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좋아한다고 하면, 믿을래?2021.10.06.
“……원하는 게 뭐야?”
차갑게 말한 겨울이 시후를 밀치며 쏘아보았다. 픽 웃음을 터뜨린 그는 한가롭게 손가락 끝에 걸린 차 키를 빙빙 돌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갚아.”
어둑한 음성이 겨울의 솜털을 차갑게 적셨다.
“없으면 몸으로라도 갚아야지.”
겨울의 눈동자가 뒤흔들렸다. 낮은 목소리가 병원 복도에 울려 퍼지자 겨울의 가슴에 고인 응어리가 일시에 터져 나왔다.
“하.”
기가 찼다. 울컥한 겨울의 눈가가 발갛게 부어오르며 과거의 비참했던 기억이 스멀스멀 매연처럼 피어올랐다.
‘꼴같잖은 자존심 세우는 게 특기인가? 주제 파악 좀 하지.’
10년 전, 겨울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갈기갈기 찢었던 강시후의 표독스러운 말이 다시금 상기되며 가슴 속 깊은 상처를 건드렸다.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강시후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다니. 하지만 더 이상 겨울은 10년 전 열여덟의 소녀가 아닌 스물여덟의 어엿한 성인이었다. 예전처럼 바보같이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라 속으로 다짐하며 고개를 빳빳하게 들어 올렸다.
“차 수리비는 물론, 10년 전 받았던 1,000만 원까지 전부 갚을 거니까 괜한 걱정 하지 마시죠.”
그 말에 냉소적으로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린 시후는 성큼 겨울에게 다가섰다. 움찔한 겨울이 속눈썹을 떨자 시후의 입술이 느긋하게 아래로 내려왔다.
“그래…….”
귓가에서 시후의 입술이 올라서는 것이 생생히 느껴지자 겨울은 심장이 저릿했다.
“수리비 견적이 나오면 연락하도록 하지.”
낮게 속삭인 시후의 시선이 무례하게 움직였다. 남자의 검은 눈이 겨울을 뚫어버릴 것처럼 진하게 더듬어 내려갔다. 긴장한 겨울이 꿀꺽 침을 삼키자 재킷 주머니 안으로 묵직한 남자의 손이 불쑥 침입했다. 여린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그때까지 기다려.”
간결한 한마디를 남긴 시후는 조금의 미련도 남지 않은 사람처럼 뒤를 돌아 병원 밖으로 나섰다.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린 겨울이 미끄러지듯 복도의 의자에 주저앉았다. 더듬더듬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어 그가 안에 넣은 물건을 확인하기 위해 꺼내 보았다.
“아.”
일순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따끔한 고통에 눈가를 구겼다. 그가 주머니 안에 넣어 두고 간 것은 하얗고 네모난 명함이었다. 예리하게 재단된 종이 끝에 베인 검지에서 빨간 핏방울이 송골 맺혔다. 본능적으로 피가 나는 손가락을 입술 사이에 끼워 무니, 마치 이 상처는 강시후가 제게 날린 경고처럼 느껴졌다. 불길함에 섬뜩해진 가슴을 부여잡고 그의 명함을 망연하게 내려다보았다. [넥스트 게임즈, CEO 강시후] 새하얀 종이 위에 금박으로 뚜렷하게 적힌 강시후 세 글자가 겨울의 심장을 잡고 뒤흔들었다. 느껴지는 묘한 압박감에 꽉 움켜쥐자 종이가 형편없이 어그러졌다. 구겨진 명함을 주머니에 욱여넣은 겨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세상에서 제일 만나고 싶지 않았던 남자와의 재회. 무려 10년 만이었다.
*** 경추에 손상이 간 이경은 곧바로 일반 병실에 입원했고, 카페 정리를 마친 어머니 혜숙은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왔다. 뒷일을 혜숙에게 맡긴 겨울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물에 샤워를 마쳤다. 물기를 닦을 힘조차 없어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몸에 하얀 가운만 대충 걸치고 나온 겨울은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침대 옆 협탁 위에 있는 공처럼 구겨진 시후의 명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겨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구겨진 명함을 반듯하게 펴자 그의 이름 석 자와 11자리의 각기 다른 숫자가 빼곡히 시야를 메웠다.
“돈……. 그놈의 돈.”
수리비에 10년 전 받았던 1,000만 원까지 전부 갚겠다고 큰소리 뻥뻥 치긴 했으나, 실상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월세, 관리비, 보험료, 식비, 이경의 학비…… 들어갈 돈은 많았고 연봉은 쥐꼬리였으니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하, 짜증 나.”
날이 선 손동작으로 명함을 협탁에 던진 겨울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노트북을 펼치고 앉았다. 언제까지 멍청하게 누워 있을 수만은 없는 법. 적을 알면 나를 안다고, 그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 인터넷에 강시후의 이름을 검색했다. 제일 처음으로 뜨는 것은 ‘연 매출 2,500억 원대 게임회사의 30세 대표의 비결’이라는 헤드라인의 뉴스 기사였다. 클릭하자 전 직원 연봉을 업계 최상으로 올려줬다는 내용부터 사비로 다양한 복지 기관에 거액을 기부했다는 내용, KU그룹의 하나뿐인 장남이면서도 집안의 힘을 빌리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자수성가했다는 둥 그에 대한 온갖 찬사가 이어졌다.
“미친……. 팔로워 수가.”
게시글도 별로 없는 SNS의 팔로워 수는 무려 10만 명이었다. 그는 온라인에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자랑하는 셀럽이었고, 자수성가한 재벌 2세라는 독특한 타이틀로 남들과는 다른 차별점을 자랑하고 있었다. 심지어 팬층도 꽤 두터워 보였는데, 근래 잘 나가는 게임회사인 넥스트게임즈의 젊고 잘생긴 CEO로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제 처지와 비교되는 그의 상황에 겨울의 비참함과 박탈감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강시후…….”
지금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릴 만큼 끔찍하게 싫어하는 남자지만, 한때는 손만 닿아도 가슴에 대형화재가 났던 남자였다. 인생의 단 하나뿐인 첫 키스의 상대…….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본 처참한 치욕의 상대. 원래부터 그와 이렇게 철천지원수 사이였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로 한때는 가족보다도 더 친밀하고 애틋한 사이였다. 입술을 꾹 일자로 다문 겨울은 오래전 시후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을 회상했다. ***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12살이었던 겨울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그들의 지인이었던 KU그룹의 강성호 회장 내외와의 식사 자리에 참석했었다. 그곳에서 겨울은 당시 14살이었던 그들의 장남인 시후를 처음으로 만났었다.
“혹시 삼촌 있어?”
이유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처음 시후를 본 겨울이 그에게 건넨 말은 단 한마디였다.
“왠지 어디서 본 것 같단 말이지…….”
묘하게 낯이 익어 건넨 말에 시후는 황당해할 뿐이었다. 이렇듯 첫 만남은 조금 엉뚱했지만 두 사람은 꽤 죽이 잘 맞았다. 비록 시후의 아버지와 겨울의 아버지는 뷰티 업계 1, 2위를 다투는 라이벌이었으나, 오랜 친구 사이기도 했기에 서로 왕래가 잦았고 집도 가까워 친해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겨울아. 농구하러 가자.”
“응, 좋아!”
시후는 심심할 때면 겨울의 집 앞으로 찾아와 운동하러 가자고 했고,
“시후 오빠! 나랑 수영장 갈래?”
“그래, 가자.”
겨울도 평일 주말 구분 없이 시후의 집에 제집처럼 드나들며 그와 어울렸다. 두 사람 모두 운동을 좋아하고 승부욕이 강해 같이 농구도 하고 배드민턴도 하고 수영장도 가며, 한때는 나이, 성별을 떠나 그야말로 소꿉친구, 아니, 불X 친구 같은 영혼의 단짝이었다. 같은 중학교에 다니면서 더욱 친해졌고, 그렇게 5년을 막역하게 지내면서 마치 친남매처럼 편안한 사이가 되었다. 그랬던 두 사람의 사이가 달라진 것은……. 겨울이 시후가 다니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졌던 그날 일 때문이었다. 학교가 끝난 뒤 집 근처 테니스 코트에서 함께 내기 경기를 하던 도중, 돌연 소나기가 쏟아졌었다. 우산도 없이 갑작스럽게 한바탕 퍼부었던 비에 쫄딱 젖은 겨울과 시후는 근처 건물로 함께 피신했다.
“비 엄청 많이 온다. 그렇지?”
“응. 그칠 기미가 없네.”
낮게 대답한 시후가 팔을 뻗어 겨울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겼다.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에 겨울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렜었다. 단순히 친오빠처럼 막역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시후가 종종 이렇게 불현듯 남자로 느껴질 때 겨울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괜히 어색함에 테니스 라켓을 꼭 움켜쥐고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손이 겨울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머리 다 젖었네. 춥겠다.”
“어? 음……. 아냐, 괜찮아.”
축축하게 젖은 하얀 교복 셔츠 안으로 비치는 시후의 탄탄한 근육이 시선을 사로잡자 겨울의 볼이 분홍빛으로 달아올랐다. 당황한 겨울은 아무 말이라도 하기 위해 일단 입술을 움직였다.
“그…… 여름은 이래서 싫다니까. 갑자기 비가 막 오질 않나.”
“그럼 넌 어느 계절이 제일 좋은데?”
“음, 나는 겨울?”
봄도 가을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겨울은 자신의 이름이자 태어난 계절인 겨울을 가장 좋아했다.
“눈이 와서 좋아. 크리스마스도 있고, 연말도 있고, 새해도 있고.”
작게 웃으며 시후에게로 고개를 돌린 순간 흠칫한 겨울이 숨을 훅 들이켰다. 생각보다 시후의 얼굴이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던 탓이었다.
“겨울…….”
단정한 입꼬리가 곱게 말렸다.
“나도 좋아해, 겨울.”
아직은 소년이었기에 티끌 하나 없이 맑았던 남자의 저음이 귓가에 달콤하게 맴돌았다.
“난 겨울이 좋아.”
뜨거운 시선이 겨울의 눈을 타고 콧대를 지나 도톰한 입술에 도달했다. 씩 부드럽게 올라가는 입술 끝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일순 입술에 따뜻하고 말랑한 것이 닿았었다. 심장이 뚝 떨어진 겨울의 눈이 커다랗게 뜨여졌다. 물기에 젖어 촉촉하고도 부드러웠던 시후의 입술이 겨울의 입술을 부드럽게 물었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가슴이 터질 것처럼 박동하고 놀란 겨울의 입술은 툭 벌어졌다. 아랫입술부터 윗입술로 느릿하게 옮겨지는 시후의 움직임에 겨울은 떠밀리듯 파르르 떨리는 두 눈을 감았다. 비단결처럼 부드럽고 결이 좋은 감촉이 겨울의 심장을 나긋하게 쓸어내렸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가늘게 떨리는 손끝으로 시후의 가슴을 더듬거리다가 하얀 셔츠를 꼭 쥐었다.
“겨울아…….”
슬며시 떨어진 입술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가파르게 숨을 몰아쉰 겨울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부드럽게 뺨을 감싸는 커다랗고 차가운 손의 느낌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좋아한다고 하면, 믿을래?”
17살의 무더운 여름. 잊지 못할 첫 키스의 순간이었다. *** 주말의 시작을 알리는 토요일 아침, 이른 시각부터 한강 변을 따라 조깅하던 시후는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하.”
귓가에 꽂힌 블루투스 이어폰을 아무렇게나 뽑은 시후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옆에 놓인 벤치에 털썩 앉았다. 지난 월요일에 겨울을 만난 이후 툭하면 상념에 잠겨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야단이었다.
“…….”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과거의 기억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른 탓이었다. 문득 핸드폰을 꺼낸 그가 매끄러운 화면 위에 떠 있는 겨울의 전화번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드디어 만났네, 함겨울.”
단 한 번도 잊어 본 적 없는 그녀의, 그토록 애타게 찾고 또 찾았던 연락처.
“찾을 땐 그림자도 안 보이더니.”
엄지손가락으로 차가운 액정 위 숫자들을 문지르며 낮게 읊조렸다. 건조했던 시선이 일순 뜨거워지며 일련의 숫자들을 탐닉하듯 움직였다.
“다시 내 눈에 띄었으니…….”
혀를 굴리며 씹듯이 뱉었다.
“이젠 절대 안 놔줘.”
가늘어진 눈매가 그윽하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