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네가 더 예뻐2021.12.05.
“강시후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아, 네. 안녕하세요. 저는 여기 옆에 카페, 도스 트리스 신코 사장이에요. 한석우입니다.”
떨떠름하게 통성명한 두 남자는 세상 불편한 악수를 했다.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겨울은 마른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아……네. 알겠습니다.”
석우를 향해 고개를 까딱한 시후는 겨울의 어깨에 보란 듯이 팔을 걸쳤다. 놀란 겨울이 움츠러들었다.
“갈까, 여보?”
세상 사랑꾼인 것처럼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묻자 당황한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 올라타서 단둘이 되자마자 시후의 웃는 낯은 차게 굳었다. 누가 봐도 심기 불편해 보이는 시후의 눈치를 살피던 겨울이 큼, 헛기침했다.
“……번호, 안 줬어요.”
그렇게 말해놓고는 속으로 후회했다. ……내가 이 말을 왜 했지? 눈치 보고 있다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주워 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기특해.”
시후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여전히 심기가 불편한지 그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그런 그의 눈치를 계속해서 살피던 겨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근데, 내가 몇 시에 끝나는지 어떻게 알았어요?”
“민희수 씨한테 미리 물어봤지.”
“왜 그렇게까지…… 바쁜 사람 아니었어요?”
“응, 근데 같이 저녁 식사하러 왔어.”
“그 말은 설마…….”
겨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다시 회사에 가봐야 한다는 뜻?”
시후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에 겨울의 혼란은 가중될 뿐이었다.
‘아니, 그렇게 바쁜 와중에 왜 굳이 날 만나러 와?’
그것도 잠깐 저녁 먹겠다고 찾아온 그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 일은 어땠어? 오랜만에 나가는 거라 힘들었을 것 같은데.”
“괜찮았어요. 늘 하던 일이고.”
“너무 무리하지 마. 힘들 것 같으면 언제든 다시 쉬어도 되니까.”
“내 몸은 내가 잘 알아요. 참견하지 마세요.”
안전벨트를 맨 겨울이 등 돌리며 뾰족하게 대답했다. 평일 저녁이었기에 도로 위에 차는 많았고 가는 길목마다 오가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겨울이 미동 없이 그 창밖 풍경을 바라보자 차 안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그 찰나의 고요는 얼마 가지 않았는데, 시후의 휴대전화로 시끄럽게 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이었다.
‘……오민주?’
시후의 핸드폰은 차량의 네비게이션 화면과 블루투스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겨울은 액정 화면에 뜬 세글자를 손쉽게 읽을 수 있었다.
‘오민주가 누구지?’
앞구르기를 하면서 들어도 틀림없는 여자 이름이었다. 살짝 찝찝한 기분이었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까딱 고갯짓했다.
“받아요. 나 신경 쓰지 말고.”
“됐어. 중요한 전화 아니야.”
거절 버튼을 누르는 길쭉한 손가락에 시선이 닿았다.
“데이트 중인데, 방해받고 싶지 않아.”
“……데이트는 무슨…….”
뒷말을 흐린 겨울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근데. 오민주가 누구예요?”
“대학 동창.”
“……대학 동창이 이 시간에 전화를 왜 해요?”
시후가 대답 대신 낮게 웃음을 흘렸다.
“왜. 신경 쓰여?”
흠칫한 겨울이 황당하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왜 신경이 쓰여요. 그냥 묻는 거지.”
어수선하게 눈을 돌리자 창문 밖에 걸린 커다란 전광판이 보였다. 마침 시대를 풍미하는 톱스타 오민주의 화장품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그래, 저 배우. 오민주랑 이름이 똑같아서, 신기해서 그냥…….”
“같은 사람이야.”
“……네?”
“방금 전화 온 사람, 배우 오민주 맞아.”
허어어억. 놀란 겨울의 입이 발끝까지 떡 벌어졌다.
“배, 배우 오민주요?”
상상도 못 한 정체에 눈이 한계까지 뜨여졌다.
“그 톱배우? 영화랑 드라마에 나오는…… 그 소름 끼치게 예쁜 여자?”
하얀 얼굴이 충격으로 한껏 물들었다. 생각해보니 강시후 자체도 SNS상에서 꽤 유명한 셀럽이었으니, 지인으로 연예인을 알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샘솟았다.
‘……대체 강시후, 왜 나랑 결혼한 거지?’
주변에 그렇게 예쁘고 잘난 여자들이 많은데, 굳이 나와 왜 결혼을?
“글쎄. 난 그렇게 예쁜지 모르겠는데.”
물론, 겨울의 궁금증이 풀리는 데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네가 더 예뻐.”
그렇게 속삭이며 올라가는 입꼬리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역시, 이 남자. 미친 거나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다. *** 이틀이 지나고 어느덧 수요일이 되었다. 시후가 대표로 있는 넥스트 게임즈는 신규 게임 런칭 준비로 한창 바쁜 상황이었는데, 오늘은 다른 때보다도 특히 더 분주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넥스트 게임즈의 최고 흥행작인 데이앤데이의 태국 현지 런칭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관계자들은 문턱이 닳도록 대표실을 들락거리며 보고했고, 시후는 아침부터 정신없이 밀려오는 건들을 차근차근 결재했다. 그렇게 점심도 거르고 꼬박 일한 시후는 밝게 떠 있던 해가 저물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똑똑. 덩달아 맥이 쭉 빠진 예나는 힘없이 노크하며 대표실에 들어왔다.
“대표님. 모델 오민주 씨께서 찾아오셨는데…….”
예나가 말을 채 있기도 전에 대표실 문이 다시금 벌컥 열렸다.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온 민주가 가느다란 손을 발랄하게 흔들며 웃었다.
“하이, 하이.”
꾀꼬리처럼 높고 맑은 목소리는 피곤에 찌든 회사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옆에서 작게 한숨 쉬는 예나에게 민주가 경쾌하게 손짓했다.
“저기, 이거 좀 타와 봐요.”
“네?”
“이번에 해외에 갔을 때 사 온 원두인데 향이 죽여주거든.”
당황한 예나가 주춤거리다가 손을 뻗자, 시후가 낮은 음성으로 제지했다.
“죽여주는 거 네가 직접 타 먹어. 남의 비서 시키지 말고.”
단호하게 선을 긋자 민주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나가봐, 홍 비서.”
가운데 껴서 어쩔 줄 모르고 있던 예나가 작게 대답하며 얼른 밖으로 나갔다.
“치, 까칠하긴.”
애교 섞인 콧소리로 툴툴거린 민주는 집무실 가운데에 놓인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왜 왔어?”
무심하게 한마디 툭 던지자 민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왜 왔긴, 나 국내 들어온 김에 얼굴 보고 수다 좀 떨려고 왔지.”
연기파 배우로 최근 톱스타 반열에 오른 민주는 해외에서도 불러주는 곳이 많았다. 소멸할 듯이 작은 얼굴과 도도한 고양이 페이스에 서구형 몸매는 눈이 파란 이들에게도 워너비로 통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한가한 줄 아나.”
시후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민주가 섭섭함을 토로했다.
“야. 나 이래 봬도 이 회사 효자 게임 데이앤데이 광고모델이야. 비즈니스 사업 파트너를 이렇게 대해서 쓰겠어?”
빨간 입술을 늘어뜨리며 웃은 민주는 칼같이 잘린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데이앤데이가 국내에서 최초 출시할 때부터 광고모델을 해왔던 민주는 넥스트 게임즈를 지금의 위치까지 성장시킨 주역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민주는 시후와 함께 넥스트 게임즈를 창립한 네 명의 멤버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후 배우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회사를 떠나긴 했지만 말이다.
“그보다 시후, 네 와이프…….”
민주가 예쁘게 손질된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말끝을 늘였다.
“이번에 교통사고 크게 당했다며?”
그 말과 동시에 시후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까만 눈동자에 불길이 일자 살짝 당황한 민주의 눈이 커졌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긴. 나 어머님하고 같은 골프 모임이잖아. 어제 같이 라운딩 갔다가 들었지.”
민주는 시후의 가족과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는데, 그중에서도 시후의 새엄마인 유서진과는 꼭 친모녀 같은 사이였다.
“하…….”
시후가 헛숨을 터뜨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소리를 들었군, 또.”
“너무 까칠하게 굴지 마. 누가 보면 집에 꿀단지라도 숨겨놓은 줄 알겠다.”
“숨겨놨어.”
딱 잘라 말하자 민주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할 말 없으면 나가. 나 오늘 바빠.”
돌아가라는 듯 건성으로 손짓하자 민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올해 초, 결혼하고 나서부터 유난히 차가워진 시후가 그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자존심이 상한 민주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밖으로 나가려는데, 때마침 시후의 휴대전화가 시끄럽게 진동했다. 흘끔 고개 돌린 민주의 시야에는 눈에 띄게 굳은 시후의 얼굴이 들어찼다.
“표정이 왜 그래? 누구 전화인데?”
시후의 입술 사이로 낮은 한숨이 흘렀다. *** 한편 마지막 예약 손님을 받은 겨울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건물을 나섰다. 어제도 그저께도 시후가 데리러 왔었기 때문에 오늘도 올까 싶었으나, 그에게는 오지 못한다는 문자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얼른 집으로 향해 아주머니가 차려놓은 저녁을 먹을 생각을 하며 바쁘게 걸음을 재촉했다. 늘 오갔던 역사의 어귀에는 사람 하나 없이 한적했다. 내부로 들어가려는 찰나, 뒤에서 꺼림칙한 음성이 겨울의 발목을 잡았다.
“잠깐.”
묘하게 느껴지는 데자뷔와 함께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겨울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곳에는 검은색 버킷햇을 푹 눌러 쓰고, 선글라스와 까만 마스크까지 착용한 남자가 서 있었다. ……뭐지? 어디선가 본 듯한 행색인데…….
“너…….”
180센티가 훌쩍 넘는 커다란 신장을 가진 남자는 목소리조차 기괴하게 변조되어 있었다.
“강시후와 이혼해.”
……뭐라고?
“목숨이 아까우면 빨리 정리하는 게 좋을 거야.”
겁에 질린 겨울이 살짝 뒷걸음질 쳤다. 갑자기 괴한의 입에서 나온 강시후의 이름도 당황스러운데, 느닷없이 쏟아지는 협박에 등골이 오싹했다. 여차하면 소리라도 지를 생각으로 가방을 꾹 움켜쥐는데, 남자는 제 할 말을 다 끝냈다는 듯 곧바로 뒤를 돌아 어디론가 사라졌다.
“……하.”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쉰 겨울은 쫓기듯이 역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수많은 인파와 섞이고 나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풀고 지하철 좌석에 풀썩 주저앉았다. 요동쳤던 심장이 진정되자 조금 전 그 괴한에 대한 의문이 풍선처럼 몸집을 부풀렸다.
“그 사람, 대체 뭐지……?”
나와 강시후를 아는 인간인 건 틀림 없는데.
“근데 어디서 봤던 것 같은데……. 누구더라?”
곰곰이 생각하던 겨울의 머릿속으로 문득 스쳐 지나가는 문장이 하나 있었다.
‘동생 단속 좀 하지 그래.’
……아.
‘조만간 사고 한번 칠 텐데.’
1년 전에 만났던 그 남자! 묻어두었던 기억을 떠올린 겨울의 눈이 확 뜨여졌다. 조금 전 그 괴한은 다름 아닌, 작년에 이경이 교통사고를 냈던 날 아침에 만났던 사람이었다. 그는 그때 동생 단속 좀 하라는 의문스러운 말을 하고 떠났었고, 정말 얼마 가지 않아 이경이 시후와 접촉 사고를 냈었다.
“……뭐지, 대체?”
그 남자, 이경이 사고를 칠 거란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건가? 대체 어떻게? 정체가 뭐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