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떠돌이들-177화 (177/178)

〈 177화 〉 꿈에서 현실로 (2)

* * *

아린은 정신을 차렸다. 눈앞은 깜깜했다. 실은 눈을 뜨지 않은 탓이었다. 몸 주변에서 느껴지는 따듯하고 포근한 감각. 익숙한. 침대 위에서 이불을 덮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랬다. 또 꿈이었다.

방금 전의 그 깨어남은 그저 꿈이었고, 이번에야말로 진정 깨어난 것이었다.

그리 생각한 아린은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잔혹한 현실은 아름다운 꿈에서 깨어남으로 완성되었다. 일어날 리가 없는 일은 그저 꿈에 불과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절차를 거침으로써.

"오빠..."

아린은 그리움과 슬픔을 한껏 담아 속삭였다. 너무나 깊은, 그렇기에 매일 해도 얕아지지 않는 후회를 담아 다음 한 마디도.

"사랑해요. 언제까지나."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서로 눈을 마주칠 때마다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거였는데. 남들 시선 따위는 개의치 않고, 자기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열렬하게 고백하는 거였는데.

그런 후회를 담은 말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잠 다 잤으면 일어나기나 해."

"...에?"

듣는 사람 감정 따위는 전혀 생각지도 않는 듯한, 단칼에 자르는 듯한 목소리. 잠에 들었을 때도, 깨어났을 때도 간절하게 듣길 바라던 그의 목소리.

하지만 아린은 그저 멍한 기분이었다. 어서 눈을 뜨고 침대에서 일어나, 바로 앞에 있을 창공에게 안기고 싶었지만, 동시에 지금 이것도 꿈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 까닭이었다.

그녀는 두려웠다. 이마저도 꿈일까 봐. 꿈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했지만, 방금 그 기억도 생생한 경험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대로 눈을 감은 채 있고 싶었다. 그러면 창공의 목소리가 더 들려오지 않을까 해서.

"일어나."

도리도리.

슬며시 고개를 젓는 아린. 머리카락이 침대 시트에 비벼지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지만, 입가에는 슬며시 미소가 맺혔다. 정말로 창공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이대로 더, 더 듣고 싶었다.

"어쭈."

갑자기 그녀의 눈꺼풀에 무언가가 와닿더니, 강제로 잡아 들어 올렸다. 본의 아니게 펼쳐진 시야. 흐릿하다. 하지만 동시에 보인다. 탐탁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는 창공의 모습이.

그렇다면 이마저도 꿈이란 말인가?

"하, 하지 마요..."

아린은 반사적으로 창공의 손을 쳐내며 제 얼굴을 가렸다. 이건 분명 꿈이었으니까. 완전히 깨어나는 순간, 창공은 사라지고 다시 자신 혼자만이 남게 되니까. 합리적인 판단이었고, 그녀는 스스로가 만족스러웠다.

문제라면... 왜 갑자기 한없이 부끄러운 기분이 드는 걸까.

"미쳤냐?"

이어지는 창공의 결정타.

"아, 아, 아, 아니거든요!"

벌컥, 소리를 지르며 몸을 일으키는 아린. 동시에 그녀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이렇게 된 이상 꿈에서 깨어버리니까.

하지만 깨어나지 않았다. 아니, 깨어날 수 없었다.

"오... 빠...?"

"..."

창공의 어딘가 묘하게 불만스러운 표정ㅡ아린은 경험을 토대로 저것이 창공의 기본적인 무표정임을 알고 있었다ㅡ이 그녀와 마주하고 있었으니까. 멍한 표정으로 이불자락을 꽉 움켜쥐어도, 제 허벅지를 살짝 꼬집어 봐도 꿈에서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란 말인가?

아니다. 이제는 그것을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비록 이것이 꿈이라 하더라도, 창공과 함께할 수 있다면 깨어나지 않아도 족했으니까.

"내가 지금까지 너랑 몇 번 자 봤는데."

그는 침대 앞에 의자 하나를 가져다 두고 거기에 다리를 꼰 채 앉아있었다. 륀이 으레 앉던 의자였다.

"네가 잠에서 깨어나는데 이런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한지는 몰랐네."

"진짜... 오빠...?"

"내가 없던 동안 내 가짜도 있었냐?"

"그, 그게 아니라..."

아린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를 향한 그리움과 애달픔에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찌르는 통증을 안고 살았는데, 막상 창공과 마주하니... 망치에 머리를 맞은 듯 그저 멍하기만 했다.

사실 이 모든 것이 그저 초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모든 감정과 감각이 배제된 세상에서 창공과 마주한 그런 상황인 것처럼.

그렇게 바라마지않던 순간이 아닌가. 물론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한 번만이라도 이루어진다면, 하고 수천 번을 되뇐 순간이 아닌가.

그럼에도 그랬다.

죽은 사람이 살아돌아온다는 것은 그랬다.

"오빠 맞아요?"

"너랑 나만 아는 거 말해 볼까?"

"...네."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인데."

"무슨 날이요?"

"너 조금 전까지 처녀였던 주제에 자궁 찔러주니까 좋아서 죽으려고 했던 때 있잖아."

"...됐어요. 검증 끝."

정말로 이 창공이 무언가가 변장한 가짜라면, 이렇게 천박한 확인 문구는 날리지도 않을 터. 그는 이런 말을 여자를 안을 때 외에는 하지 않으니까. 역으로, 말해 지금의 창공은 진짜였다.

게다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아린의 최고 성감대를 단번에 말하는 것임에야.

아린은 창공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따스한 갈색 눈동자에 물기가 가득 차오르더니,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새어 나와 뺨을 타고 매끄럽게 흘러내렸다. 하지만 전에 흘렸던 수없이 많은 눈물들이 슬픔을 담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아니었다.

"왜 이제 왔어요... 뭐 하다가..."

"구구절절 말해줄까?"

"네. ...지금은 말고요."

듣고는 싶었지만, 그것보다 더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그냥 창공에게 안기고 싶었다. 그와 몸을 섞으며 이 기쁜 사실을 만끽하고, 실감하고 싶었다. 진정으로 그가 돌아왔다고. 오로지 그것만이 최우선이었고, 다른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빠. 같이 목욕할래요?"

* * *

욕조는 작았다. 작았지만 아린의 몸은 더욱 작았고, 덕분에 어떻게든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갈 공간은 확보할 수 있었다. 비록 아린이 창공에게 가까이 붙어 안기는 모양새를 취해야 하긴 했지만.

"하아아..."

목욕물은 따스했다. 하지만 아린에게는 그보다 창공과 맞닿은, 등에서 한껏 느껴지는 따스함이 더욱 우월했다.

"오빠는 말이죠. 내 인생에서 너무 불쑥 나타나요."

"..."

"처음 학교에서 봤을 때에도, 탄광에서 마주쳤을 때에도... 그리고 오늘도. 그때마다 내 사랑은 더 깊어지고."

"한 번만 더 사라지면 사랑해서 죽으려고 하겠네."

"어떻게 알았어요? 진짜로 그러려고 했는데."

이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창공의 혀는 매끄럽게 돌아가지 못했다.

"그래도 결국 살아있네."

최종적으로는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지만.

"오빠랑 다시 만나려고 그랬나 봐요."

아린은 창공에게 한껏 등을 기대며 소리 없이 웃었다.

"오빠. 다시는 사라지지 마요. 나 열아홉이에요. 열아홉에 오빠 아이를 품었어요. 낳을 거고요. 아이 아빠가 사라지기에는... 너무 빠르잖아요. 백 년은 이르다구요."

"..."

"아직도 변함없어요? 지구에 돌아가면 나랑 결혼 안 할 거라는 거?"

창공은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한 뒤로, 그는 어딘가가 바뀌어 버렸음을 느꼈다.

그것은 미약했고, 그 자신은 아직도 자신이었지만 작은, 미세한 차이가 대답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로스쿨 졸업하면 뭐 하고 싶은데."

"국선번호인이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는. ...알아요. 우스워 보이는 거. 오빠한테는 우습겠죠."

"나보다 내 부모라는 사람들이 더 우습게 여길 텐데."

"...오빠. 이번 기회에 물어볼게요. 도대체 오빠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세요?"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했던가. 창공이 엄청난 돌연변이가 아닌 이상, 그 원인은 분명 부모에게 있다고 아린은 평소 생각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 주제가 나왔을 때 창공이 대놓고 불쾌감을 표하는 것을 보면 그의 가정에는 뭔가 문제가 있긴 있어 보였다.

어쩌면 지금이 그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너 같은 며느리는 반대할 검사 커플."

"두 분이 다 검사... 셨군요. 엄하신가요?"

"알려고 하지 마. 너랑 상관없어."

"왜 상관없죠? 나중에 법정에서 상대로 만나게 될 수도 있는데."

"둘 다 특수부라서 국선하고는 만날 일이 없을 거다."

"아하. 특수부 소속이시구나. 혹시 성함이..."

"그만."

창공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이야기는 꺼내지 마."

"네. 죄송해요."

순순히 사과하는 아린. 적어도 지금은 창공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오늘만큼은. 어차피 나눌 이야기는 많았으니까. 하지만 향후 둘의 사이에 대해선 어느 정도 결론을 내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창공의 손을 잡고 자신의 배로 이끌었다. 살며시 나오기 시작한 아랫배로.

"그래도 이젠 티가 나죠? 무사히 태어나면... 우와. 나 마흔도 되기 전에 하늘이가 대학에 가겠네요."

"..."

"뭐, 오빠랑 날 닮아서 머리는 좋겠죠? 공부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네요. 음... 아무거나 잘 먹고 쑥쑥 커야 하는데. 오빠는 어렸을 때 당근 싫어했어요? 난 당근은 좋아했는데 피망이 조금."

"아린아."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던 말은 창공의 말 한마디에 가로막혔다.

"네, 오빠."

"그렇게 낳고 싶어?"

"몇 번이고 말할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낳을 거예요. 내가 사랑하는 오빠 아기니까. 사랑하는 사람 아이라면 얼마든지 낳을 수 있어요, 난."

"넌 겨우 열아홉이야. 감성에 휘둘리지 마."

"그러는 오빠는 겨우 스물 아닌가요? 피차 어린 건 마찬가지죠. 네, 시작은 서로 실수였죠. 오빠한테도, 나한테도 책임이 있어요. 하지만... 책임에서 달아나려고 하면 안 되죠. 저랑 결혼해 주세요."

"아린아."

"오빠. 이 아이가 그렇게 무서워요? 네?"

아린은 자신의 배 위에 놓인 창공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무섭지 않아요. 오빠와 내 결실이에요. 비록 오빠가... 절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그럼에도. 제가 원하는 건... 하늘이에게 네 아빠가 누구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뿐이에요. 그거면 돼요."

"하."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이란 말이지."

"오빠 아내로서 최선을 다할게요. 나 알잖아요. 오빠 마음에는 안 들지 몰라도... 서로 의견 차이로 많이 다투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배우자가 될 자신 있어요."

"생각해 보자."

"정말요?"

아린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가 아는 창공은 이런 문제에 있어서 '생각해 보자' 같은 애매모호한 결론을 내릴 사람이 아니었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문제는 칼같이 결정을 내리는 게 창공이다. 실제로도 이스트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낙태하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생각해 본다는 말을 했다는 것은, 정말로 그가 고심한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창공의 의견이 전보다 훨씬 전향적으로 바뀌었다는 신호나 진배없었다.

"고마워요, 오빠. 정말 고마워요."

"생각해 본다고만 했지 아직 하겠다고는 안 했어."

"그래도... 고마워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창공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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