지도.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거지를 교무실로 데리고 갔을 때까지도.

딱히 걱정은 되지 않았다. 내가 설계한 대로라면, 선생은 내가 맨 처음 소문을 퍼뜨렸다는 걸 모를 테니까. '설마 나까지 오겠어?' 이런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

아니었다.

"서창공. 선생님 따라 교무실로 와."

아, 걸렸구나.

...어쩔 수 없지.

딱 이 생각부터 들었었다. 가는 길에 선생이 날 보고 뭐라고 했지만,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내 생각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됐었는지 되짚어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무실에서 선생이 야단을 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안 되겠다 싶었던지, 선생은 내 부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마도 그때엔... 둘 다 동부지검에서 일하고 있었을 거다. 놀랍게도 둘 다 시간이 남았었는지 한달음에 달려오더라.

부르기는 했지만 검사 한 쌍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니 선생은 잠시 움츠러든 기색이었지만, 이내 하찮은 용기를 내어 내 죄상을 낱낱이 고백했다.

"사실인가요?"

부모 둘 중 어느 쪽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는데, 애초에 둘 다 그런 목소리니까. 비슷한 사람끼리 만난다더니 딱 그런 꼴이다.

"네, 사실입니다. 창공이가."

"됐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여기부턴 확실히 기억난다. 내 아버지 되는 사람은 선생의 말을 끊고선 머리를 숙여 보였다.

"창공이는 며칠간 등교시키지 않겠습니다. 저희가 집에서 잘 가르치겠습니다.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네? 아니 그."

"가자."

난 이렇게 갑자기 집으로 끌려가듯이 귀환했다. 그리고 집에서 뭘 했냐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야단을 치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방에서 책을 읽는 것도 뭐라 하지 않았다.

물론 내가 나서서 죄송하다고 하는 일도 없었다. 내게 반성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일단 잠깐은 좋았다. 오히려 어쩌면 내 부모가 날 위해 학교 분위기가 잠시 가라앉을 때까지 날 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문제는, 진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그러니까 내 말은, 밥을 차려주는 일도.

집 앞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를 사 와서 저희들끼리만 먹고, 나에겐 한 입도 주지 않았다. 먹으라는 말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점심시간이었고,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서 별로 배고프진 않았으니까.

저녁때엔 집에 있는 컵라면을 둘이 끓여먹었다. 원래 내 몫으로 먹으려고 둔 거였는데, 나에겐 일언반구도 없이 둘이서만 먹었다. 그제서야 난 둘의 의도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순순히 항복하긴 싫었다.

방 안에서 책을 읽었지만, 문틈으로 들어오는 컵라면 냄새에 집중이 잘 되질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라는 말이 없어 가지 않았다. 부엌에 나가 보니 자기들끼리만 밥을 먹고 있었다. 먹으라는 말도 없고,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물 마시는 걸로는 뭐라 하지 않는 거였고, 난 그래서 물배를 채웠다. 조금 나았다.

점심.

이번에는 피자였다. 내가 좋아하는 포테이토 피자. 내 몫은 한 조각도 없었지만.

몰래 냉장고를 열어 보니, 텅 비어있었다. 지난밤에 다 처분한 모양이었다. 난 아파지는 배를 부여잡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굶으면 배가 아프다는 건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저녁에는 짜장면. 집 안에 진동하는 짜장면 냄새. 문밖으로 나가는 짜장면 두 그릇.

지나가며 슬쩍 봤다. 정확히는, 그게 내 눈길을 잡아끌었다.

짜장면 그릇에 남은 짜장과 야채 쪼가리라도 먹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다음 날 아침.

들기름 냄새에 잠을 깼다. 뭔가를 볶는 소리. 이윽고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소고기 미역국. 내 생일마다 끓여 주던. 그나마 부모가 해 주는 음식 중 가장 좋아하는.

문득 눈물이 흘렀고, 더는 배고픔을 참을 수 없어 방 밖으로 나가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잘못했어요..."

"네가 뭘 잘못했는지 말해 봐."

난 뭐든지 늘어놓았다.

"거짓말 한 거랑... 친구 보고, 흐윽... 버, 버, 범인이라고... 한 거랑... 엄마랑 아빠 학교에... 오게 한 거랑..."

"아니야."

"느, 늦게 잘못했다고..."

"아니야."

그 후로도 난 몇 번을 더 내 죄상에 대해 고백했지만, 이 두 검사가 바라는 정답은 아니었다. 도무지 알 수 없고 배고프고 원통해서 목놓아 우는데, 내 귀에 꽂히는 한 마디.

"서창공. 네 잘못은 철저하지 못했던 거야."

"그런 간단한 일 하나 제대로 못 해서 엄마 아빠 직장에서 와 선생에게 사과하게 만들어?"

"들킬 일 같으면 처음부터 하지를 마. 주변 사람들한테 민폐니까."

"알았어? 눈물 그쳐. 뭘 잘했다고 울어."

억지로 눈물을 닦아내자. 내 앞에는 미역국 한 그릇과 밥 한 공기가 있었다.

내가 이제까지 먹었던 모든 끼니들 중에서 그때의 그 미역국이 최고로 맛있었다고 생각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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