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 꿈에서 현실로
* * *
맹렬하게 내리쬐는 햇볕. 하지만 그 더위는 이미 한풀 죽어 있었다. 바야흐로 여름이 마지막 숨을 토하며 뒤로 사라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거부하는 때. 창공이 동굴을 나온 것은 그 즈음이었다.
엘프들과는 그 뒤로 몇 번인가 더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있었다. 창공의 몸이 완전히 회복되면 임무를 수행하러 떠날 거라고 언급이야 했으나 설마 간단한 인사도 없이 떠날 거라고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창공은 약간 당황스럽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엘프들은 모르긴 몰라도 인간보다 훨씬 긴 세월을 사는 종족이 아니던가. 더욱이 몇 달 후면 다시 만날 것이 이미 약속되어 있었으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잠시 동안 얼굴 좀 못 보는 수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중요한 것은 이젠 창공도 떠날 때라는 사실이었다. 전통을 허리춤에 매달고, 활은 상반신에 가로질러 걸치고. 뭔가를 먹은 기억은 없지만 이상하게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떠나기는 떠날 것이되, 어디로 떠나야 할까. 답은 하나밖엔 없었다. 이스트리.
'그냥 다들 거기 좀 있었으면 좋겠는데.'
창공은 그다지 가망 없어 보이는 생각을 하며 산길을 걸었다. 일행들은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본래 그들은 쌍둥이 자매의 고향으로 향했으니, 그것은 오로지 창공 때문이었다. 그가 사라진 뒤로도 그 목적지를 고수하진 않았을 터.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원래의 목적지가 사라졌다면, 남겨진 그들은 어디로 향했을 것인가. 다른 계획은 딱히 존재하지 않았기에 명확한 목적지가 없고, 떠오르는 곳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이스트리에 머물 것 같지도 않았다. 그곳에서 뭘 한단 말인가. 지구로의 귀환을 포기하고 어부가 되려 결심한 게 아니라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창공의 눈에 저 멀리 이스트리가 들어왔다. 떠날 때도 여름이었고 다시 온 지금도 여름이지만 어쩐지 그 사이의 간격이 너무나 떨어진 듯하고 흐릿했다. 죽다 살아났기 때문이리라.
시가지 안으로 들어와 돌로 포장된 길을 걷고,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지나가다 보니 드디어 살아있다는 실감이 그의 가슴을 채웠다. 그 역시 사회적 동물이었다.
엘프들과도 만나기는 했지만... 그들은 도저히 같은 사람을 상대하는 기분이 들지 않아 논외다.
"..."
그는 익숙한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일행이 묵었던 여관. 아무리 그라도 어느 정도 감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잠시뿐이었고, 창공은 문을 활짝 열며 안으로 들어갔다.
"한 달 전 그 에트로지 청년 아니우?"
"맞을 겁니다."
주인은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기야 이곳에서는 흔하지 않은 얼굴상이니 다이셀리시아 사람들 머릿속에 지구인, 특히 동양인들의 얼굴은 기억에 남을 수밖에.
그것보다 벌써 한 달이 흘러 있었다. 동굴 안에서는 잠에 들었다 깨어났다를 수시로 반복했고, 마지막에는 엘프들이 말도 없이 사라진 탓에 제대로 된 시간을 파악하기가 힘들었었는데, 생각보다 오래 누워있던 셈이었다.
"그러면 제 일행들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다마다. 그때 다른 도시로 떠난다고 했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수. ...다들 안색이 좋지 않고 청년은 보이지 않길래 난 그렇게 생각했지. '아이고, 그 청년 죽었구나...'"
"그렇군요."
"그래도 무사한 걸 보니 그런 문제는 아니었던 모양이구려. 어디, 뭘 도와드릴까? 다시 묵으시려우?"
역시나 일행들은 이곳에 없었다.
"여쭤볼 게 있어서 그럽니다. 잠시 일행들이랑 따로 행동하다가 연락이 끊겼거든요. 혹시 어디로 향했는지 아십니까?"
"글쎄... 그걸 말하고 가진 않아서."
당연하다면 당연한 게, 우리 어디 간다면서 여관 주인에게 말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지금 창공이 매달릴 수 있는 동아줄은 이 주인밖엔 존재하지 않았다.
"뭐라도 들으신 건 없습니까?"
"어디 보자... 청년을 제외하면 여섯 명 아니우?"
"맞습니다."
"청년 둘이랑 그 키 큰 처녀끼리 먼저 방을 뺐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수. 그런 다음에... 그 왜 있잖수. 금발 사제님이랑... 그분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피곤에 찌든 얼굴인 그 처녀."
창공은 주인장의 설명에 작게 실소를 흘렸다.
"거기에... 키가 요만한 갈색 머리 처녀. 그 셋은 셋끼리 따로 출발했는데 역시나 어디로 가는지 말은 없었다우. 아무래도 먼저 출발한 셋 뒤를 따라가는 분위기는 아니긴 했는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하구려."
"아닙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창공은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 뒤 여관을 나섰다. 빈말이 아니었다. 여관 주인은 정말로 큰 도움을 주었다.
일단 일행은 둘로 쪼개졌다. 아마 그의 실종 이후 논쟁이 한 번 있었을 것이고, 구심점을 잃은 그들은 각자 따로 행동하기로 마음먹었을 터. 어택과 히사시, 나유가 어디로 향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린과 쌍둥이가 함께 움직였다면, 창공은 그들이 어디로 향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푸아송 남작령.'
퐁파두르 쌍둥이의 고향. 원래 일행이 향했던 곳. 아스터가 아린의 출산을 위해 그곳으로 데려갔을 테고, 륀 또한 못 이기는 체하며 제 동생을 따라갔으리라. 최근 들어 자매간의 사이는 분열되었지만 그렇다고 륀이 다른 쪽을 따라갈 이유는 없었다.
'문제는 어느 길로 갔느냐는 건데... 설마 같은 길을 잡진 않았겠지.'
프리그와 마주쳤던 길은 일종의 지름길이었다. 창공의 병세가 너무 심했기에 시간을 재촉하느라 그리된 것이었다. 하지만 아린의 출산이 임박한 것도 아니고, 굳이 트라우마로 남았을 그 현장을 다시 방문하려 하지도 않았을 터.
창공은 잡화점에서 지도 한 장을 구해 길을 잡았다. 현대 지도와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의외로 나와있을 것은 다 나와있었기에 경로를 탐색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스트리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길은 단 두 갈래뿐이었고.
문제라면 푸아송 남작령이 있는 아퀴탄 국경까지는 광활은 키르케의 국토를 완전히 가로질러야 했다는 것이다.
"젠장."
* * *
아린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선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었다. 아마 꿈 때문이리라. 꿈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리움과 애틋함이 아직까지 잔상으로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창공의 꿈이었다.
"오빠..."
이것은 일상과도 같았다. 하지만 고통까지 일상화가 되지는 못했다. 시간이 약이라고는 하지만, 도대체 언제쯤 이 고통이 무뎌지게 될까. 아린으로서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
방 안에는 그녀 혼자였다. 창문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한낮이었지만, 방은 한없이 싸늘했다. 륀도 없었다. 아스터가 실종된 뒤, 그녀는 하루의 절반은 아린을 보살피고 나머지 절반은 아스터를 찾아다녔다.
분명 어제 나갔으니 지금은 들어와 있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아린은 몸서리를 쳤다. 갑자기 륀조자 자신을 떠나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든 탓이다. 정말로 혼자만 남겨지게 되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배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는 아린. 그녀의 배는 살짝 부풀어 있었다. 겉으로 보면 아직까지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손으로 만져 보면 알 수 있는 정도였다. 창공이 그녀에게 남긴 유일한 흔적, 유일한 선물.
그녀를 감싸고 있던 절망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될 거라는 용기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삶의 의지가 되살아나자 다음으로 든 감각은 배고픔이었다. 륀은 없지만 그녀에게 받은 돈은 있었기에, 아린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밥을 먹기로 마음먹었다. 아마 지금쯤 점심 식사를 한창 제공하고 있을 터였다.
여관은 조용했다. 별 볼일 없는 작은 마을의 작은 여관이니 떠들썩한 게 더 이상했다. 여느 때와 같은 적막함. 발걸음을 내딛던 아린은, 그 적막함과 마주하여 순간 우뚝 제자리에 섰다.
"아...?"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평소대로인데, 평소 같지 않은 이 느낌.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평소와는 달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심장 한편을 간질이는 듯한... 기분 좋은 듯한 그런 감정에 가깝다.
액자 속에 담긴, 산을 그린 풍경화가, 정지했던 풍경의, 단지 푸르기만 했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알 수 없는 기대감.
'교수님이 돌아오셨나?'
아마 그건 아닌 것 같다.
어쨌거나 아린은 난간을 잡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시선은 발밑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아이를 가진 뒤로 생긴 습관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자꾸 고개를 들고 싶었다. 고개를 들어 앞을 확인하고 싶었다.
계단이 끝나고, 바닥에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인상착의가... 기억이 나실진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쌍둥이 자매입니다. 한 쪽은 사제고, 다른 한쪽은."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 너무나 그리운 목소리.
꿈속에서 몇 번이고 들었던 목소리. 그렇기에, 꿈 이외의 공간에서 다시는 들을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 목소리.
"오, 오... 빠..."
아린은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차오르는 눈물이 세상을 온통 뿌옇고 흐릿하게 만들었으니까.
"뭐야."
시니컬하고 차가운 목소리.
"생각보다 멀리 못 갔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