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남편주의보2021.12.01.
“아, 감사합…….”
넘어질 뻔한 저를 잡아준 남자에게 인사하던 겨울의 눈이 일순 휘둥그레 띄어졌다. 놀란 입술이 툭 벌어졌다.
‘오…… 대박 잘생겼다.’
연예인인가 싶을 정도로 눈부시게 잘생긴 남자였다.
“괜찮아요?”
“아, 네. 덕분에.”
차가운 인상의 강시후와 달리 히터라도 틀어 놓은 듯 따뜻하고 훈훈하게 잘생긴 남자였다. 그야말로 온미남의 정석 같은 외모. 멍하니 넋을 놓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남자가 싱긋 웃으며 다정하게 말을 걸어왔다.
“겨울 씨, 오랜만에 오네요.”
“아…….”
나를 아나? 살짝 당황한 겨울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근 1년간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졌으니, 이 남자 또한 기억날 리 없었다. 잠깐 주춤거리던 겨울이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네. 안녕하세요.”
……대충 아는 척하고 넘어가자. 겨울은 그렇게 생각하며 남자를 따라 카운터로 향했다.
“오늘은 어떤 거로 주문하시겠어요? 늘 시키던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문을 받는 걸 보니 그는 아무래도 이 카페에서 일을 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아, 네. 그걸로.”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통성명도 한 사이고, 자주 시키는 음료까지 기억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지난 1년간 꽤 자주 왔던 카페였던 것 같은데 기억은 전혀 없었다.
‘대체 이놈의 기억은 언제 돌아오는 거야…….’
빨리 사라진 기억이 돌아와야 뭐든 할 수 있을 텐데, 조금도 생각나는 게 없으니 속이 답답할 뿐이었다. 복잡해진 얼굴로 심각하게 서 있는데, 얼마 가지 않아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나왔다.
“여기 아이스 아메리카노에요. 맛있게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이거.”
남자는 견과류가 촘촘히 박힌 초코 쿠키 하나를 매대에서 꺼내 건네며 웃었다.
“오랜만에 출근해서 힘들 텐데 당 충전해요.”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에는 상냥함이 묻어나왔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느낌에 겨울의 기분이 상승했다.
“와, 감동이에요! 잘 먹을게요.”
마음이 촛불이라도 켠 듯 따뜻해졌다. 비록 기억은 안 나지만 참 선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이크 아웃한 커피를 들고 클레르 스파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들이 환하게 웃으며 겨울을 반겼다.
“겨울 언니!”
“다들 잘 지냈어요?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
“웰컴 백!”
두 팔을 벌리고 달려온 우정이 겨울을 꼭 끌어안았다. 그 옆에 서 있던 희수도 웃으며 장난스레 손뼉을 맞부딪혔다.
“몸은 어때요? 괜찮아요?”
다정한 물음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린 겨울이 우뚝 굳었다. 난생처음 보는 모르는 얼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도 1년 사이 새로 온 사람인 건가?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연기하며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멀쩡해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하하, 왜 갑자기 존댓말 하세요, 팀장님?”
……아, 실수했다.
“어…… 내가 방금 존댓말을 했나?”
하하, 어색하게 웃어넘긴 겨울이 커다란 눈동자를 한번 굴렸다. 고객들에게 기억을 잃은 사실을 비밀로 하고 일하기로 했기 때문에, 동료 직원들에게도 당연히 비밀이었다. 이야기가 언제 어디서 새어나갈지 몰랐기 때문에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려고 했으나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겨울 씨.”
그때, 타이밍 좋게 건물 안쪽 사무실에서 나온 실장이 두 손뼉을 마주하며 겨울에게로 다가왔다.
“일찍 왔네. 이따 저녁에 오라고 했더니.”
“집에 있어 봐야 할 일도 딱히 없어서요. 몸도 완전히 멀쩡해졌고요.”
“다행이네. 그럼 일단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나와. 잠깐 얘기 좀 하자.”
“네.”
실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겨울이 탈의실로 들어가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사무실로 향했다. 단둘이 되자 실장은 목소리를 작게 낮추고 속닥거렸다.
“겨울 씨가 당부한 대로 다른 직원들과 고객들께는 기억 잃은 사실 비밀로 했어.”
“감사해요. 실장님.”
“겨울 씨 돌아온다니까 다들 앞다퉈서 정신없이 예약 줄줄이 하더라고. 당분간 쉴 틈 없을 거야. 각오 됐지?”
“그럼요. 일 못 해서 몸이 근질거리던 찰나인걸요.”
“그래. 난 겨울 씨 믿어.”
실장이 겨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이건 오늘 예약 고객 바디 체크리스트야. vip는 따로 표시해놨고.”
“네. 확인할게요.”
서류철을 건네받은 겨울이 미소로 응답했다.
“참, 직원들이 몇 바뀌었지?”
“네. 못 보던 얼굴이 있던데…….”
“아까 겨울 씨와 얘기했던 사람이 용산점에서 온 인력이거든. 이름은 하태연, 나이는 스물여섯.”
“그분만 새로 온 건가요?”
“아니. 아까는 관리 들어가서 없었던 직원이 하나 있는데, 키가 작고 통통한 친구 하나 있거든? 지금 수습. 이름은 강선영이고 스물둘.”
기억하기 위해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입안으로 이름을 되새겼다.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고.”
“네,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실장님.”
90분 타임의 예약 손님을 받고 녹초가 된 겨울은 직원 대기실에 엎어졌다. 겨우 몇 주 쉰 것뿐인데, 거기에 몸이 익숙해졌는지 다시 일에 적응하는 것이 꽤 버거웠다. 하지만 몸이 힘든 것보다도 정신이 더 힘들었는데, 난생처음 보는 고객을 원래 알던 것처럼 연기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포옥 한숨을 내쉬고 있자 때마침 대기실 안으로 들어온 희수가 겨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피곤하겠다. 그렇지?”
“응. 좀 그러네…….”
“너 방금 맡은 고객 제우기획 대표 와이프였잖아. 그 사람 완전 깐깐하다고 소문난 사람인데.”
“좀 까칠하긴 하더라.”
“안 들켰어? 기억 잃은 거?”
“응. 근데…… 좀 불안하긴 하다.”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지 걱정되는 맘이었다. 다 녹아 미지근해진 아메리카노를 단번에 마신 겨울이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밑에 카페에서 산 커피?”
“아, 응. 새로 생겼더라.”
“맞아. 그 카페가 두 달쯤 전에 새로 생겼거든?”
신이 난 희수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쫑알거렸다.
“나 요즘 거기 매일 출석 찍잖아. 사장이 뭐, 완전 연예인급 미모.”
“나도 아침에 봤어. 젊어 보이던데, 그 사람이 사장이야?”
“동안이라 그렇지 나이는 서른이야, 그 남자. 이름은 한석우.”
“한석우…….”
기억하기 위해 잇속으로 한번 되뇌자 희수가 쯧쯧 혀를 찼다.
“근데 내가 꼬셔보려고 별짓을 다 해도 안 넘어와. 실실 웃으면서 은근히 철벽남.”
뭐, 그 정도 외모면 자기 잘난 맛에 살 만도 하지. 겨울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나뿐인가? 다들 말은 안 해도 꼬시려고 눈 돌아간 것 같던데. 환장했어.”
“음.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뭐?”
“아니. 잘생기긴 했는데, 그렇게 막 눈 돌아갈 정도는…….”
“그럼 네 기준 눈 돌아가는 건 뭔데?”
희수의 물음에 겨울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윽고 그녀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떠오른 것은 시후의 얼굴이었다.
‘아, 미쳤나 봐. 함겨울.’
갑자기 강시후의 얼굴이 떠오를 건 뭐야. 당황한 겨울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 저녁 8시가 조금 넘어 퇴근한 겨울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건물 밖으로 나섰다. 교통카드를 꺼내기 위해 가방을 뒤적거리는데,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겨울 씨, 이제 퇴근해요?”
뒤를 돌아보자 조금 전 희수의 열띤 연설의 주인공이었던 한석우가 서 있었다. 아까 희수에게 들었던 이름을 상기한 겨울은 자연스럽게 웃으며 회답했다.
“네. 한석우 씨도 지금 퇴근하시는 거예요?”
“그렇죠. 저희는 8시면 닫으니까요.”
석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겨울 씨가 저를 이름으로 부른 건 처음이네요. 항상 사장님이라고 부르셨는데.”
“아……하하. 그런가요?”
아차, 또 실수하고 말았다. 어색하게 웃어넘긴 겨울이 자연스럽게 걸음을 떼었다.
“그럼 들어가세요. 저도 이만…….”
“아, 잠시만요.”
“네?”
역사로 들어가려는 겨울을 멈춰 세운 석우가 스스럼없이 한쪽 무릎을 굽혔다.
“신발 끈이 풀리셔서요.”
그렇게 말하며 단정하게 리본을 묶어주는 손가락을 겨울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인상만 따뜻한 것이 아니라 성격조차 모난 곳 없이 훈훈한 남자였다.
“이제 됐어요.”
“감사합니다.”
허리를 펴고 일어난 석우가 부드럽게 웃자 겨울도 미소로 회답했다. 그 웃음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석우가 느릿한 동작으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겨울 씨. 나 연락처 좀 알려줄래요?”
“네……네?”
갑작스러운 요청에 당황한 겨울이 바보처럼 되물었다.
“아, 음. 그게…….”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데, 빠앙, 하고 시끄러운 경적이 밤공기를 갈랐다. 동시에 석우와 겨울의 시선이 소음의 근원지로 쏠렸다. 그 끝에 걸린 익숙한 스포츠카의 모습에 겨울의 입술이 툭 벌어졌다. 무표정으로 차에서 내리는 장신의 남자는 다름 아닌 강시후였다. 굳은 얼굴을 보자 괜히 바람피우다 들킨 것처럼 뜨끔한 겨울이 주춤거리고 있는데, 시후는 곧 여유롭게 입꼬리를 들으며 다가왔다.
“여보.”
……여, 여보? 오랜만에 듣는 여보 타령에 겨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놀라기도 잠시, 제 손을 부드럽게 맞잡는 온기에 심장이 쿵 아래로 떨어졌다.
“이제 끝났어?”
“……네? 네…….”
“데리러 왔는데, 여기서 뭐 해?”
시후는 커다란 손으로 겨울의 손을 붙잡고 제 쪽으로 이끌었다. 손길은 그리 거칠지 않았고, 웃으며 말하는 목소리도 태연했으나, 주름 하나 없이 단정한 이마에는 핏줄이 불뚝 돋아 있었다. 겨울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사실 지금 시후의 속마음은 질투로 화르르 불타고 있었다.
‘……남의 여자 신발 끈을 묶어주긴 왜 묶어줘?’
유부녀 번호는 왜 따려 들고 난리야. 생긴 건 파스타 열 그릇 먹은 것처럼 느끼하게 생긴 주제에. 속은 부글부글 끓고, 따지고 싶은 말이 입안까지 고였으나 꿀꺽 삼켰다.
“아…… 남자친구분?”
눈치를 살피던 석우가 작은 소리로 묻자 시후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겨울이 남편입니다.”
석우는 겨울이 유부녀라는 사실을 몰랐었는지 순식간에 입매가 굳었다. 그 표정 변화에 겨울에게 흑심이 있었던 거라고 확신한 시후의 눈빛이 매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