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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키스의 악몽 (1/112)

1. 첫 키스의 악몽2021.10.03.

16550871540091.jpg“우리 신혼이잖아.”

시후가 설핏 웃으며 겨울의 자그마한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길쭉한 손가락이 연한 손 틈 사이를 파고들며 끈적하게 뒤엉키자 겨울의 심장이 아래로 쿵 떨어졌다.

16550871540091.jpg“한 침대에서 자야지, 부부인데.”

나직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올린 그가 하얀 손에 입을 맞추었다. 말랑하고 뜨거운 입술의 감촉이 손등으로 느껴지자 놀란 겨울이 숨을 집어삼켰다.

16550871540102.jpg“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더듬더듬 떨리는 입술을 벌려 한마디 뱉었으나, 말끝은 허무하게 뭉개진 채 흐무러지고 말았다. 묵직한 숨과 함께 시후의 입술이 불현듯 밀려온 탓이었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와 함께 점점 더 드리우는 남자의 그림자에 놀란 겨울은 저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질 쳤다. 여린 발뒤꿈치가 바쁘게 바닥을 짚으며 뒤를 향하다가 턱, 하고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등으로 느껴지는 딱딱한 벽의 감촉은 이제 겨울에게 도망칠 곳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16550871540091.jpg“안 그래, 여보?”

그야말로 독에 든 쥐. 가늘게 떨리는 뺨으로 커다란 손이 감기는 촉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디가 굵고 긴 손가락이 마치 피아노라도 연주하듯 살갗 위를 미끄럽게 어루만질 때마다 겨울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16550871540091.jpg“부부는 그래도 돼.”

어둑한 남자의 음성이 길게 늘어지며 겨울의 고막을 뜨겁게 데웠다. 단정한 속눈썹이 가녀리게 떨리며 그녀의 눈이 한계까지 확대되었다. 겨울의 눈동자가 거침없이 뒤흔들렸다.

16550871540102.jpg“하, 하지만…….”

경직된 붉은 입술이 다급하게 달싹거렸다.

16550871540102.jpg“난……. 나는…….”

혼란스러움에 겨울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걸까. 왜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남자와 졸지에 부부가 되어버린 걸까. 대체 어쩌다가 이런 놈과 결혼까지 골인하게 된 건지! 애석하게도 하얗게 바스러진 겨울의 기억 속에는 이 황당한 결혼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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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년 전.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선선한 가을날, 겨울은 오늘도 출근길에 습관처럼 편의점에 들렀다.

16550871540102.jpg“자동으로 오천 원어치 주세요.”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보는 로또 당첨은 팔자에도 없는 가장 노릇만 11년째인 겨울에게도 손에 잡히지 않는 꿈 중 하나였다. 허황한 망상이란 것을 알면서도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오늘도 이렇게 로또를 구매해 주머니에 우악스럽게 밀어 넣었다. 딸랑, 투명한 유리문을 밀자 편의점 종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그 소리에 맞춰 핸드백 체인을 고쳐맨 겨울은 서둘러 출근하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16550871540102.jpg“아, 오늘 날씨 좋네.”

청량한 가을의 바람이 살갗 위를 부드럽게 감싸자 입꼬리가 절로 상승했다. 평소보다 훨씬 높고 푸른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오픈 시간에 맞춰 예약한 손님이 있었던 것을 깨닫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걸음을 재촉하는데, 뒤에서 낮은 저음이 겨울의 발목을 잡았다.

16550871569251.jpg“잠깐.”

움찔한 겨울이 슬쩍 고개를 뒤로 돌리자 검은색 버킷햇을 푹 눌러 쓴 채, 선글라스와 까만 마스크까지 동원하여 얼굴을 완전히 가린 남자가 서 있었다. ……뭐지? 소름 끼치는 행색의 남자를 불안하게 올려다보자 그가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16550871569251.jpg“동생 단속 좀 하지 그래.”

……동생? 갑자기 웬 동생? 하나뿐인 남동생 이경을 떠올린 겨울의 눈가가 일순 좁아졌다.

16550871569251.jpg“조만간 사고 한번 칠 텐데.”

……미친 사람인가? 기괴하게 변조된 목소리가 고막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그것도 인파로 북적이는 아침 출근길에 소란을 일으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그저 미친 사람의 헛소리로 치부한 겨울은 괴한을 재빨리 무시하고 지하철 역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겨울이 근무하는 곳은 프랑스의 프리미엄 스파 브랜드가 국내에 최초로 오픈한 매장인 클레르 스파 청담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 후 곧바로 피부 관리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아로마 테라피스트로 일한 지 어느덧 9년째인 겨울은 자타공인 뛰어난 실력으로 고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오늘도 오픈부터 마감까지 예약이 한가득 차 있었으니, 바쁘게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다.

16550871540102.jpg“족욕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겨울에게 한번 테라피를 받은 고객은 다음에도 무조건 겨울을 지명하게 되어 있었다. 그 비결은 그녀의 실력에도 있겠지만, 꼼꼼한 배려와 입담도 한몫했다.

16550871540102.jpg“온도 괜찮으실까요?”

16550871569251.jpg“응, 딱 좋아요.”

겨울은 VIP 고객인 50대 여성의 발을 성심성의껏 마사지하며 예쁘게 미소 지었다.

16550871540102.jpg“저번에 운동하시다가 오른쪽 발목 다치셨다고 하셨잖아요. 지금은 좀 어떠세요?”

16550871569251.jpg“하하, 그걸 기억하고 있어요?”

16550871540102.jpg“그럼요. 고객님께서 말씀해주시는 부분들은 전부 기억하고 있습니다.”

배려에 감동한 듯 웃는 고객을 보며 겨울은 싹싹하게 덧붙였다.

16550871540102.jpg“오늘도 압 가했을 때 불편한 부분 있으시면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무작위로 매칭되는 것이 아닌, 고객이 직접 테라피스트를 지명할 때는 그에 따른 인센티브가 있었기 때문에 겨울은 제게 한번 테라피를 받은 고객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16550871540102.jpg“이제 오일 초이스 하시고, 이어서 관리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떤 향으로 하시겠어요?”

16550871569251.jpg“음…… 글쎄. 추천 좀 해 줄래요?”

16550871540102.jpg“네. 그러면 이 향은 어떠세요?”

겨울의 추천에 시향을 한 여성이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16550871540102.jpg“시트로넬라라는 향인데, 달콤한 레몬 향이 나죠?”

16550871569251.jpg“그러네요. 좋아, 마음에 드네.”

16550871540102.jpg“이 향은 마음을 고양시켜서, 기분 전환에 아주 효과적인 향이에요. 두통, 편두통, 신경통 등 통증에도 도움을 주는 향인데, 오늘은 고객님께서 두통이 있으신가 해서 이 향으로 준비해드릴게요.”

16550871569251.jpg“어머, 내가 두통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

놀란 여성이 제 입을 가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16550871540102.jpg“족욕 도와드리는 동안 머리 쪽을 자주 짚으셔서요. 그렇지 않을까 했습니다.”

여성은 겨울의 세심함에 감탄하며 가운을 벗고 마사지 베드에 엎드려 누웠다.

16550871569251.jpg“자기는 진짜 귀신이야. 내가 이래서 겨울 씨만 찾잖아요.”

겨울은 따뜻한 수건에 손을 묻으며 나긋하게 속삭였다.

16550871540102.jpg“영광입니다. 오늘도 최선을 다해 관리 도와드릴게요.”

아침부터 세 명의 고객을 줄줄이 받은 겨울은 대충 샐러드로 점심을 때운 뒤 직원 대기실에서 커피를 들이켰다. 겨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료 테라피스트인 민희수는 대기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기지개를 켜며 입이 찢어지도록 하품했다.

16550871626086.jpg“아.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온종일 갇혀서 살색의 향연이나 봐야 한다니. 너무 암울하다.”

16550871626091.jpg“누가 아니래요? 진짜 평일엔 광합성을 못 한다니까요?”

희수의 투정에 2년 차 경력의 후배 테라피스트인 김우정이 격하게 공감하며 대꾸했다.

16550871626086.jpg“근데 겨울이 넌 안 힘들어? 매일 그렇게 오버타임으로 예약받고?”

16550871540102.jpg“젊어서 일해야지, 늙어서 고생하니.”

16550871626091.jpg“으. 언니 진짜 독해요, 독해.”

누가 클레르 대표 일벌레 아니랄까 봐, 희수와 우정은 동시에 몸서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음 예약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겨울은 휴대전화를 캐비닛 안에 넣으려다가 멈칫했다. 저장되지 않은 낯선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탓이었다.

16550871540102.jpg“여보세요?”

무성의하게 전화를 받은 겨울은 이내 심장이 떨어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16550871540102.jpg“네? 교통사고요?”

예기치 못한 소식에 하얀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질렸다. *** 청천벽력 같은 전화는 바로 겨울의 하나뿐인 남동생이 교통사고를 냈다는 소식이었다. 놀라 병원으로 달려간 겨울에게 들이닥친 것은 목에 깁스를 하고 응급실 베드에 누워 있는 동생 이경이었다.

16550871540102.jpg“이경아!”

16550871626121.jpg“누나…….”

이경의 눈가가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엄마나 다름없는 겨울의 얼굴을 보자마자 울컥 감정이 터진 그는 어린애처럼 울먹거렸다.

16550871626121.jpg“미안해, 누나……. 내가 이번 학기엔 꼭 장학금 받으려고, 어제 밤새워서 공부했는데…….

16550871540102.jpg“울지 말고 천천히 얘기해봐. 무슨 일이야, 대체!”

16550871626121.jpg“그, 그게……. 내가 깜빡 졸아서…….”

사정을 들어보니 대학 입학 선물로 겨울이 이경에게 사줬던 고물 같은 중고차를 끌고 택배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졸음운전으로 사고를 냈다는 것이었다.

16550871626121.jpg“내가 이번 학기 꼭 장학금 받아야 하니까, 미리 공부 좀 열심히 해두려고 했는데……. 진짜 미안해, 누나…….”

군대를 다녀온 뒤부터 부쩍 철이 들어 자기 생활비라도 벌어보겠다고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들었던 이경인데, 장학금을 받기 위해 전날 밤새워서 공부하다가 졸음운전을 했다고 울며 말하는 남동생에게 겨울은 차마 싫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16550871540102.jpg“아니야……. 크게 안 다쳤으니까 괜찮아.”

허무하게 떠나버린 아버지에 이어 하나뿐인 동생마저 잃는 줄 알고 달려오는 동안 얼마나 가슴이 떨렸는지 모른다. 이경이 졸음운전을 했던, 어떤 차를 박았던, 그저 무사히 살아 있어 줘서 감사할 뿐이었다.

16550871626121.jpg“근데 누나…… 있잖아.”

16550871540102.jpg“응?”

16550871626121.jpg“내가, 내가 박은 차가…….”

뒤이은 이경의 웅얼거림을 들은 겨울의 표정이 공허해졌다.

16550871540102.jpg“뭐?”

……포, 뭐?

16550871540102.jpg“포르쉐?”

그 억 소리 나는 외제 차? 순간 제 귀를 의심한 겨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6550871626121.jpg“게다가 보험사에 전화해봤는데 이게 내 차로 일하다가 사고 낸 거라, 보험 처리가 안 된다고…….”

16550871540102.jpg“…….”

16550871626121.jpg“그리고 신호대기 중인 차를 뒤에서 들이박은 거라, 아마 내 과실이 더 많이 나올 것 같아…….”

……이런 미친. 정신을 얻다 두고 다니는 거야!!! 단정하던 동공이 거칠게 뒤흔들렸다. 자차로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다 사고를 낸 탓에 보험 처리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얌전히 신호대기 중인 슈퍼카를 뒤에서 들이박았다면 이경의 과실 100퍼센트가 틀림없었다.

16550871540102.jpg“하…….”

눈앞이 하얗게 질린 겨울은 허망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겨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경은 한 술 더 보태며 울먹였다.

16550871626121.jpg“수리비가…… 못해도 몇천만 원은 나올 것 같다던데…….”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인 말에 겨울의 안색은 점점 더 흙빛으로 굳어갔다. ……뭐? 몇천만 원? 당장 오백만 원도 없는 상황에 수천만 원이 있을 리 없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빚을 갚는데도 수년이 걸렸는데, 이렇게 또 빚이 생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겨울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온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한 느낌이었다.

16550871540102.jpg“……일단, 그 포르쉐 차주분은 어디 계셔? 많이 다치셨어?”

16550871626121.jpg“아니. 그분은 안 다치셨다고 하는데…… 지금 밖에 있어. 남색 슈트 입으신 키 큰 남자…….”

피해자 차주가 안 다친 걸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작게 한숨 지은 겨울이 이경의 어깨에 손을 올려 다독였다.

16550871540102.jpg“알겠으니까 여기서 기다려. 내가 만나보고 올게.”

수리비를 변제하는 것은 둘째치고 일단 차주에게 납작 엎드려 사과하는 것이 급선무일 터였다. 다급하게 반원을 그리며 뒤를 돈 겨울은 응급실 문을 향해 비장하게 걸어갔다. 무거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릴 적 기억과 더불어 좋지 않은 상념이 부유했다. 17살 때 집안이 망한 뒤 온갖 궂은 아르바이트를 다 하며 돌아가신 아버지의 빚을 갚고 엄마의 치료비를 혼자 감당했었다. 저보다 5살 어린 동생은 당시 겨우 초등학생이었기에, 그보다 조금 많은 열일곱이란 나이에 집안의 가장이 된 겨울은 카페, 서점, 식당 서빙, 불판 닦기……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 그뿐인가? 성인이 돼서도 엄마와 남동생, 세 가족이 함께 살 집을 구하기 위해 또 대출을 받았고, 일한 지 9년 차인 지금까지도 그 대출을 다 갚지 못했다.

16550871540102.jpg“하…….”

눈앞이 핑글 돌며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돈을 벌지 못하는 대학생 이경이 수천만 원의 수리비를 물어줄 수 있을 리 만무했고, 얼마 전 거액의 빚을 내서 카페를 차린 엄마도 더 이상의 대출은 어려웠다. 결국 또 겨울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순간 울컥 울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눌러 참고 응급실 밖으로 나가 복도를 따라 걸었다. 그때, 어둑한 목소리가 겨울의 머리 위로 자욱하게 쏟아졌다.

16550871540091.jpg“오랜만이다. 함겨울.”

흠칫 놀라 바닥에 꽂힌 시선을 들어 올리자 서늘한 계절과 대응되는 차가운 얼굴이 시야에 들어찼다. 철렁 내려앉은 심장과 함께 놀란 겨울의 입술이 툭 작게 벌어졌다. 새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비치는 길게 찢어진 날카로운 눈매가 매섭게 겨울의 숨을 옥죄어왔다.

16550871540102.jpg“……강시후?”

조물주가 성심껏 조각해놓은 듯한 콧대와 일자로 굳게 다물린 입술은 화살처럼 날아와 겨울의 심장에 박혔다. 무려 10년을 넘게 잊고 살았던, 아니, 필사적으로 잊으려고 노력했지만, 결코 잊지 못했던…….

16550871540091.jpg“찾을 땐 안 보이더니…….”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남자, 강시후.

16550871540091.jpg“이렇게 만나게 됐네.”

……날 찾았다고? 왜?

16550871540102.jpg“여긴 무슨 일로…….”

16550871540091.jpg“미팅 끝나고 회사로 돌아가는데, 웬 정신 나간 차가 신호대기 중에 뒤에서 나를 박더라고.”

16550871540102.jpg“…….”

16550871540091.jpg“걔 네 동생이지?”

일순 차갑게 비틀린 남자의 입술이 매끄럽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16550871540091.jpg“날 못 알아보는 것 같던데.”

16550871540102.jpg“…….”

16550871540091.jpg“하긴, 해봐야 초등학생 때였을 테니.”

처참한 기분이 된 겨울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런 겨울의 상황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시후는 조소하며 비아냥거렸다.

16550871540091.jpg“그나저나…… 너희 가족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구나.”

가늘어진 남자의 눈매가 싸늘하게 꽂혔다.

16550871540091.jpg“그리고 너도.”

그 말에 발끈한 겨울의 입술이 표독스럽게 움직였다.

16550871540102.jpg“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16550871540091.jpg“안 어울리게 웬 존댓말?”

시후가 설핏 웃음을 터뜨렸다.

16550871540102.jpg“수리비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16550871540091.jpg“갚을 게 수리비만은 아니지 않나?”

뻗어진 길쭉한 손이 부릅뜬 겨울의 눈가 옆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움찔한 겨울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16550871540091.jpg“너, 내 돈 떼먹고 도망갔잖아.”

그 한마디에 겨울의 머릿속이 어지러이 더럽혀졌다. 허탈하게 뱉어진 숨과 함께 심장 깊은 곳이 욱신거렸다. 비릿한 웃음이 걸린 남자의 입술을 보자 잊고 싶었던 11년 전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던 날……. 소나기로 인해 축축하게 젖은 하얀 교복 셔츠 안으로 비치는 근육. 비스듬히 쏟아지는 그의 뜨거운 시선…….

16550871540091.jpg‘나도 좋아해, 겨울.’

아직은 소년이었기에 티끌 하나 없이 맑았던 11년 전 남자의 저음이 귓가에 다시금 울리는 것 같았다.

16550871540091.jpg‘난 겨울이 좋아.’

예고 없이 고막을 적셔왔던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평생 잊을 수 없었던 장면. 씩 올라가는 입꼬리를 멍하니 바라보자 입술에 따스한 무언가가 닿았었다. 물기에 젖어 촉촉하고도 부드러웠던 입술의 촉감. 부드럽게 뺨을 감싸는 커다랗고 차가운 손의 느낌……. 평생 단 한순간도 잊어본 적 없었던, 잊고 싶었지만 잊지 못했던 첫 키스의 한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멍하니 시후를 올려다보던 겨울은 흠칫 고개를 내젓고 주춤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한 발짝도 채 가지 못하고 바보처럼 멈출 수밖에 없었다. 허리로 무언가 단단한 것이 감겨 끌어당겨진 탓이었다.

16550871540091.jpg“잘 숨어 있지 그랬어.”

잘록한 허리를 받친 단단한 팔이 여린 몸을 확 끌어당겼다. 어른스러운 향수와 체취가 어우러져 강하게 코끝을 어른거렸다.

16550871540091.jpg“날 우습게 보니까, 내가 이렇게 찾아내잖아.”

깔끔한 네이비색 슈트가 소름 끼치도록 잘 어울리는 남자. 칠흑처럼 어두워진 목소리의 온도가 겨울을 한순간에 긴장시켰다.

16550871540091.jpg“네가 졌어, 함겨울.”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새까만 눈동자를 피하지 않기 위해 한껏 꺾인 고개가 뻐근했다. 11년 전, 열아홉 살의 소년은 어느덧 완연한 어른이 되어 다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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