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진실 혹은 거짓2021.10.31.
그러고 보니……. 사고 후, 깨어났을 때. 내가 결혼반지를 끼고 있었나? 안 끼고 있었던 것 같은데…….
“…….”
왜 반지를 안 끼고 있었지? 그렇게 생각이 닿자 겨울의 등으로 소름이 돋아났다.
‘남들 눈에 그렇게 사이좋은 부부였다면, 항상 결혼반지를 끼고 있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겨울, 무슨 생각해?”
희수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겨울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 아무 생각도…….”
더듬더듬 손을 뻗어 물잔을 쥔 겨울은 퍼석하게 마른 입가를 적셨다.
“반지는 아무래도 사고 났던 날 잃어버린 것 같아. 기억이 안 나네.”
“그래? 아깝다. 그거 비싼 거잖아.”
“뭐, 목숨값이라고 생각하면 싸지.”
대충 웃어넘긴 겨울의 표정이 이내 찜찜하게 굳었다. 묘하게 서려오는 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야.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안 끼고 싶으면 안 끼는 거지, 넌 뭘 쓸데없는 걸 묻고 있냐?”
주형이 타박하자 희수가 쌍심지를 켰다.
“뭐래. 결혼반지는 당연히 껴야지! 난 내 남편이 반지 안 끼고 다닌다고 생각하면 진짜 열불날 것 같은데?”
“그건 네 생각이고. 결혼하면 반지 끼고 다녀야 한다고 헌법에 쓰여 있냐.”
“헌법이 왜 나와, 헌법이? 아니, 오늘따라 왜 계속 시비야?”
“내가 언제 시비를 걸었다고…….”
다시금 투덕거리기 시작한 희수와 주형 사이에서 멍하니 인형처럼 앉아 있던 겨울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이내 양팔로 머리를 부여잡고 마구 헝클어뜨리자 놀란 희수와 주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우, 깜짝이야. 왜 그래?”
희수의 물음에도 겨울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답답한 가슴을 두어 번 내려친 겨울은 미쳐버릴 것만 같아 술잔을 와락 움켜쥐었다. 꿀꺽, 꿀꺽, 꿀꺽, 거침없이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는 알코올에 희수와 주형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야, 넌 퇴원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애가!”
다급하게 말리는 주형의 손을 뿌리친 겨울은 아예 병나발째로 입술 사이에 끼워 물었다.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들이붓는 행태에 희수와 주형은 손 쓸 도리가 없어 지켜만 볼 뿐이었다.
*** 후미진 풍경과 어울리지 않은 노란색 스포츠카가 좁고 더러운 골목을 환히 밝히며 들어섰다. 길 한쪽에 주차된 차에서 내린 시후는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가 술집 앞에 서 있는 희수를 발견했다. 어색하게 웃음 지은 희수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해요, 놀라셨죠. 겨울이가 많이 취해서…….”
희수로부터 겨울이 취했으니 데리러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퇴원한 지 이틀도 안 된 몸으로 만취할 때까지 술을 들이부은 건지, 오는 내내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겨울이는 어디에…….”
뒷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린 문틈으로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찼다. 만취한 모습으로 주형에게 반쯤 안겨 등장한 겨울에 시후의 신경이 뒤틀렸다. 작은 어깨를 감싼 팔이 거슬려 자연히 미간이 모여들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결혼식 이후 처음인가요?”
……겨울의 친구 박주형. 결혼식 날 내내 굳은 얼굴로 자리를 지켰던 놈이었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네, 오랜만입니다.”
“겨울이가 심란한지 술을 많이 마셔서요. 죄송합니다.”
“괜찮으니 주세요. 제가 부축하겠습니다.”
낮게 읊조린 시후는 곧바로 손을 뻗어 겨울의 어깨를 감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또다시 굳어지는 주형의 표정을 본 시후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역시나. 이 박주형이란 놈은 겨울을 좋아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어쨌든…… 이렇게 또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다음에 제대로 한번 다시 대접하겠습니다.”
정중하게 선을 지키고 말하자 주형도 굳었던 표정을 풀고 형식적인 미소를 띠었다.
“네.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럼 전 겨울이 데리고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두 분 모두 조심히 들어가세요.”
“다음에 봬요, 형부.”
희수와 주형에게 가볍게 묵례한 시후가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겨울을 부축하여 차로 이끌었다. 휘청거리는 여린 몸을 조수석에 앉히고 운전석으로 이동한 그는 단정하게 묶여 있던 넥타이를 사납게 풀어헤쳤다.
“함겨울…….”
취기에 녹아 세상모르고 잠든 겨울을 가만히 바라보던 시후가 다소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혼자만 속 편하지, 아주.”
입까지 헤 벌리고 자는 모습이 천진하기 그지없다. 새근새근 들려오는 숨결을 배경음으로 기어를 바꾼 시후가 픽 웃음을 흘렸다.
“넌 혼 좀 나야 해.”
말은 그렇게 해도 겨울을 배려한 바퀴는 느리게 굴렀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한 시후는 완전히 곯아떨어진 겨울을 업고 집으로 올라왔다. 게스트룸 침대에 겨울을 눕힌 시후가 깊은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폈다.
“…….”
흘끔 내려다본 겨울의 입가에는 미미한 미소가 띠여 있었다. 그 유려한 입꼬리를 따라 슬며시 웃은 시후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온종일 답답하게 옥죄어 있던 셔츠의 단추를 풀어 내리는 손동작에서 어딘가 조급함이 묻어났다.
“하…….”
셔츠를 벗은 시후가 한 손으로 제 머리를 쓸어올렸다. 누워 있는 겨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침대 옆에 살짝 걸터앉았다.
“…….”
자연히 흐른 시선이 세상 모르게 자는 겨울에게로 꽂혔다. 완전히 취기에 잠식된 것인지, 겨울은 눈을 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후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겨울을 들여다보았다. 늘 고양이처럼 날을 세우고 경계하던 겨울인데, 잠든 모습만큼은……. 마냥 귀여웠다. 툭 치면 부서질 것처럼 마른 팔과 연약한 몸이 안쓰럽다가도, 새하얀 시트 위로 퍼진 흑갈색 머리카락에는 묘한 기분이 피어올랐다. 가만히 부풀었다가 꺼지는 가슴과 홀쭉한 배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눈길이 흐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흐트러진 스커트 아래 뻗어진 하얀 다리가 자꾸만 시야를 괴롭히자 시후는 아래에 깔린 이불을 끌어 올려 겨울의 위에 포근하게 덮어주었다.
“겨울아.”
술기운에 핑크빛으로 물든 뺨을 살짝 보듬으며 나직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시후는 뒷말을 삼켰다. 그저 가만히 겨울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잠든 얼굴을 지켜볼 뿐이었다. 나비의 날개처럼 섬세하게 뻗어 있는 속눈썹과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코, 꽃물을 머금은 듯 붉은 입술이 시후의 시선을 빼앗았다. 촉촉하게 젖어 있는 통통한 입술을 지그시 바라보던 시후의 동공이 흐트러졌다. 갑자기 느릿하게 뻗어진 가느다란 팔이 시후의 우람한 목울대를 감싸 끌어당긴 탓이었다.
“우리, 채채…….”
……못된 잠버릇인가. 어제와 똑같이 채채를 부르며 끌어당긴다. 점점 입술로 당기는 손길에 딱딱하게 굳은 시후가 숨을 집어삼켰다. 한입에 머금으면 단물이 터질 것 같은 입술과 그 틈으로 비치는 분홍빛 혀에 시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그시 눈을 감은 그가 그대로 얼굴을 내렸다. 콩, 가볍게 겨울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부딪힌 시후가 헛웃음 쳤다.
“……내일 깨기만 해봐.”
허리를 일으킨 그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자는 겨울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아주 혼내줘야지.”
픽 웃음을 흘린 그가 겨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겨울아.”
무릎을 펴고 일어난 그는 뒤를 돌아 게스트룸을 나섰다. 뚜벅, 뚜벅, 뚜벅, 고요한 발걸음 소리가 방 안을 울리고 탁, 문이 닫혔다. 암흑이 찾아온 적막한 방 안. 굳게 닫혀 있던 겨울의 눈꺼풀이 스르르 느릿하게 올라갔다. 그 사이 흑갈색 동공은 초점이 또렷했다. 취기에 전혀 젖지 않은 눈으로 방문을 지그시 바라보던 겨울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강시후…….”
솔직한 속마음을 알고 싶었다. 저에 대한 강시후의 생각이나, 그가 숨기고 있는 듯한 무언가……. 그를 떠보기 위해 취한 척 연기해보았으나, 큰 수확은 없었다. 오히려…….
‘사랑해, 겨울아.’
“……하.”
제대로 말렸다.
“미치겠다…….”
겨울이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며 한숨을 쉬었다. 사랑한다는 말…….
‘진짜인 걸까.’
더없이 심란해지는 밤이었다. *** 거실로 나온 시후는 미니바를 열고 안에 보관해둔 와인 한 병을 꺼냈다. 느슨하게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꽉 막힌 코르크 마개를 제거하고 와인을 따랐다. 느릿한 동작으로 한 모금 넘긴 시후의 입술 사이로 짙은 숨이 흘렀다. 탁, 잔을 내려놓은 시후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불빛이 번진 서울의 야경을 가만히 응시했다.
“……재밌어졌네, 함겨울.”
길쭉한 손가락은 테이블 위를 톡, 톡, 고요하게 두드렸다.
“취한 척이라니…….”
한쪽 입술 끝이 여유롭게 곡선을 그렸다. 어설픈 연기에 속아주는 것도 나름 재밌는 경험이다.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나도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지. ……기대해. 앞으로 지독하게 괴롭혀주지. *** 겨울은 흠칫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포근히 덮여 있는 이불을 확 젖히며 몸을 일으켰다.
“……아.”
미쳤다, 함겨울……. 바보 같게도 전날 그대로 잠이 들었던 것이었다.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따스한 아침 햇살에 겨울은 탄식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으, 숙취…….”
주량을 넘지는 않았지만, 술을 많이 마신 건 사실이었다. 메스껍고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자 미간이 절로 모여들었다. 일단 찝찝한 몸을 씻기 위해 욕실로 직행해 샤워했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나서는데,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솔솔 새어 나왔다. ……뭐지? 아랫집 음식 냄새가 들어왔을 리는 없을 테고……. 이상함을 감지한 겨울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부엌으로 향했다.
“잘 잤어?”
다정한 목소리가 겨울의 귓가에 안착한 순간, 그녀의 동공에는 지진이 일어났다.
“속은 좀 어때.”
꽃분홍색 앞치마를 맨 시후가 겨울의 시선을 강탈하고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서늘한 얼굴을 가진 남자와 핑크 핑크 빔이라도 쏠 것 같은 앞치마는 극강의 부조화를 일으켰다. 겨울은 충격에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저건 대체 무슨…….
“뭐…… 뭐해요?”
“숙취 있을 것 같아서, 콩나물국 끓여봤어.”
가스 불을 줄인 시후가 겨울을 보며 웃었다.
“같이 아침 먹자, 겨울아.”
다정하게 속삭여오는 음성에 겨울은 난색을 표했다.
‘……이 남자가 왜 이러지?’
간밤에 무슨 심경 변화가 있었던 걸까.
‘혹시 내가 자기를 의심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건가?’
그렇게 생각이 닿자 가슴이 섬뜩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생글생글 웃고만 있는 얼굴은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점점 더 커지는 불안감에 겨울은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허기진 배를 느끼고 있었지만 외면했다. 이런 혼란한 기분으로 그와 마주 보고 식사를 할 수는 없었으니까.
“배도 안 고프고…….”
그래서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연기하며 도도하게 말했으나 내장 기관이 스파이였다. 꼬르륵. 군침이 도는 음식 냄새 앞에서 너무도 솔직하게 반응하는 위장. 민망함에 얼굴이 자두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커다란 동공을 굴려 다른 곳을 바라보는 척했다. 꼬르륵. 꼬르르륵. 하지만 이어지는 뱃고동 소리는 더욱 크기를 키우기만 했고. 살풋 웃음을 터뜨린 시후가 의자를 빼주며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함겨울 배 속은 솔직해서 귀엽네.”
……이런, 씨. 또 흑역사 생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