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키스해도 돼?2021.12.08.
아버지의 호출을 받은 시후는 달갑지 않은 가족 식사 자리에 억지로 참여했다. 괜한 소란을 만들었다가 뒷수습하는 게 더 힘들었으니, 대충 함께 먹는 척만 하다가 집에 돌아갈 생각으로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요즘도 날밤 까고 그러냐?”
KU그룹 회장이자 시후의 아버지인 강성호는 세월의 흐름에도 여전히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꿰뚫을 듯한 시선을 덤덤히 받으며 시후는 딱 잘라 답했다.
“아니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들은 게 있는데.”
성호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 계집애 돌본다고 그동안 일 쌓여서 그런 게지? 걔는 아직도 정신이 안 돌아왔더냐?”
“…….”
일순 차가워진 눈동자가 싸늘하게 성호를 향해 돌았다.
“내가 이미 김 실장한테 소상히 보고 받았다. 1년간의 기억이 사라졌다며.”
“또 뒷조사 하셨습니까?”
“네가 말을 안 하니, 나도 내 수대로 할 수밖에.”
하, 시후의 입술 사이로 헛숨이 터졌다. 까만 동공이 성호를 꿰뚫을 듯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혀를 놀렸다.
“하여간 그 계집애는 몸 간수를 어떻게 하는 건지. 하는 꼴이 제 아비랑 똑 닮았어.”
시후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감정을 제어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으나 떨리는 주먹만큼은 감출 수 없는 부분이었다.
“누가 아니래요. 재수가 없으려니, 그런 치 떨리는 물건이 집안에 들어오고…….”
풋 웃음을 터뜨린 새어머니 유서진은 은근슬쩍 한마디 더 얹으며 시후를 흘끔 보았다.
“근데, 1년간 기억이 사라졌으면 시후 너와 결혼한 것도 기억 못 하는 거 아니니?”
빨간 입술이 길게 늘어지며 한쪽 끝이 비죽 올라갔다.
“그래서 애는 언제 가지려고?”
“저희한테 아이가 없는 게 어머니에게는 더 좋은 일 아닙니까?”
시후의 말에 식탁 위는 찬물을 끼얹은 듯 싸하게 굳었다. 서진의 친아들인 창영의 경영권 승계에 어떠한 여지도 남기지 않으려면 시후에게 자식이 없는 쪽이 그녀에게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걸 대놓고 저렇게 말을 하니, 약이 오른 듯 서진의 붉은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듯 움찔움찔 떨던 입술은 이내 하, 헛숨을 내뱉었다. 와락 옆의 물컵을 쥔 서진은 꿀꺽꿀꺽 물을 들이켰다. 그 가운데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뜬 성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그만하고 밥 먹자.”
불편한 침묵 속에서 식사는 끝이 나고, 게스트룸 옆에 딸린 화장실에서 시후는 손을 여러 번 닦았다. 더러운 오물이라도 묻은 듯이, 보이지 않는 세균까지 전부 씻어내려는 듯이. 피부를 벗겨내기라도 할 것처럼, 세게 문질러 닦은 시후는 빨갛게 변한 손을 타월로 닦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벌써 가는 거야?”
나서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이복동생 창영의 비웃음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살짝 주먹 쥔 창영이 강건한 어깨를 툭 치자 시후의 매서운 눈이 직선으로 향했다.
“형. 그거 알아?”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시후의 고막을 무례하게 침범했다. 비스듬히 시선을 내리깐 창영이 시후의 카라를 움켜쥐고 확 끌어당겼다. 가까워진 귓가에 대고 낮게 뇌까렸다.
“너만 없으면 우리 가족은 완벽해. 강시후, 네가 문제야.”
시후는 속이 뒤집히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두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누가 불순물 아니랄까 봐 오늘도 불화만 일으키고…….”
팍 멱살을 놓은 창영이 느슨하게 팔짱을 끼며 벽에 기대섰다.
“불순물?”
시후가 하, 담배 연기를 뿜듯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래……. 아버지가 불순물 좀 찾지 않게, 넌 네 맡은 일이나 똑바로 해.”
“……뭐?”
“네가 일을 그따위로 하니까 아버지가 자꾸 나한테 미련을 가지는 거 아니야? 사람 열 받게.”
KU헬시뷰티의 전략기획본부장으로 있는 창영은 들끓는 야망에 비해 능력은 한참 떨어졌다. 건드는 사업은 족족 실패하며, 매년 적자를 갱신하니 이사회에서 KU그룹의 후계자인 창영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이번 네가 추진한 중국 쪽 사업도 말아먹은 걸로 아는데.”
창영의 잇새가 빠드득 갈렸다.
“능력도 없이 자리를 얻었으면 괜한 사람 건들지 말고 네 자리나 똑바로 지켜. 난 네 쉰내 나는 개밥그릇에 관심 없으니까.”
차갑게 쏘아붙인 시후가 구겨진 카라의 끝을 잡고 깔끔하게 폈다.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해진 재킷만큼이나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뒤를 돌았다. 복도를 걸어가는 시후의 뒷모습을 흉흉히 노려보던 창영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는 형은 잘나서 그런 급도 안 맞는 싸구려를 와이프랍시고 옆에 앉혔어?”
우뚝 걸음이 멈추었다. 돌아보는 시후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형수 말이야. 가진 건 반반한 얼굴하고, 뭐 몸매? 몸매 하난 죽여주던데.”
창영의 한쪽 입꼬리가 비죽 올라섰다.
“거기에 형이 넘어갔나?”
“…….”
“천하의 강시후가 여자 몸에 미치는 타입이었는지, 내가…….”
창영이 채 말을 잇기도 전에 시후의 주먹이 그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퍼억, 둔탁한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지고 창영의 몸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넌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 맞아야 입 닥치지.”
시후는 제 손목을 한 번 돌리며 거칠어진 숨을 뱉었다. 순식간에 험악해진 분위기와 함께 벌떡 일어난 창영이 시후에게 달려들었다.
“이 새끼가, 형이라고 불러줬더니……!”
또다시 이어진 둔탁한 소리와 함께 시후의 고개가 옆으로 거세게 돌아갔다. 입안이 터져 비릿한 혈향이 느껴지자 시후가 제 입술을 한번 쓸며 창영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뻗어진 길쭉한 다리가 창영의 복부를 퍽 걷어차자 저 멀리 날아간 체구가 벽에 거세게 부딪혔다. 그런 창영의 멱살을 한 손으로 움켜쥐어 제압한 시후는 그를 씹어먹을 것처럼 노려보았다.
“한마디만 더 해. 평생 불구로 살게 해줄 테니까.”
“…….”
“네가 뭘 하든 상관 안 해. 대신 함겨울은 건들지 마.”
일순 느껴진 흉흉한 살기에 겁먹은 창영의 숨이 덜컥 멈추었다. 다시금 제게 날아드는 주먹을 보고 그가 질끈 눈을 감은 찰나였다.
“그만 못해!”
찢어지는 듯한 고성이 날카로워진 공기를 갈랐다. 창영과 시후가 사라진 걸 눈치챈 서진이 게스트룸으로 왔다가 한 차례 벌어진 주먹다짐을 목격한 것이었다. 잰걸음으로 다가온 서진은 시후를 밀치며 창영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얘! 천박하게 뭔 짓거리야! 넌 애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놔야 속이 시원하겠니!”
“……어머니…….”
“하여간 제 어미 닮아서 성질머리만 더러워서는…….”
시후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불현듯 찢긴 심장이 욱신거렸다. 꽉 움켜쥔 주먹에 힘이 들어가자 손톱이 움푹 들어간 손바닥에서 빨갛게 생채기가 났다.
“지금 뭣들 하는 거야!!!”
시후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성호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뒷짐을 지고 나타난 그가 창영에게 다가와 그의 머리를 거세게 후려쳤다.
“아, 아버지…….”
“넌 형한테 주먹질이라니.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서는!”
이를 간 창영이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창영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찬 성호는 이내 날카로운 눈을 돌렸다.
“그리고 강시후, 너.”
칼날처럼 시퍼런 안광이 번뜩였다.
“내가 언제까지나 네 녀석을 봐줄 거로 생각하지 마라.”
“…….”
“난 언제든지 너와 네 회사, 그리고 네 와이프까지. 이 바닥에서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게 할 수 있어.”
시후의 동공이 거칠게 뒤흔들렸다. 마치 10년 전 그날을 연상시키는 협박이었다.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생각했으면 오산이야.”
“하…….”
헛숨을 터뜨린 시후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아버지는 정말 변함이 없으시네요.”
“꼬아서 듣는 건 너다. 가족끼리 식사 한 끼 하자는데 웬 소란을 일으켜.”
“제가 이 집의 가족이긴 합니까?”
“……뭐야?”
시후는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대로 뒤를 돌았다. 성큼성큼 복도를 지나 현관을 빠져나가는 시후의 등 뒤로 성호가 고함을 질렀다.
“이 자식이 아비가 말하는데! 너 거기 안 서!”
“그냥 둬요, 여보.”
서진이 성호를 말리며 고개 젓자 주름진 손이 더듬더듬 제 목덜미를 짚었다.
“당신도 잘한 거 없어! 뭐? 제 어미를 닮아?”
확 손을 치켜들자 서진과 창영이 동시에 움츠러들었다.
“아주 집안 꼴 잘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열 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으나 여전히 수많은 차량은 도로 위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그 정체 속에 막힌 시후는 붉은 신호등 빛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뜨끈하게 열 오른 눈가를 손으로 문지르자 음울했던 과거가 스멀스멀 떠올랐다. 시후의 친어머니와 정략결혼으로 이어졌었던 아버지는 시후가 기억에도 없던 시절부터 외도를 일삼았었다. 집 안에는 매일 고성이 오고 갔고, 어머니는 눈물 지었으며, 시후는 그 모습을 똑똑히 기억했었다. 그렇게 시후가 일곱 살 때였을까, 나날이 번창하던 외가 쪽 회사인 일성 디스플레이가 갑작스럽게 몰락을 맞았었다. 자재를 공급하던 납품업체가 갑자기 일방적으로 거래를 끊고 잠적을 한 탓이었다. 궁지에 몰린 일성 디스플레이는 결국 통째로 아버지의 회사인 KU그룹에 인수되었고. 외가는 모든 경영권을 뺏기고 얼마 가지 않아 모두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생을 달리했다. 어머니의 모든 지원군이 사라지자, 그때부터 아버지는 집안에 시후보다 두 살 어린 이복동생 창영을 데리고 들어왔고 머지않아 창영의 친모까지 불러들여 대놓고 외도를 저질렀다. 집안이 통째로 저당 잡힌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몸에는 피멍과 눈물 자국이 마를 새 없었다. 그때부터 죽은 듯 조용히 지내던 어머니는 결국…….
“…….”
시후의 초등학교 입학식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짙은 숨이 흘렀다. 그렇다. 지금껏 살면서 소중한 것을 수없이 많이 잃어왔다. 나약했던 여덟 살의 나는 어머니를 지킬 수 없었고……. 열아홉 살, 어렸던 나는 더욱 연약했던 겨울의 상처를 가만히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느덧 서른하나가 된 시후는 이제 예전처럼 무력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한 목숨 바쳐, 소중한 사람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 한편 집에 도착해 간단히 저녁을 먹은 겨울은 깊은 상념에 빠진 상태였다. 조금 전 역사 앞에서 만났던 남자의 정체에 대한 의문이 꼬리를 물고 늘어진 탓이었다.
“대체 그 사람은 누구지……?”
괴한이 했던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았던 겨울은 도무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강시후와 이혼해.’
그 기괴하게 변조된 목소리가 귓가에서 이명처럼 울렸다.
‘목숨이 아까우면 빨리 정리하는 게 좋을 거야.’
그건 명백한 경고…… 아니, 협박이었다. 예전에도 동생을 단속하라는 괴한의 말을 무시했다가 사고가 났었던 것을 떠올리자 기분이 너무도 찝찝했다.
“정체가 뭐냐고, 도대체…….”
누구길래 꼬박 1년 만에 다시 나타난 걸까. 그리고 이번엔 왜 강시후와 헤어지라고 하는 걸까.
“아, 모르겠어…….”
혼란이 가중되자 더 이상의 고뇌는 의미가 없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대충 예상하기로는 강시후와 척진 사람이거나, 그에게 원한을 갖고 있는 사람 같은데…….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역시 이건 강시후에게 털어놓고 함께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였다. 그가 집에 오면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있는지 묻기로 결심한 겨울은 일단 시후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설거지라도 하고 있기로 하고 겨울이 소파에서 일어난 찰나, 때마침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모르게 현관까지 마중을 간 겨울이 평소보다 배는 지쳐 보이는 시후와 마주했다.
“아…… 오늘 늦었네요?”
“응. 일이 많아서.”
“근데 얼굴은 왜 그래요?”
놀란 겨울의 눈이 커졌다. 늘 단정하던 입술이 터져 피가 배어난 자국이 선명했던 탓이었다.
“맞은 자국 같은데…… 누구랑 싸웠어요?”
“그냥…… 좀 일이 있었어.”
“무슨 일인데요?”
시후가 대답 대신 숨소리 같은 웃음을 흘렸다. 무언가 괴로운 일이 있었는지 그의 표정에는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더 이상 묻지 말아 달라는 뜻임을 단번에 읽은 겨울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기분도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어수선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시후에게 물었다.
“약상자는 어디 있어요?”
“저기 책꽂이 위에.”
거실 한쪽에 놓여 있는 커다란 책꽂이 위에 보이는 구급상자를 발견한 겨울이 다가갔다. 까치발을 세우고 손을 한껏 뻗었으나 끄트머리만 스칠 뿐 닫지 않아 낑낑거렸다. 그 순간 뒤에서 어둑하게 그림자가 지며 시후가 손쉽게 구급상자를 꺼내 내려주었다.
“…….”
살짝 놀란 겨울의 심장에서 쿵 소리가 났다. 별안간 뛰기 시작한 제 가슴에 당황한 겨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며 작게 헛기침했다.
“소파에 앉아 봐요. 치료부터 하게.”
그 말에 재킷을 벗은 시후가 소파에 느른하게 앉아 한 손으로 제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 하얀 와이셔츠로도 숨길 수 없는 우람한 근육들이 섬유 위로 용솟음치고 있었다. 찢어진 입술을 벌려 후, 숨을 내뱉는 모습이 묘하게 퇴폐적으로 보여 겨울의 입안이 바싹 말랐다. 양 볼에 오르는 열기를 가까스로 무시하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따끔할 거예요.”
시후의 옆에 가까이 앉은 겨울이 알코올 솜을 들어 그의 입술 위를 지그시 눌렀다. 동시에 훅 풍겨오는 성숙한 향기가 코끝에서 어른거렸다. 숨결이 섞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 긴장한 겨울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 연고 바를게요.”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면봉에 연고를 짠 겨울은 조심스럽게 시후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지그시 눌러 펴 바르는데, 허공을 바라보던 까만 동공이 느릿하게 움직여 겨울에게로 꽂혔다. 비스듬히 맞물린 시선이 강렬하게 부딪히자 놀란 겨울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는 굳게 닫힌 입술을 느슨하게 벌렸다.
“호 해줘.”
섹시하게 벌어진 입술은 상상도 못 한 발언을 내뱉었다.
“……뭐, 뭘 해요?”
“호.”
느닷없는 말에 당황한 겨울의 동공이 흔들렸다.
“……호?”
‘호’를 발음하느라 동그랗게 말린 입술을 귀엽게 바라보며 시후가 낮게 웃었다. 그 웃음에 괜히 창피해진 겨울이 얼굴을 핑크빛으로 붉히며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하지만 곧 제 뺨을 부드럽게 감싸 돌리는 커다란 손에 두 시선은 다시금 맞물릴 수밖에 없었다.
“어딜 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날 봐야지.”
빨려 들어갈 듯 깊고 짚은 눈동자가 겨울을 뚫어버릴 듯이 주시하고 있었다. 겨울이 떨리는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자, 살풋 힘없이 웃은 시후가 두 팔을 뻗어 겨울을 꽉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졸지에 커다란 품에 쏙 안긴 겨울은 어쩔 줄 모르고 동공만 이리저리 굴렸다.
“……왜 그래요, 진짜. 오늘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
“알았어요. 안 물어볼 테니까…….”
평소 같으면 바로 밀쳐냈을 텐데, 지금은 왠지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모습이 꼭 끝없는 장마 속에 갇힌 어린 소년 같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진 모르겠지만, 그에게도 저처럼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을 찾지 못한 겨울은 저도 모르게 떨리는 손을 올려 시후의 너른 등을 토닥거렸다. 그 순간 시후의 눈동자가 크게 뒤흔들렸다. 잠시 숨을 고른 시후가 느릿하게 떨어졌다. 비스듬히 고개를 틀며 겨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겨울아.”
설핏 웃은 시후가 겨울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뜨거운 숨이 느슨하게 뱉어지며 겨울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키스해도 돼?”
놀란 겨울의 눈이 커졌다.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겨울은 그저 시후를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느릿하게 뛰던 심장이 엄청난 속도로 뛰며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뭐라 대답을. 고민하는 찰나, 겨울의 손에 들린 면봉이 툭 아래로 떨어졌다. 그 경로를 따라 떨어진 심장이 거칠게 뒤흔들렸다. 시후가 낮은 숨을 뱉으며 밀려온 탓이었다. 커다란 손이 겨울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며 끌어당기자 겨울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이내 날렵한 턱선이 비스듬히 틀리며 뜨거운 입술이 부딪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