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174화 (174/178)

〈 174화 〉 세상 바깥에서 온 사람들 (2)

* * *

창공은 자신이 어딘가에 누워있다고 느꼈다. 마치 딱딱한 바닥에 두꺼운 이불 하나를 깔고 누운 것만 같은 느낌.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닥거릴 수 없었고 눈도 떠지지 않았다.

아니, 실은 눈을 뜨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다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의식은 있는가? 아마도 있을 것이다. 의식이 있지 않다면 어떻게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다만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생각뿐이었다. 그 생각마저 또렷하지 못해, 마치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생각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무언가 더 떠올릴 것들이 많았지만 어째서인지 생각은 그다음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기엔 너무 희미했고, 모호했고, 피곤했으며 어지러웠다.

지루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 혼자서 던져진 뒤로. 어딘가에 누워있다는 감각과 무한한 암흑의 공간을 부유하고 있다는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 몸은 누워있으되 정신은 마치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인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위도 아래도 없이.

그러다가 저 멀리 별 하나가 생겨났다. 아주 작은, 희미한, 하나의 별. 혹은 무언가의 빛인지도 몰랐다. 창공은 그것에 작은 흥미를 가졌지만 그것은 단지 그것일 뿐이었으며, 별다른 작용을 하지도, 주지도 못했다. 하긴 별은 아무리 바라본들 별일뿐이다.

얼마인지도 모를 시간이 다시 지나, 무심코 별을 돌아본 창공의 마음속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너른 밤하늘 위에 좁쌀만 한 크기로 박혀 있던 별은 어느새 보름달 만큼이나 커져 있었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곳은 그가 머무를 공간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 별이야말로 그가 이곳을 빠져나가는 데 무언가 도움을 주지 않을까. 아니, 그래야만 했다. 별 외에 별다른 방법은 보이질 않았으니까.

하지만 별을 바라보는 것 이외에 달리 무슨 방법이 있는가? 걸어도 보고, 팔다리를 휘적거려도 봤지만 가까워지는지 멀어지는지 그조차도 명확하지 않았다. 잠시 여러 방법을 시도해 보던 창공은 쓸데없는 움직임을 멈추고 마음을 놓아버렸다.

이게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별은 점점 커지고 있었으니까. 보름달만 하던 별은 더욱, 더욱 몸을 불려나갔다. 혹은 그곳에 다가가고 있거나. 하얀 별이 공간의 절반을 채우고, 절반을 채운 별은 다시 공간의 대부분을 채웠다.

그는 별의 표면에 있었다. 혹은 별의 안에. 이제 그를 둘러싼 공간에 어둠은 없었다. 전부 하얗다. 티끌 하나 없이 하얄 뿐이다. 다만 이 공간 전환의 의의가 색깔의 변화에만 있다면 창공은 적잖이 실망했으리라.

실망할 새도 없었다. 세상으로 돌아왔으니까.

* * *

"아아으윽... 아..."

다시 찾은 세상은 고통으로 그를 반겨주었다. 등 전체를 대각으로 가로지르는 화끈한 통증. 몸 전체를 무겁게 짓누르는 듯한 감각. 뼈 마디마디에 느껴지는 한기와, 열기와, 싸함과, 쓰라림과... 모든 감각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리고 고통은 빠르게 지나갔다. 마치 그동안 느꼈어야 했을 고통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가 한꺼번에 물러나는 것처럼. 그것이 있었다는 것조차 의심될 정도로 몸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세상에, 일어났군!"

"슬슬 깨어날 거라고 생각했지. 정신이 드나? 내 목소리 알아듣겠고?"

창공은 재빠르게 자신이 어딘가에 누워있으며,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파악했다. 별로 크게 도움이 되는 사실은 아니었지만, 머리가 너무 빙빙 돌아 눈을 뜨기도 어려웠다. 전신의 신경에서는 잠들어 있었던 동안 감지되었던 모든 전기신호의 잔류가 남아 감각을 희롱했다.

"급할 필요 없네. 천천히, 뭐든지 천천히 하게. 어차피 여러 날이 지났으니 이제 와서 서두른들 달라질 것이야 있겠는가."

이어지는 자그마한 웃음소리. 목소리로는 성별을 유추하기 어려웠다. 남자인 것도, 여자인 것도, 아이인 것도, 노인인 것도 같았다. 힘과 지혜가 동시에 느껴지며 모든 감정에서 초탈한 듯싶다가도 잘 들어 보면 분명 그 속에는 감정이 실려 있다.

그러나 거기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호의인지 적의인지 알 수 없다. 그것을 알기 위해선 눈을 뜨고, 정신을 온전히 차려야 했다. 그들은 인내심이 많아도 창공은 아니었다.

이미 암실과도 같은 심상 세계를 경험했기에 의식이 이쪽 세상으로 돌아오고 나선 눈꺼풀 너머로 통하는 빛에도 눈이 부셨지만, 본격적으로 빛이 스며들어오니 눈을 뜨는 것조차 괴로울 지경이다.

그렇게 창공이 온전히 눈을 뜨는 데에만 어림잡아 10분은 걸렸을 것이다. 그는 동굴 안에 있었다. 벽면과 천장이 전형적인 동굴의 모습이었으니 아마 맞을 터이다. 하지만 바닥은 축축하고 차갑기는커녕 그 반대였다.

확실히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운 느낌을 받긴 했지만, 실제로도 비슷했다. 나뭇잎과 나뭇가지들이 짜임새 좋게 서로 얽혀 마치 침대의 매트리스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대체 이런 보잘것없는 재료들로 어떻게?

다음으로는 창공의 근처에서 자그맣게 타오르는 모닥불. 그리고 그 모닥불 근처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있는 자들. 총 네 명이었다.

목소리로 신상 정보가 잘 가늠이 가질 않았었지만, 얼굴을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성별도, 나이도 알 수 없다. 창공은 그렇기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들 모두 대단히 우아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칼. 살짝 끝이 올라간 눈꼬리. 도시의 마천루처럼 위부터 아래까지 내리꽂히는 콧날과 부드럽고 둥글둥글한 입.

그리고 머리칼 사이로 튀어나온 귀는, 유난히 뾰족한 모양새였다. 사람의 귀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람이 아니었다.

"당신들은?"

"아니, 눈을 뜨자마자 처음 하는 말이 그건가? 아무리 그래도 우린 자넬 구한 은인이거늘,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받을 줄 알았는데."

그러더니 다시 저희들끼리 킬킬대기 시작한다.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다른 소리를 했으니 짜증이 살짝 나기도 했지만 확실히 말은 그들의 말이 맞았다.

더군다나 원래대로라면 창공의 죽음은 확정적이었을 터. 그만한 높이의 절벽에서 떨어지고, 칼에 등을 베이고, 급류에 휘말리기까지. 솔직히 이쯤 되면 눈을 뜬 이곳이 저세상은 아닌지 의심마저 들 정도다.

이럴진대 빈말일지언정 감사 인사는 하는 게 도리가 아니겠는가.

"...감사합니다."

"별로 감사한 것 같진 않지만 그쯤 해서 받아두도록 하지. 사실 우리도 선의에 자넬 구한 건 아니니까."

"선의로 구한 게 아니다..."

"이거지."

그ㅡ혹은 그녀ㅡ가 활 하나를 들어 올렸다. 너무나도 익숙한 활. 왕들의 무덤에서 선물 받은 활. 2천 년 전, 엘프들의 왕 엘렌튀네가 쓰던 활이었다. 이젠 창공의 활이었지만.

"자네가 이 활과 함께 물살에 떠내려가던 게 아니겠는가. 한데 놀랄 일이지. 기대도 하지 않은 곳에서 우리의 활을 보다니. 사연이 있는 것 같아 일단 건지고 보았다네."

고개를 끄덕이려던 창공은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머리를 짚었다. 살짝 어지러웠다.

"뭔가 묻고 싶은 말이라도?"

"...당신들은 혹시 엘프... 이십니까?"

"그렇지."

충격은 없었다. 사실 아직 완전히 몸을 회복하지 못해 이미 머리가 멍한 탓인지도 모른다. 시원스러운 질문에 시원스러운 대답.

"그렇군요.

창공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 한 마디로 모든 게 설명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급류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 와중 강가를 지나다 창공과 함께 떠내려가는 활을 보고 활의 제작 양식이 다르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는 동체시력을 어찌 인간이 발휘할 수 있으랴.

어떻게 알아보았다고 치더라도 사람이 빠지면 대부분 물귀신이 되는 급류에 뛰어들어 그를 구해낼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인간이라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인간이 아니라면 가능하다. 더군다나 뾰족한 귀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엘프의 특징으로 꼽는 신체적 특징이 아닌가.

이쯤 되자 살짝 당황한 기색을 내비친 쪽은 외려 엘프들이었다.

"자네는 놀라지도 않는가? 난 우리가 엘프라고 하면 자네가 놀라 다시 정신을 놓을 줄 알았는데."

"그래야 합니까?"

"아니."

대화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어색한 침묵이 동굴에 서서히 차오르던 그때, 다른 엘프가 입을 열어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그는 아직 휴식이 필요해요. 중요한 질문만 빠르게 하고 다시 눕혀야죠. 이게 대체 뭐 하자는 짓인지..."

"일어난 사람이 '여기가 어디죠? 오늘이 언제죠?' 라고 묻지도 않는데 그럼 내가 뭐라고 해야 되나. 내가 당황스러울 지경이라네."

"시끄러워요. 자, 인간 청년분. 제 이름은 아릴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그제서야 창공은 자신들이 통성명조차 나누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서창공이라고 합니다."

"서창공..."

창공의 이름을 들은 아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리 엘프들이 인간과 교류한 지 어언 2천 년이 흘렀지만, 인간들의 작명법에 대해 무지한 것은 아닙니다. 다이셀리시아 그 어디에도 그렇게 이름을 짓는 국가는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 말이 틀린지요?"

그는 짧은 순간 사실을 말해도 될지에 대해 고민했다. 적당히 얼버무릴 수도 있었지만, 왠지 엘프들에게는 거짓을 말해서 얻을 이익이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다이셀리시아가 아닌 다른 세상에서 왔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설마 그를 잡아다가 엘프들의 광산에서 부려먹기라도 하겠는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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