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사랑스러워2021.11.28.
식사를 마친 시후와 겨울은 근처 한강공원으로 향했다. 주말이었지만 사람이 많지 않아 공원은 꽤 여유롭고 한적한 분위기였다. 잔잔한 강물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를 걷다가, 겨울은 짐짓 무뚝뚝하게 말했다.
“장단 맞춰주는 건 오늘까지만이에요. 이제 그쪽이 하자는 대로 따라 줄 생각 없으니까.”
시후는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해.”
그런 그를 흘끔 본 겨울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오늘 하루 그가 하자는 대로 따라줬던 이유는 그가 더는 딴소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하게 점점 더 시후의 페이스에 따라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왜 예전처럼 반말 안 해?”
문득 물어오는 말에 겨울이 고개를 들었다.
“그쪽이라고 부르지 마. 강시후 씨라고 부르지도 말고.”
“…….”
“예전처럼 편하게 불렀으면 좋겠어. 말도 놨으면 좋겠고.”
차분하게 쏟아지는 말에 겨울은 목이 마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존댓말은 그와 거리를 두기 위한 일종의 방어선 같은 것이었다.
“……나는 강시후 씨가 불편해요.”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와 있으면 떠오르는 옛 기억은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흔들리는 스스로가 싫었다. 철저히 선을 긋고 최대한 빨리 관계를 끊어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네 일상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
언제 마음이 끌려갈지 몰랐다. 자꾸만 틈을 보고 파고들려고 하는 이 남자에게는, 자그마한 균열조차 기회가 될 테니까.
“그러니까, 언젠가 네 마음이 열리면…….”
“…….”
“그땐 예전처럼 불러줘.”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없어야만 한다. 가엾은 어린 시절의 나를 위해서라도, 지금의 내가 이 남자에게 먹혀들어 가서는 안 됐다.
“겨울아.”
한 발짝 다가온 시후가 비스듬히 겨울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너와 있으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져.”
하지만 그의 눈빛에서 비치는 온기에 일렁이는 가슴은 겨울이 제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고막 깊숙이 파고드는 목소리에 겨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잠깐 앉아봐.”
시후는 길가에 놓인 벤치로 겨울을 이끌었다. 선선하게 흘러가는 강물을 앞에 두고 나란히 앉았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시후의 손길을 물끄러미 보던 겨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작은 상자였다.
“이건 미리 주는 복귀 기념 선물.”
길쭉한 손가락이 상자를 열자 열쇠 모양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붉은 노을빛을 받은 펜던트에는 화이트골드와 다이아몬드가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겨울은 입이 얼어붙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경직된 입술을 움직인 겨울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내가 이런 걸 받을 이유가 없어요.”
“부담가질 필요 없어.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니까.”
“가격이 문제가 아니에요. 내가 거절하면 어떡하려고…….”
“글쎄. 받아주면 좋겠는데.”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겨울은 답을 하는 대신 한 가지 물음을 던지기로 했다.
“나를, 왜 좋아한다는 거예요?”
기억을 잃은 지난 1년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서로 사랑했다는 강시후의 말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지금 이 순간, 이 남자의 마음만큼은 진실이라고 믿고 싶었다.
“글쎄. 그냥 어느 순간부터…….”
시후가 숨소리처럼 속삭였다.
“너밖에 보이지 않았거든.”
살짝 고개를 숙인 시후가 겨울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네 미소를 보면, 난 더없이 행복한 기분이었어.”
깊은 저음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너는 처음 봤을 때부터,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자였고…….”
쏟아지는 눈빛을 받은 피부가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지금도 똑같이 사랑스러워.”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질문한 걸 후회한 겨울은 억지로 그에게서 눈을 뗐다. 고개를 돌리려는데, 시후의 커다란 손이 겨울의 얼굴을 감싸 자신에게로 돌렸다.
“내 얼굴 봐.”
뚫어지게 주시해오는 시선에 겨울의 심장에는 균열이 일었다.
“좀 더…….”
틈을 보이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파고드는 열기가 겨울을 압도했다. 단정하던 숨결이 흐트러지고 하얀 얼굴에는 무더운 기운이 스며들었다.
“더…….”
길쭉한 손끝이 겨울의 턱을 가깝게 당겼다. 서로의 체온과 체취가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거리였다. 두 시선이 정면으로 얽히고 겨울의 눈동자는 거칠게 떨렸다. 반면 직선으로 응시해오는 까만 눈동자는 겨울의 여린 가슴에 제 존재감을 박아 넣으려는 듯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됐다.”
꿰뚫을 듯 주시해오던 어둑한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이 정도면 오늘 밤은, 꿈에서도 만나겠지.”
그건 조금의 휴식조차 주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하루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조리 제 이름 석 자로 채우겠다는. 넋을 놓은 겨울이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시후를 바라보자 시후가 살풋 웃음을 터뜨렸다. 느릿한 동작으로 상자 안에서 목걸이를 뺀 시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목으로 손을 뻗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숨결이 얽히자 주춤한 겨울이 숨을 죽였다. 그녀의 목에 목걸이를 건 시후는 부드럽게 멀어지며 웃었다.
“잘 어울리네.”
참았던 숨을 몰아쉰 겨울이 제 목덜미 위에 걸린 보석을 풀기 위해 손을 올렸다. 그러자 시후가 겨울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며 낮게 속삭였다.
“거절은 세 달 뒤에 해줘.”
……또, 애원하는 듯한 눈빛.
“그때 가서 돌려주면, 더는 말 안 할 테니까.”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눈빛에 겨울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음성이었다. 집에 도착한 겨울은 녹초가 된 채 샤워하기 위해 욕실에 들어섰다. 세면대 앞에 서서 깊은숨을 몰아쉬며 귀걸이를 빼는데, 문득 아까 시후가 채워준 목걸이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거, 설마.”
한 가지 끔찍한 가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개 목줄 같은 건 아니겠지?”
도망 못 가도록. 목에 채운 거 아니야? GPS라도 심겨 있는 건 아니겠지? 문득 그렇게 생각이 닿자 미간이 절로 모여들었다.
“뭐, 개 목걸이치곤 좀 심하게 예쁘긴 하네.”
욕실의 환한 조명 아래 빛나는 광채로 미루어 보아, 몸값이 수백만 원쯤은 할법했다.
“되팔면 얼마 나오려나…….”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겨울은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혹시 들었나 싶어 흘끔 욕실 밖을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으나 밖은 고요했다.
“……하아.”
강시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그에게서 거짓을 느낄 수 없었다.
“……바보 같아.”
자만일지도 모르겠다. 그대로 주저앉은 겨울은 두 손바닥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점점 더 어찌해야 할지,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차라리 이대로 다 잊고 넘어가 버리면 편하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 월요일 아침, 시후는 이른 시각부터 출근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오늘은 중요한 미팅이 있었기 때문에 격식 있게 차려입은 시후는 바쁘게 현관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멈춰서서 거실에 앉아 있는 겨울에게 인사했다.
“나 회사 다녀올게.”
소파에 앉아 있던 겨울이 자리에서 일어나 까딱 고개를 숙였다.
“네. 그러세요.”
건성으로 답했으나 시후는 떠나지 않고 묶인 듯 가만히 서서 겨울을 지켜볼 뿐이었다. ……왜 저래? 겨울은 의아함에 눈을 깜빡였다.
“모닝 뽀뽀 안 해줄 거야?”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동시에 겨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농담이야.”
픽 웃음을 흘린 시후가 커다란 손을 뻗어 겨울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나 갈게. 너도 오늘 일 잘 다녀오고.”
하여간 틈만 나면 놀리려 하고, 나른하게 웃는 미소가 얄밉기 그지없었다. 자꾸 저러니까 묘한 오기가 생겼다. 이 남자의 얼굴을 온통 당황으로 물들게 하고 싶다는 이상한 충동이.
“잠깐만요.”
살짝 가깝게 다가선 겨울이 미세하게 삐뚤어진 시후의 넥타이를 단정하게 고쳐주었다.
“넥타이가 삐뚤어져서요.”
가까워진 거리에 조금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을 무시하며 시후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눈웃음 지었다.
“이제 됐네요.”
환하게 웃어 보이자 시후의 눈동자가 잠시 일렁였다. 그 동요를 똑똑히 목격한 겨울은 묘한 쾌감과 함께 승리한 기분을 느꼈다.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멀어지려는데 일순 시후의 커다란 손이 겨울의 뒷머리를 확 끌어당겼다. 다시 훅 가까워진 거리에 놀란 겨울이 숨을 집어삼켰다.
“……왜요?”
당황한 겨울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입술이 부딪힐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시후는 겨울을 말없이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이내 시선을 내리깐 시후가 비스듬히 고개를 비틀며 내려왔다. 키스할 것처럼 코앞까지 다가온 입술에 움찔한 겨울이 눈을 질끈 감았다.
“속 보인다, 너.”
낮은 웃음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 말에 발끈한 겨울이 눈을 번쩍 치켜떴다.
“지금 뭐라고……!”
그러나 뒷말을 이을 수는 없었다. 쪽. 말랑한 입술이 부드럽게 뺨에 와닿았기 때문이었다. 돌연 뽀뽀 당한 겨울의 얼굴에는 화르륵 불이 붙었다.
“나 간다. 이따 봐.”
낮게 웃은 시후는 빨간 토마토가 된 겨울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유유히 뒤를 돈 그는 태연하게 집을 떠났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겨울은 한 박자 늦게 성을 내며 제 뺨을 벅벅 문질렀다.
“아!!! 또 당했어, 함겨울!”
***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온 시후는 아침부터 촘촘히 짜여있는 일정을 보좌하기 위해 집까지 찾아온 홍 비서의 인사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오늘 바로 미팅 장소로 이동…….”
말을 하던 예나가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했다.
“대표님, 얼굴이 왜 그렇게 붉으세요? 어디 아프세요?”
이상할 정도로 유난히 빨갛게 상기된 시후의 얼굴을 보며 예나가 물었다. 살짝 헛기침한 시후가 차에 올라타며 고갯짓했다.
“됐으니 출발하지.”
변화된 감정의 기류를 느낀 건 겨울 뿐만이 아니었다. *** 오후가 돼서 느지막이 출근한 겨울은 클레르 스파 옆 건물의 샐러드 가게가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1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나 자주 먹던 가게였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았다.
“여긴 카페인가?”
원래 샐러드 가게가 위치했던 자리에는 ‘dos tres cinco(도스 트레스 신코)’라는 특이한 이름의 카페가 새로 들어서 있었다. 몸도 찌뿌둥한 게, 아메리카노로 몽롱한 속 좀 적셔야겠다는 생각에 카페에 들어섰다. 내부는 클래식한 인테리어와 따뜻한 색감의 조명이 인상적이었다. 꽤 넓은 사이즈의 매장엔 빈자리 없이 손님들로 바글바글했다. 어차피 테이크 아웃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겨울은 주문하기 위해 카운터로 다가갔다.
“앗……!”
그런데 그 순간, 뛰어오는 한 소년과 겨울이 퍽 소리 나게 부딪혔다.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는 순간, 단단한 팔이 잘록한 허리로 감겼다. 휘청이던 겨울은 지탱하는 힘에 넘어지지 않고 다시 중심을 찾았다.
“아, 감사합…….”
저를 잡아준 남자에게 인사하던 겨울의 눈이 일순 휘둥그레 띄어졌다. 놀란 입술이 툭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