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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랑했던 걸까? (5/112)

5. 사랑했던 걸까?2021.10.17.

16550872436442.jpg“역행성 기억 상실증입니다.”

차트를 보던 의사는 다소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혜숙의 울음 같은 탄식 소리가 봇물 터지듯 흘렀다.

16550872436448.jpg‘……기억 상실증?’

내가, 기억을 잃었다고? 의사의 담담한 발언은 둔기가 되어 겨울의 머리를 세게 가격했다.

16550872436442.jpg“뇌에 가해진 충격의 여파로 근 1년간의 기억이 손실된 것으로 보입니다.”

모니터를 한가득 메운 자신의 뇌 MRI 촬영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던 겨울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16550872436448.jpg“…….”

기억 상실증이라니, 막장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심지어 기억을 전부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강시후의 집에 갔던 날로부터 정확히 1년만 자른 듯 기억이 도려져 나갔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강시후가 차에 치이는 줄 알았던 기억 속 마지막 날에는 사실 아무도 치이지 않았다고 한다. 사고는 그로부터 1년이 지난 뒤, 즉 이틀 전인 2022년 10월 12일 겨울에게 일어났던 것이었다.

16550872436442.jpg“일시적인 현상일 가능성이 크니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의사의 형식적인 위로를 불행 중 다행이라고 여기기에는 겨울이 받은 충격이 너무도 컸다. 공허해진 눈동자가 하릴없이 배회하는 것을 지켜보던 시후가 작게 한숨 지으며 의사에게 물었다.

16550872436466.jpg“기억은 언제 돌아오는 겁니까?”

16550872436442.jpg“글쎄요. 역행성 기억 상실증의 경우 일반적으로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가장 먼 기억부터 돌아오게 됩니다. 모든 기억이 일시에 회복이 되는 예도 있지만, 그건 드문 경우이고, 아마 예전 기억부터 서서히 떠올리실 수 있을 겁니다.”

16550872436476.jpg“선생님. 우리 딸, 머리 외에는 다른 문제 없나요?”

하나뿐인 딸의 걱정으로 이틀 새 밥 한술 넘기지 못했던 혜숙의 눈가는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듯 촉촉이 젖어 있었다. 야윈 손으로 눈물을 훔친 혜숙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묻자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16550872436442.jpg“예. 검사 결과 별다른 이상 없었습니다. 다행히 손실된 기억의 범위도 넓지 않으니 일상생활 복귀에도 무리 없으실 것 같습니다.”

16550872436476.jpg“아이고 세상에……. 선생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혜숙이 겨울의 하얀 손을 꼬옥 잡고 같은 말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하지만 겨울은 혜숙의 말도, 의사의 말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도저히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탓이었다. 차라리 누군가 꿈을 꾸는 것이라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16550872436442.jpg“일단 시간을 두고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내 기억 속에서, 근 1년이 사라지고 말았다.

16550872436466.jpg“괜찮아, 여보. 조만간 기억 돌아올 거야.”

떨리는 어깨를 부드럽게 감싼 시후가 다정하게 그녀를 다독였다. 넋을 놓은 겨울은 텅 빈 눈동자로 시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16550872436448.jpg“……하.”

작은 입술이 툭 벌어졌다.

16550872436448.jpg“아니야.”

겨울은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내저었다.

16550872436448.jpg“아니야! 그럴 리 없다고!”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른 겨울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 복도를 내질렀다. 뒤에서 혜숙과 시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멈추지 않고 무작정 다리를 움직였다. 화장실로 뛰어들어 곧장 세면대에 두 손바닥을 짚고 선 겨울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끝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든 그녀는 거울 속에 비친 저 자신과 문득 눈이 마주쳤다.

16550872436448.jpg“…….”

충격에 물든 갈색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흑갈색 머리카락은 등허리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고, 팔다리는 1년 전보다 조금 더 야위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기억이 없는 동안 라식 수술을 받았던 건지 안경이나 렌즈 없이도 세상이 잘 보였다.

16550872436448.jpg“하…….”

울컥한 겨울은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도, 스물여덟이었던 내가 서른을 코앞에 두었다는 사실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강시후와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 가장 믿어지지 않았다. 대체 기억을 잃은 지난 1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꼴도 보기 싫은 원수가 남편이 되어버린 건지.

16550872436448.jpg“함겨울,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대체 과거의 나, 무슨 심산이었던 건가. 왜 그토록 싫어하고 증오하던 강시후와 결혼을 한 거냐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겨울은 절규하며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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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참이 지나서야 병실로 돌아온 겨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창밖만 응시했다. 혜숙과 시후, 이경은 그런 겨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걸었으나, 겨울은 그 어떤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혼자 있고 싶다는 겨울의 말에 세 사람은 병실을 나와 휴게실로 향했다.

16550872436476.jpg“겨울이가 잠깐 혼란스러워서 그럴 거야.”

혜숙은 시후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그를 위로했다.

16550872436476.jpg“시후 너와 결혼했다는 것도 당황스러울 거고. 그래도 곧 기억해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16550872436466.jpg“……네. 장모님.”

16550872436476.jpg“오늘은 이만 집에 들어가 보지 그래? 어젯밤에도 계속 여기서 자리 지켰었잖아.”

16550872463529.jpg“맞아요, 매형. 들어가서 쉬세요.”

혜숙의 말에 이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16550872436466.jpg“아닙니다. 오늘에서야 겨우 의식 찾았는데, 제가 겨울이 옆에 있는 게 맞습니다.”

16550872436476.jpg“요 며칠 동안 밖에 한 번도 안 나갔으면서? 오늘 밤은 내가 지킬 테니까 집에 가서 푹 쉬고, 식사도 제대로 하고 와.”

16550872436466.jpg“정말 괜찮습니다. 그래도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완강한 시후의 태도에 혜숙은 결국 두손 두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16550872436476.jpg“그래……. 강서방 고집 누가 꺾겠어.”

혜숙이 흐리게 미소 지으며 시후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16550872436476.jpg“그럼 오늘도 우리 딸 잘 부탁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16550872436466.jpg“네, 장모님. 걱정하지 마세요.”

이경과 혜숙이 병원을 떠나고, 홀로 휴게실에 남은 시후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지그시 눈을 감자 겨울이 눈앞에서 사고를 당하던 모습이 다시금 생생하게 그려졌다. 연약한 몸이 튕겨 나가 보도블록에 머리를 부딪히는 그 장면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새하얀 응급실 베드에 눕혀져 숨 가쁘게 실려 가던 그 순간까지. 한순간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줄 알았었다. 평생에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16550872436466.jpg“……하.”

고개를 뒤로 젖힌 시후가 진한 숨을 흘렸다. 큰 외상이 없어서 천만다행이었지만, 1년간의 기억을 잃었다니……. 편두로 저릿한 감각이 몰려오며 머리가 깨질 것처럼 지끈거렸다. 시후는 길쭉한 손가락으로 관자놀이 근처를 지압하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이내 서늘한 얼굴이 더욱 차갑게 굳고, 커다란 손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어떤 결심을 한 듯 시후의 얼굴에는 결연한 빛이 감돌았다. ***

16550872436448.jpg“대체 우리가 왜 결혼한 건데?”

한참 동안 넋 놓은 인형처럼 병실에 앉아 침묵을 유지하던 겨울이 처음으로 시후에게 건넨 질문이었다.

16550872436448.jpg“너 같은 인간하고 내가 결혼을 할 리가 없잖아!”

11년 전, 과거의 끔찍했던 기억을 떠올리자 울컥한 겨울은 따지듯이 물었다.

16550872436466.jpg“말이 좀 서운하네. 그래도 남편인데.”

16550872436448.jpg“그러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대체 왜…….”

16550872436466.jpg“……담당의가 내일 퇴원해도 된다고 하더라고.”

16550872436448.jpg“동문서답하지 마. 우리가 왜 결혼했냐고 물었어!”

비명처럼 소리치자 사방의 공기가 한차례 진동했다. 감정이 한껏 고조된 겨울과 달리 시후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차분했다.

16550872436466.jpg“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

나직한 음성이 병실 안을 공명하듯 울렸다.

16550872436466.jpg“우리는 서로 사랑했으니까.”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겨울의 눈이 한계까지 뜨여졌다.

16550872436448.jpg“……뭐?”

……사랑? 우리가 서로 사랑을 했다고?

16550872436448.jpg“하.”

기가 찼다. 어이가 없어 말이 채 나오지 않아 입만 벙긋거렸다.

16550872436466.jpg“작년에 다시 만난 후로 다른 평범한 연인들처럼 썸 탔고, 연애했고, 곧바로 결혼에 골인했어.”

……거짓말. 고개를 좌우로 젓는 겨울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16550872436448.jpg“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거짓말하지 마.”

시후가 헛숨을 터뜨렸다. 곧장 재킷 안으로 매끄럽게 손을 집어넣어 지갑을 꺼낸 그가 단정하게 꽂혀 있는 사진의 끄트머리를 잡아 뺐다.

16550872436466.jpg“자, 이거 봐.”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한없이 행복해 보이는 신혼부부의 아름다운 결혼사진이었다. 순백의 A라인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여자는 겨울 자신이었고, 그 옆에 턱시도를 입은 키 큰 남자는 틀림 없는 강시후였다. 찰떡처럼 달라붙은 두 사람은 입술을 겹치기 직전처럼 과감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고, 그 모습은 겨울의 동공에 지진을 일으켰다.

16550872436466.jpg“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엄연히 네 남편이야.”

시후가 도로 지갑을 닫으며 낮게 읊조렸다.

16550872436466.jpg“설사 기억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결혼했다는 사실 만큼은 변하지 않아.”

부드럽게 팔을 뻗은 그가 겨울의 뺨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16550872436466.jpg“넌 나를 사랑했고, 나도 너를 사랑했어.”

갈색 동공이 풍랑을 맞은 돛단배처럼 뒤흔들렸다. 시후의 입에서 발음되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겨울의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16550872436466.jpg“무슨 뜻인지 알겠어?”

입가에 촉촉한 미소를 띤 시후는 비스듬히 고개를 틀었다. 하얀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그가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16550872436466.jpg“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사선으로 내려오는 뜨거운 숨결과 함께 두 남녀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16550872436466.jpg“다시 나를 사랑하도록 노력해봐.”

끈적한 음성이 겨울의 솜털을 흠뻑 젹셨다. 순간 겨울의 숨이 덜컥 멈추었다. 시후가 허리를 숙여 겨울의 얼굴 가까이 다가온 탓이었다. 두 입술 사이에서 뜨거운 열기가 맴돌았다. 칠흑처럼 짙은 눈동자와 길게 찢어진 눈매가 겨울을 빨아들일 것처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길쭉한 검지를 세워 겨울의 턱 끝을 살살 어루만지더니 느슨하게 들어 올렸다.

16550872436466.jpg“그러니까…….”

그 순간 촉촉한 시후의 입술이 겨울의 입술 위로 가볍게 눌렸다. 촉, 두 입술이 만들어낸 마찰음이 고요한 병실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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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드럽게 멀어지니 겨울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여졌다.

16550872436466.jpg“이제 같이 집으로 돌아가자, 여보.”

시후가 겨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화르륵, 동시에 겨울의 얼굴은 새빨갛게 불타올랐다.

16550872436466.jpg“우리는, 다시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속삭이며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뜨거웠다. 귓불까지 빨갛게 물든 겨울이 반사적으로 제 입술을 확 가렸다.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박동했다. 여전히 입술에 남아 있는 부드럽고 말랑한 입술의 감각에 정신이 어지러웠다.

16550872436466.jpg“사랑해, 겨울아.”

겨울의 눈동자가 뒤흔들렸다. ……하. 악몽도 이런 악몽이 없다. *** 병실을 나온 시후는 느슨하게 목에 걸려 있는 넥타이를 풀어 재킷 안주머니로 밀어 넣었다. 휴대전화를 꺼낸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16550872436466.jpg“네, 접니다. 뭐 하나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웃고 있던 얼굴이 어느덧 차게 굳었다.

16550872436466.jpg“사람들 불러서 2층 함겨울 방에 있는 가구들과 짐 전부 안방으로 옮겨주세요.”

날카로운 눈매가 예리하게 가늘어졌다.

16550872436466.jpg“오늘 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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