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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기억에 사는 남자 (10/112)

10. 기억에 사는 남자2021.11.03.

16550873619161.jpg“앉아.”

그 말에 우두커니 서 있던 겨울이 다리를 움직였다. 식탁에는 장조림, 진미채, 멸치볶음 등 맛있어 보이는 밑반찬들이 상다리 부러지도록 차려져 있었다. 껄끄러운 눈으로 음식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시후가 그릇에 콩나물국을 한가득 담아 건넸다.

16550873619161.jpg“맛있게 먹어.”

웃으며 건너편에 앉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16550873619172.jpg“근데 원래 우리가 같이 아침을 먹었었나요?”

16550873619161.jpg“……응. 항상 같이 먹었었어.”

……거짓말. 겨울의 미간이 고요히 구겨졌다. 아침을 먹지 않은 지 무려 10년이 넘었는데, 결혼했다는 이유로 갑자기 아침을 차려 먹었을 리 없었다.

16550873619161.jpg“이제 아침은 이렇게 매일 같이 먹자.”

겨울은 옅게 인상을 찌푸렸다.

16550873619172.jpg“난 요리 못해요.”

16550873619161.jpg“걱정하지 마. 아주머니께 퇴근하시기 전에 간단히 반찬하고 찌개나 국, 만들어달라고 부탁드릴 예정이니까.”

16550873619172.jpg“……일단 잘 먹겠습니다.”

뜨끈한 콩나물국을 한 모금 마신 겨울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간도 적당하고 국물도 시원한 게, 생각보다 수준급의 요리실력이었다.

16550873619161.jpg“맛있어?”

16550873619172.jpg“……뭐, 먹을만해요.”

퉁명스럽게 나간 말과 달리 부지런히 움직이는 수저에서 본심이 드러났다. 씩씩하게 잘도 먹는 겨울을 보며 나직이 웃은 시후가 구석에 놓인 진미채를 집어 들었다. 오물오물 움직이는 붉은 입술에 가까이 갖다 대자 겨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16550873619172.jpg“……?”

제 얼굴 앞으로 바짝 접근한 반찬을 보며 겨울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16550873619172.jpg“이거 뭐요? 상했어요? 버려요?”

16550873619161.jpg“아니. 너 먹으라고.”

16550873619172.jpg“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어쩔 줄 모르고 동공만 이리저리 굴리던 겨울은 제 젓가락으로 시후의 젓가락 사이의 진미채를 쏙 구출해왔다.

16550873619172.jpg“예……. 대단히 감사하네요.”

16550873619161.jpg“근데 왜 계속 존댓말 하는 거야?”

16550873619172.jpg“존댓말이 편해서요.”

16550873619161.jpg“부부 사이에 왜 존댓말을 해. 우린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데.”

16550873619172.jpg“그럴 리가요. 2살이면 강산이 5분의 1만큼 바뀌는 세월인걸요.”

시후가 불만스레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겨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완강하게 철벽을 쳤다.

16550873619172.jpg“그리고 난 아직 20대, 그쪽은 30대. 엄청난 세월의 벽이 우리 사이엔 존재하니까, 괜히 퉁치려 하지 마세요.”

뾰쪽한 말투에 시후가 귀엽다는 듯이 픽 웃음을 흘렸다.

16550873619161.jpg“입에 밥풀이나 떼고 말하지.”

움찔한 겨울이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 순간 훅 치고 들어온 시후의 엄지가 겨울의 입술을 매끄럽게 쓸었다.

16550873619161.jpg“거기 말고 여기.”

입술에 닿았던 서늘한 손가락의 감촉에 겨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남자의 손은 곧바로 멀어졌으나 겨울의 놀란 가슴은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당혹감이 몰려오자 겨울은 옆에 놓인 물잔을 황급히 움켜쥐었다.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는 겨울을 바라보는 시선은 더없이 따뜻했다.

16550873619161.jpg“주말에 뭐해? 영화 보러 갈래?”

푸웁. 또 물을 한바탕 뿜어버렸다. 축축해진 입을 닦은 겨울이 짧게 숨을 토해냈다.

16550873619172.jpg“하…… 뭐, 뭘 보러 가요?”

16550873619161.jpg“영화.”

16550873619172.jpg“……그걸 우리가 왜 보러 가요?!”

16550873619161.jpg“데이트하자는 뜻인데.”

16550873619172.jpg“……우리가 왜 데이트해야 하는데요?!”

16550873619161.jpg“부부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

……하. 말이 안 통하니 이길 자신이 없다. 고개를 내저은 겨울은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기로 했다.

16550873619172.jpg“나 지금 내 생각, 솔직히 그대로 말해도 돼요?”

16550873619161.jpg“뭔데? 편하게 말해.”

16550873619172.jpg“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결혼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16550873619161.jpg“…….”

16550873619172.jpg“난 결혼 생각도 없었는데…… 더군다나 그쪽과 결혼했을 리 없다고요.”

16550873619161.jpg“왜?”

16550873619172.jpg“……네?”

16550873619161.jpg“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16550873619172.jpg“그야…….”

답은 뻔했다.

16550873619172.jpg“나는…….”

널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니까. 가장 증오하는 인간이 강시후, 너니까! 차마 아침부터 콩나물국을 끓여준 사람의 면전에 대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 입술을 오물거렸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겨울은 대충 다른 이유를 대기로 했다.

16550873619172.jpg“강시후 씨는 내 스타일이 아니에요.”

16550873619161.jpg“뭐?”

16550873619172.jpg“내 스타일이 아니라고요.”

16550873619161.jpg“왜? 어떤 점이?”

16550873619172.jpg“그…….”

갑자기 생각해내려니 할 말이 없었다. 시후는 겨울의 뒷말을 기다리는 듯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16550873619172.jpg“나는…… 그게…….”

바쁘게 굴러가는 동공이 문득 시후에게로 꽂혔다. 까만 머리카락과 길게 찢어진 눈, 조각이라도 한 듯 오뚝한 콧대와 날렵한 턱선…….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외모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완벽했다.

16550873619172.jpg“너, 너무 잘생긴 남자는 좀 별로라…….”

미친년, 뭐라는 거야……! 저도 모르게 헛소리를 지껄인 겨울이 내적 비명을 내질렀다. 열 오른 얼굴이 화끈화끈하는 것이 느껴지자 식탁 밑으로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아무렇게나 던진 말이었으나 세상 심각하게 받아들인 시후는 잠시 고민에 빠진 듯했다.

16550873619161.jpg“그럼 이렇게 하자.”

16550873619172.jpg“뭘……?”

16550873619161.jpg“내가 고칠게. 원하는 얼굴 말해봐.”

16550873619172.jpg“네?!”

16550873619161.jpg“이상형 말이야. 널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미친놈이다. 강시후는 진짜 제대로 미친놈이다.

16550873619161.jpg“근데 그거 알아?”

픽 웃음을 흘린 시후가 느슨하게 턱을 괴었다.

16550873619161.jpg“난 널 처음 봤을 때부터…….”

날카로운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16550873619161.jpg“계속 예쁘다고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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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쿵. 겨울의 심장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화르륵 얼굴에 불이 붙었다. 어쩜 저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하는지……. 당황한 겨울은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묵묵히 수저만 움직였다.

16550873619161.jpg“나는 너 처음 봤던 날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머리띠에 흰 원피스 입고 있었지?”

16550873619172.jpg“……기억력 참 좋으시네요.”

무려 17년 전 일인데도, 그는 겨울이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16550873619161.jpg“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혹시 삼촌 있냐고, 어디서 본 것 같다고.”

16550873619172.jpg“그랬죠.”

16550873619161.jpg“지금 생각해 보니 그거 작업 멘트 아니야?”

16550873619172.jpg“네?”

황당하게 되묻자 시후가 장난스레 웃었다.

16550873619161.jpg“꼬맹이가 맹랑했네. 초딩이 중딩한테 작업도 걸고.”

16550873619172.jpg“아, 뭐래. 아니거든요! 그건 그냥 전에 만난 어떤 사람이랑 닮아서……!”

아, 또 말렸다.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은 겨울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16550873619172.jpg“어떤 사람이랑 닮아서 그랬던 거예요. 내가 열 살 땐가 놀이터에서 그쪽이랑 되게 닮은 사람을 만났었는데…… 그 사람이 지금 강시후 씨랑 되게 닮아서…….”

……근데 내가 이 얘기를 왜 하는 거지? 후, 작게 숨을 내쉰 겨울이 고개를 내저었다.

16550873619172.jpg“됐어요. 우리 그냥 옛날얘기는 하지 말죠. 난 별로 떠올리고 싶은 기억이 아닌데.”

16550873619161.jpg“그래. 그러자.”

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16550873619161.jpg“과거는 다 잊고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지.”

그 말에 물잔을 들던 겨울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꾸욱, 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과거를 잊으라고? 평생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 있다. 즈려밟고 나아가고 싶어도 영원히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족쇄. 겨울에게 과거란 그런 의미였다.

16550873619161.jpg“참, 그리고 오늘은 일 때문에 많이 늦을 거야. 먼저 자.”

시후의 말에 겨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겨울은 자정이 조금 넘어서 침대에 누웠으나, 심란한 마음 탓에 쉬이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여러 가지 상념들이 부유하며 겨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창밖은 어느덧 쥐죽은 듯 고요했고, 시계의 시침은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통행하기에는 야심한 시각이었으나 시후는 아직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16550873619172.jpg“진짜 늦게 오네…….”

아침에 남겼던 말대로 그의 퇴근 시간은 이렇듯 자정을 넘겼다.

16550873619172.jpg“게임회사 대표라더니…….”

원래 이렇게 야근이 많은 직업인가? 문득 그렇게 생각이 닿자 기분이 찜찜해졌다. 사고 이후 지금까지 시후는 회사도 출근하지 않고 겨울의 곁을 지켰었다. 그 탓에 아마도 처리하지 못한 일들이 쌓여 있을 터였고, 오늘은 그 일들로 인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터였다. 그런 와중에도 콩나물국까지 끓여주다니…….

16550873619172.jpg“대체 왜?”

도저히 강시후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베개에 폭 얼굴을 묻자 아침에 강시후와 나누었던 대화가 다시금 상기되었다.

16550873619161.jpg‘그래. 과거는 잊고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지.’

그가 했던 말이 온종일 머리에 남아 맴돌아 미칠 지경이었다. 무언가가 명치에 꽉 틀어막힌 듯이 속이 답답했다. 깊게 한숨을 내쉰 겨울은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

16550873619172.jpg‘뭐야, 이거……!’

삽시간에 모든 걸 태워버릴 듯한 주홍의 화염이 사방을 휩쓸었다. 넘실거리는 불길은 겨울이 있는 곳까지 서서히 잠식해가고 있었다. 피부는 타들어 갈 듯 뜨거웠고, 밀려오는 공포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16550873619172.jpg‘숨이 안 쉬어져……!’

만연한 연기에 숨이 턱 틀어 막히고 의식은 점점 흐려져만 갔다. 뒷머리는 욱신거렸고 온몸에는 힘이 빠져 일어날 수가 없었다.

16550873619172.jpg‘안 돼…….’

하지만 겨울은 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가까스로 창고의 문까지 기어간 겨울이 다급하게 문을 열어봤으나, 철문은 완강하게 닫혀 있었다.

16550873619172.jpg‘어떡해…….’

밀려오는 죽음의 공포와 함께 눈물이 쉴새 없이 흘렀다.

16550873619172.jpg‘살려줘…….’

쾅, 쾅, 쾅!

16550873619172.jpg‘살려주세요! 여기 사람 있어요!’

손이 부서지라 창고 문을 두드렸으나 밖에는 아무도 없는 듯 고요했다.

16550873619172.jpg‘윽…….’

공기를 태우고 있는 화염의 악독한 냄새에 겨울의 의식은 손쓸 새도 없이 달아나고 있었다. 사그라드는 정신 속에서 겨울은 힘없이 풀썩 바닥에 쓰러졌다. 죽음은 코앞에 있었다. 영원한 잠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

16550873619172.jpg“……하아!”

식은땀을 흘린 겨울이 튀어 오르듯 상체를 일으켰다. 하아, 하아, 격정적인 숨이 입술 사이로 아무렇게나 쏟아졌다. 악몽을 꾼 겨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16550873619161.jpg“겨울아. 괜찮아?”

귓가에 녹아드는 나직한 음성은 다름 아닌 강시후였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치켜올린 겨울은 시후와 눈을 마주했다.

16550873619161.jpg“막 퇴근했는데, 네 방에서 앓는 소리가 나서 와봤어.”

겨울은 대답 없이 거친 숨만 몰아쉴 뿐이었다.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16550873619161.jpg“안 좋은 꿈 꿨어?”

……안 좋은 꿈? 이걸 안 좋은 꿈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아니. 이건 꿈이 아니라, 그저 묵혀놨던 옛날의 기억일 뿐이다.

16550873619172.jpg“……괜찮아요. 오래전 일이 떠올랐을 뿐이에요.”

발갛게 충혈된 눈을 바라보는 시후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잠시 말없이 겨울을 바라보던 시후는 굽혔던 허리를 일으켰다.

16550873619161.jpg“그래. 쉬어. 난 나갈게.”

짧게 말한 시후는 뒤를 돌아 방을 떠났다. 탁, 문이 닫혔다. 고요한 가운데 뚜벅, 뚜벅,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고, 겨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끌어 올렸다.

16550873619172.jpg“하아…….”

지금만큼은 강시후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내 기억에 사는 남자였으니까. 자꾸만 내게 지난날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과거에서 벗어나려고 숱하게 노력했던 나의 발버둥을……. 산산이 부서뜨리는 남자였으니까.

16550873619172.jpg“…….”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겨울은 두 팔로 제 무릎을 감싸 안아 쪼그리고 앉았다. 마치 17살 때의 그날처럼, 스스로의 온기를 느끼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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