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아껴주고 싶은 여자2021.11.24.
“이혼은 없어.”
여유롭게 미소 짓는 얼굴에 겨울은 심장이 떨어진 표정을 지었다.
“꿈도 꾸지 마.”
한자씩 박아 넣듯이 단호하게 뱉어지는 말에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자꾸만 멀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은 겨울은 있는 힘껏 입술을 벌렸다.
“수작…….”
꿀꺽 침을 삼킨 겨울이 표독스럽게 눈을 치켜떴다.
“수작 부리지 마요. 그런 알량한 도발에 넘어가지 않으니까.”
“수작 아니야.”
시후의 눈매가 짙게 물들었다.
“도발은…… 글쎄, 그럴지도 모르겠다.”
픽 실소하는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난 지금 네 맘을 돌리기 위해 못 할 짓이 없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요.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세 달 지나고 나면, 깔끔하게 이혼 서류에 도장 찍어줄게.”
그 말에 겨울의 심장은 뾰족한 가시가 박힌 듯 욱신거렸다. 이상하게 그의 눈을 바라보기 괴로워 애써 시선을 떨어뜨렸다. 입술을 꽉 깨물자 밤하늘처럼 어둑하고 촉촉한 음성이 고막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세 달간, 네 옆에만 있게 해줘.”
점점 그의 목소리가 애원하는 듯이 들려오는 탓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헤어질 땐 헤어지더라도, 좋은 기억 하나는 남겨야 하지 않겠어?”
드넓은 바다에 내던져진 조각배가 풍랑을 맞은 것처럼 겨울의 가슴이 거칠게 흔들렸다.
“내가 너에게 끔찍한 기억으로 남는 게 싫어.”
“…….”
“우리의 마지막을 다시 만들고 싶어.”
나지막한 목소리가 겨울의 심장을 저릿저릿하게 만들었다.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금 제 뺨으로 와닿는 온기에 살짝 고개를 들자 날카로운 눈매가 마치 한여름 밤의 장마처럼 축축하고 끈적끈적했다. 커다란 손이 겨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넘겼다.
“허락해줘, 겨울아.”
때아닌 소나기에 함빡 젖은 겨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도발도, 수작도 아니었다. 질척한 애원일 뿐. 도무지 숨을 쉴 수 없었다. 겨울은 그저 잘게 떨리는 눈을 감아버렸다.
“일단…….”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정한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내일 나랑 영화 볼래?”
댕, 하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확 하고 뜨여진 눈꺼풀로 시후의 웃는 낯이 들어찼다.
“영……화?”
“응.”
마른침이 겨울의 목으로 넘어갔다.
“오전에는 회사에 잠깐 출근해야 해서, 오후 3시쯤 집으로 데리러 갈게.”
그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당기는 손길에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었다.
“알겠지?”
얼떨떨하게 굳어 있던 겨울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흘렀다. 빨리 이 상황을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시후가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 다음 날, 잠에서 깬 겨울은 시후가 이미 출근하고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주말에도 회사에 나갈 정도로 바쁜 와중에 굳이 자신과 시간을 보내려는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미 약속은 해버린 후였다. 대충 끼니를 때우고 텔레비전을 보다 보니 어느덧 오후가 되었다. 외출 준비를 하기 위해 옷장 앞에 서자 한바탕 깊은 고민이 시작되었다.
“……뭘, 입어야 하지.”
신경 쓴 것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충 입기는 싫었다. 가만히 있어도 혼자 화보 찍는 그 남자에게 꿀릴 수는 없었으니까. 여러 벌을 입어본 후 무난한 흰 블라우스에 까만 플리츠 스커트를 입기로 했다. 곧장 화장대에 앉아 파운데이션을 찍어 바르고 있자니 문득 제 처지가 황당했다.
“아니, 근데 내가 왜 신경을 써야 하는 거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모공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꼼꼼하게 메이크업에 공을 들였다. 아이라인을 뾰족하게 올려 그린 뒤 분홍색 립글로스를 바르고 나니 묘하게 기분이 이상했다.
“참나, 무슨 데이트도 아니고…….”
궁시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겨울은 시간을 확인했다. 다려놓은 체크 재킷을 입고 전신 거울에 모습을 비춰보자 이상하게 긴장이 몰려왔다. 곧 걸려온 시후의 전화에 주차장으로 향하니 익숙한 노란색 스포츠카가 시야에 들어찼다. 쭈뼛거리며 다가가 차에 올라타자 시후의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예쁘네, 오늘.”
신경 쓴 걸 들킨 것만 같아 민망함이 몰려왔다. 얼굴에 오르는 열을 가까스로 무시하며 차갑게 대꾸했다.
“출발이나 해요.”
그 말에 시후가 상체를 가깝게 훅 내렸다. 놀란 겨울이 움츠러들었다. 커다란 손은 겨울의 얼굴 옆을 지나 벨트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골반 옆에서 탁하고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자 겨울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에게 들릴까 무서울 정도로 심장이 뛰자 빠르게 창문으로 눈을 돌렸다. ……왜 이렇게 평정을 유지할 수 없는 걸까. 강시후와 있으면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입술을 꾹 다물고 있자 차 안에는 잠시 고요가 흘렀다. 빠르게 바뀌는 창밖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던 겨울은 고개를 돌려 흘끔 시후를 곁눈질했다. 평소보다 캐주얼한 차림을 한 그는 어딘가 낯선 느낌이 들었는데, 흰 셔츠 위에 걸쳐 입은 네이비 컬러 니트는 안 그래도 떡 벌어진 어깨를 더욱 드넓게 보이도록 했다. 살짝 걷은 소매 아래로 불거진 뼈마디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겨울이 시선을 들었다. 속 쌍꺼풀이 진 날카로운 눈매와 우뚝한 콧날, 얇은 입술을 따라 시선이 흘렀다. 잘생기긴 더럽게 잘생긴 얼굴, 어렸을 때도 전교에서 모르는 여학생이 없을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자랑했지만……. 지난 10년, 20대 때는 얼마나 여자들이 줄을 섰을지 안 봐도 훤했다.
“뚫어지겠다.”
득실득실했겠지, 아마. 널린 게 여자였을 것이다.
“뭘 그렇게 봐?”
시후가 픽 웃으며 겨울과 시선을 마주했다. 겨울은 부자연스럽게 눈을 피하며 도로 창문에 눈길을 두었다.
“누가 봤다고…….”
……그래 봐야 재수 없는 남자지만 말이다. *** 영화는 뻔하디뻔한 클리셰가 똘똘 뭉친 삼류 액션 장르였다. 장내에 불이 꺼지고 겨울은 곧바로 몰입해서 영화를 감상했지만, 시후는 정면에서 펼쳐지는 영상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어둠 속 한껏 집중해 반짝 빛나는 눈동자에 더 흥미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스크린의 불빛을 받은 하얀 얼굴의 선을 따라 시후의 시선이 흘렀다. 봉긋한 이마와 유려한 선을 가진 둥근 코를 타고 도톰한 입술에 닿은 순간, 시후가 자그마한 소리로 물었다.
“혹시 향수 뿌렸어?”
코끝에 어른거리는 달콤한 향기에 취하는 기분이었다. 겨울은 고개를 내저으며 제 입술 앞에 검지를 갖다 댔다. 겨울의 고개는 앞으로 돌아갔지만 시후의 눈길은 여전히 겨울에게 향해 있었다. 어둠 속 예민해진 감각들로 겨울의 숨결까지 세세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팔걸이가 없는 좌석이었기에 슬쩍 뻗으면 손이 닿는 거리였다. 겨울의 하얀 손을 가만히 바라보던 시후가 살짝 손끝을 건드리자, 겨울이 미간을 좁히며 시후를 보았다.
“…….”
움찔한 시후가 모른 척 정면을 돌아보고 딴청을 피웠다. ……영화는 딱히 좋은 선택이 아니었던 것 같다. *** 130분이 꼬박 넘는 러닝타임이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장내에 붙은 켜지지 않았고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 없었던 겨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요.”
고개를 끄덕인 시후가 뒤따라 무릎을 폈다.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던 겨울이 뒤를 돌아보자 시후가 어영부영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빨리 좀 와요.”
답답했던 겨울은 저도 모르게 확 시후의 손을 낚아챘다. 그대로 끌고 내려가던 겨울이 일순 제 행동에 놀라 까무러치듯 손을 놓았다. 한 발짝 가까이 다가온 시후가 그 손을 도로 부드럽게 맞잡으며 나직하게 웃었다.
“천천히 가.”
그렇게 속삭이며 앞장서서 겨울을 이끌었다.
“넘어지면 안 되니까.”
……왜일까. 겨울은 자꾸만 그에게 말리는 것 같아 찝찝하면서도 맞닿은 손이 간질거렸다. *** 서울 도심의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초고층 빌딩의 프라이빗 룸에서 저녁 식사는 이루어졌다. 허브와 마늘 버터를 곁들인 달팽이 요리와 수프, 바닷가재구이가 차례로 서빙되자 겨울의 기분은 조금씩 상승했다. 맛봉오리를 감싸는 황홀한 맛의 향연에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가려는 것을 가까스로 제어했다. 메인인 스테이크가 식탁에 오르자 나이프를 쥔 시후의 손목이 절제된 각도로 움직였다. 미디엄 레어로 알맞게 익은 스테이크가 먹기 좋은 크기로 썰렸다. 시후가 겨울의 접시와 제 접시를 바꾸자, 겨울이 미간을 찡그렸다.
“됐어요. 나도 손 있어요.”
“되게 까칠하네.”
낮게 웃은 시후는 제 스테이크를 마저 썰었다. 그런 시후를 흘끔 바라본 겨울이 문득 입술을 벌렸다.
“근데,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뭘?”
“왜 KU그룹 경영에 참여하지 않아요?”
의외의 질문이라는 듯 시후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장남인데……. 승계로 따지면 1순위잖아요.”
고등학생까지만 해도 시후는 명실상부 KU그룹의 유력한 후계자였다. 그 누구도 그가 기업을 물려받지 않고 따로 자신의 회사를 차릴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으니까.”
답은 간결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나빴고, 대학 가서부턴 거의 절연하다시피 지냈어.”
“……무슨 일 있었어요?”
작게 묻자 시후는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내렸다. 더 캐묻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한 겨울은 빠르게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근데, 우리 결혼식에는 양가 부모님이 모두 참석하셨었나요?”
“응. 반대는 하셨지만 결국 참석은 하셨어. 남들의 눈을 누구보다도 신경 쓰는 사람들이니까. 괜한 구설에 오르고 싶지 않았겠지.”
시후의 입술 사이로 바람이 샜다. 실소한 그가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럼 어쩌다 게임 회사를 차리게 된 거예요?”
“오늘따라 질문이 많네.”
까만 눈동자가 비스듬히 사선을 타고 올라왔다. 작게 웃음을 터뜨린 시후가 지그시 겨울을 응시했다.
“드디어 나한테 흥미가 생긴 건가?”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마요.”
퉁명스레 받아쳤으나 시후의 진한 시선은 떠날 생각이 없었다. 이상하게 목이 바짝 타서, 겨울은 찬물로 입술을 적셨다.
“너도 알겠지만 내가 어렸을 때부터 게임을 좋아했잖아. 대학생 때 동아리원들하고 장난삼아 만든 게임이 대박이 나서 제대로 창업했거든.”
20대의 왕성한 혈기로 똘똘 뭉친 4명의 젊은 남녀들의 열정으로부터 지금의 넥스트 게임즈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그렇게 점점 키워나가다 보니, 결국 지금 규모가 됐어.”
단 네 명으로 시작한 소기업은 어느덧 연 매출 2,500억대를 바라보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 화려한 업적의 중심에 서 있는 그의 나이는 겨우 서른하나에 불과했다. 재수 없는 남자지만……. 솔직히 대단하긴 했다. 집안의 도움 없이 일구어낸 결과가 이렇듯 빛나고 있었으니까.
“사실 신규 게임을 계속 출시하고 있긴 하지만, 2년 전에 출시한 우리 회사 대표 게임 데이앤데이가 매출의 80퍼센트 가까이 차지하고 있어.”
시후는 덤덤하게 뒷말을 이었다.
“전작보다 못한 성적이 계속되니 위기감도 느끼고 있고…….”
이렇게 솔직하게 얘기할 줄은 몰랐는데. 치부까지 남김없이 털어놓는 그의 모습에 겨울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들보다 배는 더 노력하고,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하고 있어.”
금 탯줄을 타고 태어난 남자였지만, 뭐 하나 거저 얻은 게 없다는 뜻이었다. 겨울은 시후를 가만히 응시했다.
“좀 구식인 것 같지만,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게 내 신조라서.”
그렇게 말하며 지그시 맞부딪쳐오는 시선이 뜨거웠다.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겨울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러니까 너도 긴장해.”
부드럽게 휘는 눈매가 겨울의 숨통을 아찔하게 조여온다.
“내가 제대로 공들일 거니까.”
일순 입술이 경직됐다. 겨울은 굳은 입술을 가까스로 움직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시선을 옮기며 대꾸했다.
“그러든가요. 공든 탑이 무너지는 거 보여줄게요.”
“난 그렇게 부실하게 공사 안 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있어요. 내가 증명할 거니까.”
그 말에 시선을 내리깐 시후가 겨울과 눈을 맞추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라…….”
진중한 눈빛이 느슨하게 긴장을 조율했다.
“왜 찍어, 사랑하는 여자인데.”
쓰다듬는 것처럼 시후의 혀가 미끄럽게 움직였다. 야릇한 음성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아껴줘야지.”
순식간에 조이는 힘에 겨울의 입술은 바싹 말랐다. 겨울의 심장이 거칠게 고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