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나랑 같이 자고 싶었어?2021.10.27.
시후는 사고 이후, 겨울의 혼란한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1년간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졌으니, 그녀로서는 별안간 남편이 생긴 것이나 다름없을 터였다.
‘네가 싫어하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아. 강요하는 부분도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렇기에 그녀에게 어떠한 부부로서의 행위도 요구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시간을 두고 기다려 줄 뿐. 그런데……. 문득 동그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일순 장난기가 발동하고 말았다.
‘그럼 따로 자려고 했어?’
물론 그저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다.
‘우리 신혼이잖아.’
하지만 그녀에게는 진심으로 와 닿았던 모양이었다. 그 말에 물감이라도 번진 듯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왜 그렇게 귀여워 보였는지 모른다.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작은 얼굴을 보자, 꼭꼭 숨겨두었던 내면의 짓궂은 마음이 꿈틀거렸다.
‘한 침대에서 자야지, 부부인데.’
당황하면 할수록, 더 괴롭히고 싶어지는 가학적인 이상한 심리가 피어오른다. 마치, 10대 소년처럼. 이렇듯 그녀와 함께 있으면 자꾸만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끌려들어 가게 된다. ……하지만, 자제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아직은 그녀에게 다가갈 때가 아니었으니까. ……조금 비겁하긴 해도, 그녀의 사라진 기억에 힘을 입어, 계획을 반드시 성사시켜야만 하니까. *** 시후는 겨울이 사고를 당한 이후 제대로 숙면한 적이 없어 굉장히 피곤한 상태였다. 이 컨디션이라면 잠자리에 들자마자 곯아떨어질 줄 알았는데, 옆 방에 겨울이 있다는 사실에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혹시 자는 동안 어딘가 앓지는 않을까, 뒤늦게 사고 후유증이 오지는 않을까. 온갖 상념과 걱정이 밀려온 탓에 한참을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건 무슨 상황일까. 팔뚝에서 느껴지는 무게에 잠에서 깬 시후의 까만 눈동자가 뒤흔들렸다. 어디선가 나타난 겨울이 제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어린아이처럼 새근새근 자고 있던 탓이었다. ……왜, 여기에 함겨울이. 꿈이라고 하기엔 어둑한 시야를 채우는 섬세한 속눈썹과 도톰한 입술이 너무도 선명했다.
“…….”
잠시 지그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시후의 동공이 흐트러졌다. 그려놓은 것처럼 부드러운 얼굴의 곡선과 오물오물 움직이는 자그마한 입술, 그 속 하얀 치열 사이로 언뜻 모습을 드러낸 분홍색 혀가 시후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우움…….”
신음을 흘린 붉은 입술이 시후의 가슴에 더욱 찰떡처럼 달라붙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가슴 위로 겨울의 몰캉한 입술이 아무렇게나 문질러지자 당황한 시후의 몸에는 후끈 열이 올랐다.
“잠깐…….”
마른침을 삼키자 우람한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하…….”
이 쪼끄만 여자는 대체 어쩌자고, 남의 침대에 제 발로 들어왔는가. 한숨을 내쉰 시후가 꼼짝하지 못하고 있는데, 돌연 가느다란 팔이 뻗어져 시후의 견고한 허리를 꽈악 감싸 끌어당겼다. 아랫배를 뜨겁게 맞붙여오는 겨울의 행동에 움찔한 시후의 입술이 툭 벌어졌다. 돌처럼 굳은 시후의 허리를 만지작거리던 자그마한 손은 조금 더 앞으로 움직여 잘게 쪼개진 복근을 따라 야릇하게 움직였다. 그 발칙한 손이 점점 더 아래로 향하자 시후는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우리, 채채…….”
겨울이 잠결에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사고 이후 처음으로 안온한 잠자리에서 마음 편히 숙면을 취하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기분 좋은 꿈을 꾸었는데, 매일 끌어안고 자던 곰 인형 채채를 안고 누워 있는 꿈이었다. 그래, 곰 인형. 겨울은 손을 뻗어 채채를 꽉 끌어안았다. 이건 곰 인형 채채……. 매끈하고 따뜻하고……. 천천히 더듬거리며 내려가다가 채채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음, 근데 이거, 왜 이렇게 딱딱한……. 움찔한 겨울이 반사적으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난데없는 살색의 향연이었다. 겨울의 동공에는 지진이 일어났다. 졸지에 남자의 탄탄한 맨가슴과 마주한 겨울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커다란 눈을 끔뻑끔뻑했다.
“……깼어?”
낮은 음성이 귓가에 그윽하게 들려오자 겨울이 고개를 들어 시후와 눈을 마주쳤다.
“손 좀 치우지 그래.”
그제야 자신의 손이 어디를 주무르고 있는지 인지한 겨울이 기겁하며 떨어졌다.
“꺄아아아악!”
이, 이, 이게 무슨 상황이야! 강시후의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뒤로 확 빼며 경기를 일으키듯 멀어졌다.
“으……꺅!!!”
그 반동에 침대에서 떨어질 듯 위태롭게 곡예 하던 몸은 강한 힘에 의해 끌어 올려졌다. 찰나의 순간, 굵직한 팔이 겨울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아 제 가슴으로 당긴 것이었다. 도로 시후의 널찍한 품에 쏙 들어간 겨울의 얼굴에는 화르륵 불이 붙었다.
“으헉!”
이상한 비명을 내지르며 벌떡 일어난 겨울이 빨개진 얼굴을 가리며 소리쳤다.
“야, 강시후!!! 너, 너 미쳤어?! 어떻게 여자 혼자 자는 방에 몰래 들어와?!”
“들어오긴 누가 들어와.”
“지금 네가 들어와서……!”
“네가 내 방에 들어온 거잖아.”
“뭐?!”
되려 성내는 겨울에 시후가 헛웃음 쳤다.
“참나, 내가 언제……!”
발끈한 겨울이 확 주위를 둘러본 순간이었다. 잠들었던 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겨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깐, 여기는……. 강시후가 원래 같이 자자고 했던 안방? ……내가 왜 여기 있지? 분명히 중간에 물 마시러 나왔었는데…….
“……아.”
그제야 방을 착각하고 잘못 들어와 잤다는 사실을 깨달은 겨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어쩔 줄 모르고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데, 그 위로 낮은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나랑 같이 자고 싶었어?”
커다란 손을 뻗은 시후가 장난스럽게 속삭이며 덮고 있던 이불을 살짝 들추었다.
“들어와. 따뜻하게 해 줄게.”
툭툭, 옆자리를 가리키며 은밀하게 속삭이는 입술에 겨울의 양 볼은 터질 것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됐거든! 난 내 방 가서 잘 거니까!”
씩씩거리며 쏘아붙인 겨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원래 자고 있던 옆방으로 뛰어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으으…….”
쪽팔려! 쪽팔려! 쪽팔려! 이불이 찢어지도록 발길질하던 겨울은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첫날부터 흑역사 생성이었다. *** 겨울은 몸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일을 잠시 쉬기로 했다. 클레르 스파 청담점의 지명 1순위였던 인기 테라피스트의 장기 부재에 실장은 우는소리를 했지만,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현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겨울이 지금 해야 할 것은 단 한 가지, 하루빨리 사라진 기억을 되찾는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겨울이 가장 먼저 되찾고 싶은 기억은 강시후와 있었던 일이었다. 어쩌다 그와 결혼하게 된 건지, 왜 그런 결정을 한 건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너랑 네 남편이 어땠냐고?”
겨울은 오늘 쉬는 날인 친구 희수를 만나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죽고 못 사는 사이였지. 완전히 스윗 그 자체!”
희수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쉽게 답했다.
“……내가 강시후하고?”
“응. 넌 기억이 안 나겠지만, 나한테 운명이라고 그랬잖아.”
“뭐? 운명?!”
황당함에 입이 떡 벌어졌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그렇다니까? 내가 너를 알고 지낸 지 무려 9년이 넘었는데, 그런 말 하는 거 처음 봤어!”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돼? 둘이 초등학생 때부터 소꿉친구 사이였다며, 서로 첫사랑이었다고. 근데 우연히 다시 만나서 사귀었다며?”
“…….”
우연히 다시 만난 건 맞긴 한데……. 겨울이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그리고 네 남편 엄청나게 잘생겼잖아! 돈도 많고. 나라도 운명이라고 생각하겠다.”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그 남자와 난, 절대 사랑할 수 없는 사이라고. 겨울은 뒷말을 삼켰다. 깊은숨이 폐부를 돌았다가 입술 사이로 빠져나왔다.
“아직도 아무런 기억이 안 나?”
“……응.”
“조금도? 아무 생각도?”
“전혀.”
“진짜 큰일이다. 어떻게 1년만 그렇게 뚝 자른 듯 사라져?”
“내 말이 그 말이다…….”
절망한 겨울이 테이블에 쿵 머리를 떨어뜨렸다. 벌써 깨어난 지 나흘이 다 되어가는데, 도대체 왜 이놈의 기억은 돌아올 기미가 없는지……. 그렇게 테이블에 퍼질러져 한숨만 폭폭 내쉬고 있는데, 일순 뒤에서 나타난 남자가 겨울의 머리를 가볍게 흐트러뜨렸다.
“나 왔다.”
“거, 빨리도 오네. 왜 이렇게 늦게 와?”
희수의 타박에 의자를 빼고 앉은 남자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에 진상 환자 하나 때문에 진료가 늦게 끝났어.”
그의 이름은 박주형, 강남의 한 치과에서 페이 닥터로 일하고 있는 그는 오늘도 진상 환자에게 종일 시달린 상태였다.
“또? 이번엔 웬 진상이래.”
“공짜로 치료해달라고 우기더니, 아주 멱살까지 잡힐 뻔했다니까.”
미간을 좁힌 주형이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보다 겨울아,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주형의 물음에 겨울이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는 왜 이러고 있어. 아프게.”
작은 머리를 들어 올린 주형이 겨울의 하얀 이마를 가볍게 문질렀다. 스스럼없는 접촉에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건 겨울과 주형이 무려 9년의 우정을 자랑하는 막역한 친구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야야, 유부녀 머리 그렇게 맘대로 만지는 거 아니다!”
희수가 주형의 손을 찰싹 때리며 눈을 흘겼다.
“하여튼, 난 겨울이 네가 그렇게 남자들한테 철벽 치던 애인데, 네 남편이랑은 사귄 지 3개월 만에 결혼한다니까 황당하긴 했어. 그렇지?”
“응. 좀 많이…… 충격이었지.”
그 당시를 떠올린 주형이 쓰게 웃으며 술을 한 모금 넘겼다.
“그래서 난 되게 걱정했었는데, 잘 사는 거 보니까 기분 좋았거든. 그런데 이런 일 생겨서 어떡하냐? 하필 한창 신혼일 때.”
겨울은 대답 대신 깊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둘이 죽고 못 사는 사이였는데, 참 어쩌다가…….”
쯧쯧 혀를 차던 희수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조금만 참고 기억 찾으려고 노력해봐.”
“노력은 무슨. 기억도 안 나는데 얘가 그 집에서 얼마나 불편하겠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주형이 딴지를 걸었으나 희수는 한번 흘겨만 보고는 다시 겨울에게 말했다.
“네 남편이 널 정말 아껴줬어. 널 보는 눈에서 아주 하트가 뿅뿅, 꿀이 뚝뚝. 눈꼴신 잉꼬부부였어.”
픽 웃음을 터뜨린 희수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솔로는 어디 서러워서 살겠냐. 안 그래, 박주형?”
“엮지 마라. 난 자발적 솔로고, 넌 타의에 의한 솔로고.”
“뭐? 죽을래?!”
희수와 주형이 한바탕 투덕거리는 소리를 배경음으로 겨울은 또 한 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심경이 더욱 복잡해진 탓이었다. 천하의 원수 강시후와 그렇게까지 죽고 못 사는 사이였다는 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근데, 대체 왜…….’
왜 이렇게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걸까?
“야, 겨울아.”
“응?”
희수의 부름에 겨울이 고개를 들었다.
“근데 너 왜 반지 안 껴?”
“반지?”
“응. 남편이 안 서운해해?”
“아…….”
……반지? 미간을 좁힌 겨울이 기억을 더듬어 시후의 길쭉한 왼손 약지에 항상 자리하던 결혼반지를 떠올렸다. 무언가 묘한 기류를 감지한 겨울의 미간에 실금이 그어졌다. 작은 손을 펼쳐 허전한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는 겨울의 눈이 커졌다. ……잠깐. 그러고 보니……. 사고 후, 깨어났을 때. 내가 결혼반지를 끼고 있었나? 안 끼고 있었던 것 같은데…….
“…….”
왜 반지를 안 끼고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