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우리, 이혼해2021.11.07.
12년 전, 17살의 겨울. 집안이 몰락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겨울은 전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다. 그런 겨울을 향한 일부 학생들의 이유 없는 괴롭힘은 점점 심해져만 갔는데, 단순히 언어적 폭력으로 시작했던 학교 폭력은 점차 물리적인 폭행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일부 학생들이 겨울을 뒤뜰로 끌고 가서 뺨을 때리고 밀치며 욕을 했다. 어느덧 삶의 의지를 잃은 겨울은 저항할 생각도 들지 않아,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그저 얻어맞고만 있었다. 그때, 둘러싼 무리의 뒤로 키 큰 남자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 남자가 강시후라는 것을 알아본 겨울의 입술이 툭 벌어졌다. 그는 친구 한 명과 함께 뒤뜰을 지나 체육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야, 쟤 1학년에 함겨울 아니냐? 너 쟤랑 친하지 않았나?”
옆에 있던 친구가 시후에게 묻자, 그는 겨울 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고 낮게 답했다.
“몰라, 저런 애.”
그렇게 한 마디를 남긴 시후는 그대로 겨울을 스쳐 지나갔다. 그 뒷모습을 무표정으로 바라보는 겨울의 동공이 탁 풀렸다. 그의 신발 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겨울은 들었던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이내 모든 걸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퍼억! 그 순간, 한 아이가 거세게 겨울을 밀었고 벽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힌 겨울은 그대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뭐, 뭐야?”
“……쟤 죽은 거 아냐?”
“도, 도망가자!”
놀란 아이들은 황급히 자리를 떴고, 얼마 가지 않아 겨울은 의식을 놓았다. 그렇게 잠시 기절했던 겨울이 의식을 되찾았을 때, 그녀는 자신이 양호실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제 옆에 앉아 가만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강시후?”
다름 아닌 강시후였다. 기절한 겨울을 양호실까지 데려온 시후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겨울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자리했다.
“……왜 맞고만 있었어.”
한참만의 침묵을 뚫고 시후가 조용히 물었다.
“소리라도 지르던가. 왜 아무것도 안 하는데?”
왠지 화가 난 것처럼 들려오는 목소리에 겨울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신경 꺼. 네가 무슨 상관인데?”
저항도 삶에 의지가 있는 사람이나 하는 행동이었다.
“내 일에 관여하지 마.”
매일 집으로 찾아오는 사채업자와 대체 밤낮으로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집에 들어오지도 않는 엄마, 빚만 산더미로 남기고 죽어버린 아빠, 중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어린 동생과 제 얼굴만 보면 침을 뱉는 동급생들. 그 모든 게 싫고 끔찍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싫은 것은…….
“함겨울, 네가.”
강시후, 이 남자.
“자꾸 신경 쓰이게 만들잖아.”
커다란 손이 손목으로 느슨하게 감겨오자 울컥한 겨울의 눈가가 붉어졌다. 커다란 눈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투명한 물기가 점차 고여 들었다. 느릿하게 손을 뻗은 시후가 겨울의 촉촉해진 눈 밑을 가볍게 쓸었다. ……그래. 이 남자의 이런 점이, 끔찍하게 싫은 거였다. 날 하찮게 여기면서, 좋아하지 않으면서, 간간이 보이는 알 수 없는 행동들. 확 그의 손을 뿌리친 겨울은 시후를 원망하듯 노려본 뒤 재빠르게 양호실을 빠져나왔다. 뒤뜰에서 겨울을 집단 린치했던 학생들은 모두 정학 처분을 받았다. 그 여파로 괴롭힘이 사그라드는가 싶었으나,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오히려 정학을 당한 학생들의 친구들이 보복으로 겨울을 학교의 버려진 체육 창고에 끌고 갔는데, 그곳에서 겨울은 또다시 집단으로 폭행을 당했다. 겨울은 여전히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가만히 바닥만 바라보았다.
“야, 이제 그만 가두고 나가자.”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얻어맞고 바닥에 쓰러진 겨울을 버리고 아이들은 낄낄거리며 유유히 창고를 빠져나왔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의식은 자꾸만 흐릿해져 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어, 겨울은 그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윽고 살갗으로 느껴지는 뜨거운 기운에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사방에 화염이 창천한 상태였다.
“뭐야, 이거……!”
상황 파악하기 위해 바쁘게 구르는 눈동자가 뒤흔들렸다. 겨울을 폭행한 학생 중 하나가 떨어뜨린 담배꽁초의 불씨가 꺼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구석에 놓인 나무뜀틀에 옮겨붙은 불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번지며 좁은 창고를 활활 불태웠다. 그리고 그 넘실거리는 불길은 겨울이 있는 곳까지 서서히 잠식해가고 있었다. 피부는 타들어 갈 듯 뜨거웠고, 밀려오는 공포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숨이 안 쉬어져……!’
만연한 연기에 숨이 턱 틀어 막히고 의식은 점점 흐려져만 갔다. 벽에 부딪혔던 뒷머리는 욱신거렸고 온몸에는 힘이 빠져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안 돼…….”
하지만 겨울은 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가까스로 창고의 문까지 기어간 겨울이 다급하게 문을 열어봤으나, 철문은 완강하게 닫혀 있었다.
“어떡해…….”
밀려오는 죽음의 공포와 함께 눈물이 쉴새 없이 흘렀다.
“살려줘…….”
쾅, 쾅, 쾅!
“살려주세요! 여기 사람 있어요!”
손이 부서지라 창고 문을 두드렸으나 밖에는 아무도 없는 듯 고요했다.
“윽…….”
공기를 태우고 있는 화염의 악독한 냄새에 겨울의 의식은 손쓸 새도 없이 달아나고 있었다. 사그라드는 정신 속에서 겨울은 힘없이 풀썩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겨울은 흐려지는 의식 속에 창고 문이 박살 나는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 자신을 다급하게 안아 드는 것을 느꼈다.
‘……누구?’
그대로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병원 응급실이었다. 어떻게 된 건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의사가 다가와 겨울의 상태를 점검했고 곧바로 각종 검사 절차를 밟았다.
“검사 결과 큰 이상은 없습니다. 연기를 더 많이 마셨으면 위험할 뻔했는데, 구조가 빨라서 천만다행이에요.”
의사는 작게 웃으며 뒷말을 덧붙였다.
“젊은 학생이 용감하기도 하지.”
“……젊은 학생이요?”
“네. 한 남학생이 불길을 뚫고 환자분을 구조했어요. 구급대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면 이렇게 무사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대체 누가 저를…….”
“그건 말할 수 없지만, 그 학생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
“그 학생, 등 쪽에 화상도 심하게 입었고요.”
등 쪽에 화상……? 다치면서까지 날 구해준 사람이 있다고? 겨울은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었으나, 경찰에서도, 병원에서도 구해준 사람이 본인의 정체를 비밀로 하길 원한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 생명의 은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겨울은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다시 그를 만난다면, 그에게 모든 걸 주어도 좋을 만큼……. 항상 죽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죽음을 코앞에 두니, 그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살고 싶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살자. 그 화염 속에서 날 구해준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꿋꿋하게 살자. 목숨 걸고 나를 살려준 그 은인을 생각하며, 독하게 버티자. 겨울은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죽으라는 법은 없었던 것인가. 다행히도 그날을 마지막으로 겨울을 향한 괴롭힘은 완전히 사라졌다. 겨울을 창고에 가두었던 학생들은 강제 전학 처분을 받았고, 이제 그 누구도 더 이상 겨울에게 욕을 하거나 손찌검을 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로 갑자기 괴롭힘이 잦아든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겨울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는 이상한 일도 있었는데, 그날은 겨울 방학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퇴원 후 학교 뒤뜰에서 화단에 물을 주는데, 갑자기 강시후가 겨울을 찾아왔었다. 그는 평소와 다른 옷차림이었는데, 꼭 어른처럼 슈트에 코트를 걸쳐 입은 모습이었다. 어쩐지 늘 봐왔던 강시후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뭔가 묘한 이질감을 느낀 순간 성큼 걸어온 시후가 돌연 겨울을 확 끌어안았다.
“뭐, 뭐야……!”
성숙한 오드콜로뉴 향기가 훅 끼쳐오고, 은연중에 약간의 담배 냄새 또한 서려 있었다. 강시후는 향수도 뿌리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는데……. 겨울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미간을 좁혔다.
“강시후?”
따지듯 앙칼지게 부르자 확 겨울을 떼어낸 시후가 황급히 뒤를 돌았다. 겨울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의아할 뿐이었다. 불쾌하기도 했다. ……키가 더 커졌나? 머리 스타일도 바뀐 것 같고. 묘하게 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겨울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퉁명스레 물었다.
“뭐야. 여긴 왜 온 거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뭐 하자는 건데. 할 말 있으면 해.”
굳게 마음을 다진 겨울이 묻자 시후의 나직한 음성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없어, 할 말.”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어째서인지 얼굴을 절대 보여주지 않았다.
‘……뭐지?’
자꾸만 파고드는 묘한 이질감에 겨울이 눈을 치켜떴다.
“그럼, 나중에 봐.”
어딘가 억눌려 있는 듯한, 무언가를 참고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짧은 한마디를 남긴 강시후는 어디론가 뚜벅뚜벅 걸어 사라졌다.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던 찰나의 만남. 그해 겨울, 마지막으로 보았던 강시후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흐르고 찾아온 18살의 해. 이제 숨 좀 돌리나 했으나, 불행의 그림자는 또다시 겨울의 인생에 드리우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 괜찮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홀로 생활비를 벌던 엄마가 청소부로 일하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만 것이었다. 그 사고로 허리를 심하게 다친 엄마는 더는 일할 수 없게 되었으며,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뿐인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필 그 시기에 사춘기가 온 동생 이경이 같은 반 학생을 폭행해 치료비 및 합의금을 물어내야 했다. 엄마의 입원비, 동생의 합의금, 월세, 관리비, 식비, 학비…… 등등. 돈이 너무도 필요했으나 갓 18살이 된 어린 여고생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황. 결국 늘 전교 상위권의 석차를 유지하던 겨울은 자신의 꿈이었던 의사와 의대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에 입에 풀칠할 돈도 없었으니, 생존하기 위해 학교를 자퇴하고 돈을 벌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 겨울에게 혜숙은 날마다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고 되뇌었고, 겨울은 그런 엄마의 말조차 듣고 싶지 않아 귀를 닫았다.
“겨울아! 좋은 소식이야!”
그날은 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하러 가기 하루 전날이었다.
“너 학교 그만두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막 퇴원한 혜숙은 갑자기 1,000만 원이라는 큰돈이 생겼으니 학교를 그만두지 말라고 말했다.
“뭐? 천만 원? 어디서 난 돈인데?”
“어, 음. 그게 엄마 아는 사람이 줬는데…….”
“아는 사람 누구? 지금 누가 우리한테 돈을 빌려줘?”
모두가 외면한 상황 속에 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아무런 조건도 없이 적선할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솔직히 말해. 누가 준 돈이야?”
대체 어디서 생긴 돈이냐며 내리 추궁하자 혜숙은 결국 솔직하게 실토하고 말았다.
“사실, 시후가…….”
다름 아닌, 강시후가 주고 간 돈이었던 것이다. 겨울은 그때 온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한 경험을 했다. 화가 난 겨울은 혜숙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미쳤어? 강시후네 집안에 우리 아빠 회사 인수된 것도 모자라서, 불쌍한 아빠는 억울하게 쫓겨나 죽기까지 했는데!!!”
“겨, 겨울아…….”
“엄마는 자존심도 없어?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강시후한테 돈을 받아!!!”
“하지만…….”
“됐어, 당장 돈 내놔! 내가 직접 가서 그 자식한테 돌려주고 올 테니까!”
현금다발이 담긴 가방을 들고 집 안을 뛰쳐나온 겨울은 곧바로 시후네 집으로 향했다. 근처 공원으로 시후를 부른 겨울은 저 멀리서 걸어오는 그를 악에 받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해가 바뀐 이후 처음 보는 강시후의 모습, 이상하게 가슴이 욱신거려 주먹을 꼭 쥐었다.
“가져가. 이런 돈 필요 없으니까.”
막 스무 살 성인이 된 시후는 그런 겨울을 한심한 어린애 바라보듯 내려다보며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말없이 뚫어져라 보는 시선에 겨울은 한 번 더 입술을 벌렸다.
“강시후, 너한테 돈 받을 이유 없으니까 도로 가져가라고.”
“……하.”
시후가 쓰게 헛웃음 치며 미간을 찌푸렸다.
“꼴같잖은 자존심 세우는 게 특기인가?”
움찔한 겨울의 눈동자가 위태롭게 진동했다.
“주제 파악 좀 하지.”
“…….”
“너나 네 가족이나, 자기 주제를 모르니까 그따위로 사는 거야. 알아?”
가슴에 비수가 꽂힌 겨울의 얼굴이 서늘해졌다. 일순 귀에서 이명이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함겨울, 너.”
겨울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학교 그만둔다고 소문 쫙 났던데. 네 처지에 그만둬서 뭐 어떡할 건데?”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돈 가방을 꽉 움켜쥐었다.
“진짜 소문처럼 술집에서 일하기라도 할 건가.”
싸늘한 조소가 입술 끝에 걸렸다. 밀려오는 치욕감에 도무지 견딜 수 없었던 겨울이 몸을 떨었다.
“아니면 뭐, 내가 네 스폰서라도 해줘?”
그 말에 겨우 붙잡고 있던 겨울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짜악! 무작정 손을 뻗은 겨울이 시후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완전히 무너져버린 자존심과 함께 겨울의 여린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았다.
“미친 새끼…….”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울고 싶지 않은데, 수치스럽게도 눈물이 쉴 새 없이 새어 나왔다.
“강시후 넌…… 진짜 최악이야.”
크게 찢어진 상처를 다시 한번 후벼 파이고 말았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상처를 받은 겨울은 그대로 뒤를 돌아 도망치듯 뛰었다. 그리고 그것이, 겨울과 시후의 마지막이었다. 겨울은 바로 다음 날, 가족들과 함께 소리 소문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었다.
*** 어린 시절, 끔찍했던 기억을 떠올린 겨울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다시금 흉측하게 벌어지며 덧나기 시작했다. 10년 전 그날부로 시후는 겨울에게 있어서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존재가 되었다.
“…….”
항상 모든 기억을 털어버리고 새 출발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 번도 기억 속에서 그날의 일들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강시후는.
“…….”
그는 내 모든 처음이었다. 첫키스, 첫사랑……. 그리고 처음으로, 죽고 싶을 만큼 치욕을 준 사람.
“하…….”
울컥 코끝이 찡해졌다. 과거를 떠올리자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물이 차올랐다. 꼬옥 움켜쥔 이불 위로 투명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린 시절의 나는, 겨우 내가 되려고 그토록 아팠던 걸까. 여전히 끝없는 밤을 걷는 기분이었다.
“흑…….”
너무도 춥고 외로웠던 17살 겨울처럼, 어른이 된 소녀는……. 제 몸을 꼭 끌어안고 목을 놓아 울었다. *** 겨울의 방을 나와 안방으로 돌아가는 시후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아까 겁에 질린 듯한 겨울의 창백한 얼굴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탓이었다. 퇴근 후 씻고 나와 겨울이 자는지 확인하기 위해 방 앞을 기웃거렸는데, 안에서 앓는 소리가 나서 들어가 보았던 것이었다.
‘……괜찮아요. 오래전 일이 떠올랐을 뿐이에요.’
겨울은 그렇게 말했었다. 아무래도 예전의 안 좋은 기억과 관련된 꿈을 꾼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니 등이 욱신거리며 아려오는 느낌이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린 시후는 제 등을 쓸어내렸다.
“하아…….”
깊은 새벽, 한숨이 길어졌다. 그녀와의 관계는 이렇듯 계속해서 돌고 도는 듯했다. 과거에 매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머물러서……. 시후는 입술을 짓씹었다. 겨울의 겁에 질린 표정과 떨리는 목소리, 잘게 떨던 어깨가 눈에 밟혔다. 도저히 이대로 외면할 수는 없어 발걸음을 돌려 도로 겨울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두 번 노크하고 방문을 열자 동공이 뒤흔들렸다. 침대에 쪼그리고 있는 겨울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엉엉 우는 겨울의 앞에서 시후는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이내 가까이 다가간 그는 두 팔을 벌려 겨울을 꽉 끌어안았다. 품에서 잘게 떠는 여린 몸을 토닥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겨울아…….”
겨울은 자신을 부르는 다정한 음성에 가슴이 무너졌다.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 모른다. 갑자기 기억을 잃었다는 지금 이 현실도, 유년 시절의 악몽 같았던 남자가 이토록 다정하게 대해주는 것도, 아직도 과거를 잊지 못해 이렇게 눈물짓는 한심한, 나. 그리고, 이 모든 감정을 그가 눈치챌까 무서웠다.
“흐윽…….”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겨울이 힘겹게 숨을 헐떡였다. ……내 마음은 아직도 11년 전 18살에 멈춰 있는데. 상처는 결국 아물지 않았고, 흐른 시간만큼 아픔은 사라지지 않았는데…….
“겨울아. 괜찮아?”
제 몸을 다정하게 끌어안는 남자의 품은 너무도 포근했다. 커다란 손은 겨울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겨 토닥였다.
“흐윽, 흑…….”
강시후, 네가 싫어. 당신이 미워. 원망스러워 미치겠어. 나는 너와 있으면 불행해져.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평생 과거에 묶인 채 살아갈 거야.
“난…… 오빠와 있으면 숨이 막혀.”
여전히 나조차도 사랑하지 못하는 내가, 너를 다시 사랑해서 더 괴로워지고 싶지 않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너를…….
“우리, 이혼해…….”
독인 줄 알면서 입에 넣는 바보 같은 짓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 나도 행복할 자격이 있잖아.
“……제발, 날 좀 놓아줘.”
더는 너와 엮이고 싶지 않아.
“이혼해줘…….”
난 너와 결혼한 기억조차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