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 세상 바깥에서 온 사람들 (3)
* * *
"믿는데요."
"...아, 그렇습니까?"
엘프의 대답은 생각 외로 너무나 시원시원했다. 정작 질문했던 창공이 무심코 당황할 정도로.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말이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닐진대, 엘프들은 딱히 놀라는 기색조차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슬며시 기대감이 도는 모양이었다. 창공이 다른 세상에서 온 것과 엘프들이 기대하는 것에 도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조금 더 대화가 필요했다.
"왜 그렇게 의아해하시죠? 요새 다이셀리시아 곳곳에서 서창공 씨와 같은 분들이 나타나고 있다 들었습니디만."
"제가 듣기로, 2천 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 뒤로 여러분 엘프들은 바다 건너로 돌아가 다이셀리시아 인간들의 역사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만, 의외로 알 건 아시는 모양입니다."
"몰랐지요."
아릴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저희들의 왕께서 이 사실을 예견하셨습니다. 그분께는 예언 능력이 있는지라..."
"왕이라고 하신다면..."
창공은 예전 왕들의 무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분명 알펜시아의 건국왕 알펜이 말하지 않았던가. 2천 년 전, 아네르들을 도와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엘프들의 왕에 대해서.
"엘렌튀네 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이름을 어떻게...?"
"제가 가진 그 활이 바로 그... 분의 것입니다."
그분이라는 표현이 맞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 보다는 엘프들 앞에서 지칭하기엔 올바른 표현인듯싶었다.
하지만 호칭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창공의 말에 네 엘프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진 것이었다. 반짝이는 눈동자 속에 깃든 감정은... 놀라움과, 보람. 밤을 새워 과제를 끝내고 동터오는 여명을 바라보는 뿌듯한 학생의 얼굴에 실린 듯한.
"이 활이... 그렇다면 당신이 바로 왕께서 예언하신 이방인이로군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전 예언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고, 제가 그 정체 모를 예언의 이방인인지에 대해선 더더욱..."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깨어난 직후의 몽롱하던 정신은 더욱 깨어나고 있었는데, 동시에 무뎌졌던 몸의 감각들도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빙글빙글 도는 머리. 축 처진창공은 순간 자신이 앉아있기도 힘든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ㅡ몸, 등 뒤를 가로질러 느껴지는 미세한 통증...
아릴의 말이 맞았다. 창공에게는 아직 휴식이 필요했다. 그는 휴식이 아닌 다른 것들도 필요했지만.
"괜찮나요? 몸 상태가 좋지 않다면 누워요. 누워서 편히 쉬도록 해요. 대화는 그 뒤에라도 언제든지 나눌 수 있으니."
"...괜찮습니다."
"괜찮지 않은 것 같은데..."
"그가 괜찮다고 하잖나, 아릴."
맨 처음 창공과 이야기하던 엘프 사내가 창공의 활을 소중하게 매만지며 말했다.
"인간들은 우리보다 여유가 훨씬 부족할 수밖에 없는 생명체라고. 그래서 그들은 모든 일을 당장 해결하고 싶어 하지. ...내가 읽었던 책에 따르면."
"시끄러워요, 데니셀. 자, 서창공 씨? 정말 괜찮겠어요?"
"제가 걱정되신다면 되도록 빠르게 부탁드립니다."
창공은 눈을 감은 채 귀는 열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생사의 관문에서 막 돌아온 탓인지 체력은 바닥을 기고 있었지만 아직은 버틸 만했다.
"우선, 선왕의 붕어 소식부터 전해 드려야겠군요. 엘렌튀네 선왕께서는 바로 지난해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항해가 영원히 평안하기를."
"수명이 다하셨나 보군요. 유감입니다."
"..."
순간 엘프들의 표정이 참 미묘하게 변했다.
"그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대화를 나눌 때가 있겠지요. 지금은 그분의 아드님이신 엘샤자드께서 왕위를 이어받아 우리 엘프들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예언이라는 것도 엘샤자드 왕께서 행하신 일이고요."
"그 예언이라는 게...?"
아릴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언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지엄한 것. 타인의 입을 타고 전해지면 안 됩니다. 실은 저희조차도 예언의 내용을 전부 듣지는 못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제가 그 예언의 이방인이라고 아시는 겁니까."
"왕께서 그리 말씀하셨으니, 틀림은 없을 겁니다. 선왕의 활을 든 이방인이 나타날 것이라고. 그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시작되고, 동시에 그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니 다이셀리시아의 운명이 바로 서창공 씨 당신에게 달렸다고 말입니다."
창공은 순간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들이 엘프가 아니라 실은 교묘한 사기꾼들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아무리 들어 봐도 헛소리 같지 않은가.
그렇지만 창공은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이들은 엘프가 맞다고. 엘프에게 헛소리를 하는 범종족적 취미가 없다면, 아마 왕이 바뀌었다는 것부터 창공과 얽힌 예언까지 모든 것이 진실이리라.
하지만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솔직히 말해 이까짓 세상이 어떠한 운명을 맞이하든 그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그는 지구인이었고, 단지 지구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혼란스러운 모양이군요..."
"...일단 계속 이야기해 보시죠."
"알겠어요. 우리의 왕께서는 예언하신 바를 토대로 저희에게 명을 내리셨죠. 운명의 이방인을 찾고, 다이셀리시아에서 다시금 준동하고 있는 무리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라고요."
"다시금 준동하고 있는 무리라면...?"
"그들은 지나간 시대의 공포. 인간들에겐 다른 세상의 역사라 느껴질 정도로 너무나 멀어져 버린. 하지만 달이 기울면 다시 차듯이 때가 되어 돌아온... 말하자면 이천 년 전의 망령들입니다."
뜬구름 잡는 소리나 다를 바 없었지만 창공에겐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프리그."
스스로 이천 년 전에서 되살아났다 밝힌 자. 압도적인 무력으로 창공 일행을 와해시키고, 창공 본인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은 장본인. 분명 앞에 존재하되, 그 현실감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던.
"어떻게 그 이름을?"
"이 등의 상처가 그놈 때문이었으니까."
기분 탓인지 그의 등에서 아릿하게 느껴지는 통증이 더욱 잘 느껴졌다.
"프리그에게 습격을 받고 살아남았단 말인가요? 아니지, 프리그가 이 근처에서 활동을? 그는 어디로 갔... 는지는 모르겠군요."
아릴의 목소리에서 놀라움이 느껴졌다. 창공의 등장을 알고 있었다면 당연히 이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부활한 프리그의 등장도 알고 있었을 테지만, 그 소재까지는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완전히 우연이었다. 엘프들이 이 근처를 지나고 있었던 것은. 또 그들이 창공을 구조한 것은. 이런 것을 보고 혹자는 운명이라 하겠지만, 창공에게는 그저 기막힌 장난으로만 느껴졌다.
"모르겠군요."
그 말을 끝으로 동굴의 한구석을 바라보던 창공은 무의식적으로 한 마디를 더 내뱉었다.
"글라키스..."
동시에 들려오는 숨을 삼키는 소리.
"글라키스라고?"
엘프 사내, 데니셀이 말했다.
"글라키스도 프리그와 함께 있었단 말인가? 그 자가?"
"그건 아닙니다. 적어도 저와 마주쳤을 때엔 따로 활동하고 있었죠."
"마주쳤다고? 싸웠나?"
"술 한잔했습니다."
데니셀은 헛소리하지 말라는 눈빛으로 창공을 쳐다봤지만, 이내 창공의 말이 진심임을 깨닫고 넋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다른 엘프들도 마찬가지. 사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창공 스스로도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이천 년 전 악의 무리가 부활하여 하는 일이 아무 관련 없는 인간과 맥주 한잔을 나누는 일이라니.
아니, 어쩌면 아무 관련이 없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글라키스... 프리그... 혹은 그 이외의 누군가도 예언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정확한 내용은 아닐지라도,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 내용이라는 것은 적어도 그들과 창공이 좋은 술친구가 된다는 내용은 아닐 것이다.
"...빌어먹을."
그는 예언에게, 운명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그들은 창공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왕 되시는 분을 만나야겠습니다."
"왕께서도 그렇게 되리라 하셨지요."
딱히 놀랍지도 않다는 듯, 아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품속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 창공에게 건넸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적혀져 있지 않았다. 물론 적당히 휴지로 쓰라고 건넨 것은 아니리라.
"우리들의 땅은... 인간들의 평범한 항해 기술로는 닿을 수 없어요. 그렇기에 우리의 임무를 다하고 돌아갈 때에 승선을 하여 그곳으로 향하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죠. 그것은 지도. 우리와 접선해야 할 곳이 그려져 있어요."
"지금은 아무것도 없습니디만. 나중에 나타나기라도 합니까?"
"보름달빛을 받으면. 이제 가을이 오고 있죠. 올해가 지나고, 내년의 세 번째 보름달이 뜨는 날 밤. 그때가 바로 출항 시간이에요. 반드시 기억하세요. 당신은 이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땅에 와야만 하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폐에 병이 있지 않나요?"
창공은 순간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생각해 보니 그의 목숨은 칼을 맞고 절벽에서 추락하지 않았더라도 이미 경각에 달린 상태였다. 계획대로라면 앞으로 몇 달을 더 버텨야 하는데, 가능한 이야기일까?
"내가 설명하도록 하지."
그동안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두 엘프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내 이름은 레스위네라 한다네. 자네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군의관에 가깝겠군. 자네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허락도 받지 않고 진찰을 해 버렸다네. 날 용서하게."
"별일 아닙니다."
진찰하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죽었을 텐데 용서하고 말고가 어디 있을까.
"자네의 호흡 소리에서 느꼈지. 폐와 기관지에 수도 없이 상처가 났다는 것을. 마침 자네와 같은 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한 전적이 있어서, 일단 응급조치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네. 당분간은 괜찮을 것이야."
"당분간... 말입니까?"
"말 그대로 응급조치니까. 내 마법으로 병이 더욱 진행되지 않도록 틀어막았을 뿐이네. 조치가 잘 되어 정상인처럼 거동할 수는 있겠지만 잠시일 뿐이야. 우리에게 와야 해."
"가면 고칠 수 있습니까?"
"전문 치료사들의 도움을 받으면 일도 아니지."
그까짓 진폐증 대수롭지도 않다는 느낌이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창공은 상당한 놀라움을 느꼈는데, 진폐증은 현대 의학으로도 완치가 불가능한 병이기 때문이었다. 마법이 발달한 다이셀리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레스위네는 별것도 아니라는 투로 말하는 게 아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운명이 자네를 이끎이 아니겠는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