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푸른 장미의 습격2021.12.19.
“나는…… 서른아홉 살의 강시후야.”
……서른아홉 살? 서른한 살이 아니고?
“하…….”
황당함에 겨울이 헛숨을 터뜨렸다. 들고 있던 우산을 접어 바닥에 팍 내팽개쳤다. 따지듯이 다가가 턱을 치켜들고 날카롭게 소리쳤다.
“지금 나 놀려? 엿 먹이려고 작정한 거야?”
하다못해 이제는 날 괴롭히기 위해 미친 사람 연기라도 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겨울의 태도에도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가만히 겨울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동자가 뚫어져라 겨울을 응시하자 묘한 기류를 느낀 겨울이 미간을 좁혔다. ……뭐지? 왠지 어딘가 위화감이…….
“난 8년 뒤의 미래…….”
그의 목소리가 은밀하게 낮아졌다.
“그러니까, 2030년에서 왔어.”
“뭐?”
저 멀리서 날아온 쇳덩이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겨울의 입술이 망연하게 벌어졌다. 할 말을 잃은 겨울은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미간을 세차게 좁혔다.
“진짜 미쳤구나?”
“이리 가까이 와서 날 자세히 봐.”
“…….”
“조금 전 네가 집에서 봤던 강시후와 다르잖아.”
말없이 그를 노려보던 겨울이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섰다. 어두운 밤이었기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희미한 가로등 불빛을 받은 얼굴은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그냥 강시후였다.
“더 가까이 와.”
낮은 음성에 주춤한 겨울이 반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겨울의 손을 확 끌어당긴 그가 다리 기둥의 벽으로 그녀를 몰아붙였다. 탁, 하고 등으로 한기가 와닿고 놀란 겨울의 동공이 거칠게 뒤흔들렸다. 비스듬히 고개를 틀며 내려온 그가 겨울의 입술 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피하지 말고 똑바로 봐.”
숨결이 얽힐 것처럼 가까워진 거리와 함께 코끝에서 어른거리는 것은 묵직한 향수 냄새와 뒤섞인 낯선 담배 향이었다.
“…….”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껏 강시후에게서 담배 냄새를 맡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피우는 모습은 더더욱 볼 수 없었고, 전자담배나 그 흔한 라이터 또한 흔적조차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남자의 숨결에서 나는 진한 담배 향기…….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을 느끼며 겨울이 시선을 가파르게 들어 올렸다. 목이 뻐근할 정도로 꺾자 밤하늘보다도 더욱 까만 머리카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남은 한 올까지 전부 올린 머리 아래로 이마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그 아래로 흐른 시선이 날카로운 눈매에 맞닿았다. 뾰족한 눈꼬리와 검은 동공, 얇은 입술까지 이 남자는 분명히 강시후가 맞았다. 하지만……. 머리 모양이 확연히 달랐고, 느껴지는 분위기도 훨씬 난잡하고 거칠었다. 무엇보다도 집에서 봤던 강시후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눈가에 미세하게 드리운 주름이라던가, 조금 까칠해진 피부라던가…….
“거짓말…….”
하지만 겨울은 제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지금 나랑 장난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이 상황을 쉬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겨울이 세차게 소리쳤다. 깊게 숨을 몰아쉰 남자는 살짝 굽혔던 허리를 펴며 입고 있던 코트를 아무렇게나 벗어던졌다. 그 모습을 보는 겨울이 잔뜩 긴장한 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뭐지? 싸우자는 건가? 슈트 재킷까지 벗은 그는 하얀 셔츠 소매의 단추를 풀고 팔뚝까지 소매를 확 말아 올렸다.
“자, 이거 봐.”
놀란 겨울의 동공이 뒤흔들렸다. 차가운 공기 중으로 드러난 그의 오른팔에는 손부터 팔뚝까지 이어진 심각한 화상 흉터가 있었다.
“이건 몇 개월 뒤 일어날 예정인 사고로 다쳤던 상처야. 지금은 오래돼서 흉터로 남았고.”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강시후에게 저런 흉터 자국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보였던 그의 팔뚝은 힘줄이 도드라져 있을 뿐,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
“……말도 안 돼.”
혼란에 빠져든 겨울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목이 멘 겨울은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그 순간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전화가 세차게 진동했다. 더듬더듬 주머니 안으로 손을 밀어 넣은 겨울이 액정 위로 떠 오른 이름 세 글자를 확인했다. [강시후]
“…….”
숨이 덜컥 멈추었다. 고개 들어 눈앞의 남자를 한번 바라본 겨울은 다시 고개를 내려 액정 화면을 응시했다. 쿵. 쿵. 쿵. 심장 박동 소리는 점점 더 크기를 키우고, 겨울은 떨리는 엄지로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겨울아. 지금 어디야?
곧장 들려오는 것은 틀림없는 강시후의 목소리였다. 하마터면 휴대전화를 떨어뜨릴 뻔했던 겨울은 덜덜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 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걱정돼서 차 끌고 나왔어.
“…….”
-데리러 갈 테니까 어딘지 말만 해.
넋을 놓은 겨울은 가만히 서서 입술만 달싹였다.
‘……이 남자.’
정말 미래에서 온 강시후? 그렇게 생각이 닿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할 말을 잃고 주춤 뒷걸음질 치자, 벗었던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남자는 마스크와 선글라스, 모자를 다시금 착용했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까 일단 집으로 들어가고…….”
그는 바닥에 떨어진 우산을 주워 겨울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내일 밤 8시에 여기서 다시 만나.”
간결한 한마디를 남긴 그는 그대로 뒤를 돌아 빗속을 뚜벅뚜벅 걸어갔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겨울은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 다음 날, 평소처럼 출근한 겨울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정신이 팔린 상태였었다. 전날 일어났던 말도 안 되는 일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되풀이되었고, 오늘 8시에 만나자는 말이 수도 없이 맴돌았던 탓이었다. 그렇게 혼란 속에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어느덧 퇴근 시간이 되었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내일 뵐게요.”
복잡한 속을 부여잡고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인사한 겨울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클레르를 나섰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겨울은 핸드폰 액정에 떠오른 시간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8시면 지금 바로 가야 하는데…….”
꾹 움켜쥔 겨울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전날 만났던 남자가 정말 8년 뒤의 미래에서 온 강시후라면, 그는 대체 왜 나를 찾아와 자기 자신과 이혼하라고 말을 한 것인가? 물론 본인을 만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문제였다. 이렇게 혼자 고민하고 있어 봐야 답은 나오지 않았다. 정면 돌파하기로 한 겨울은 굳게 결심하고, 곧바로 전날 그와 만나기로 했던 장소로 이동했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깜깜해진 다리 밑으로 향하자, 저 멀리 기둥에 기대고 서 있는 거구를 발견했다. 살짝 긴장한 겨울이 천천히 다가가자 그의 얼굴이 이쪽을 향해 돌았다.
“왔어?”
바닥을 긁는 듯이 낮은 음성이 귓가로 들려왔다. 겨울은 뻣뻣하게 굳은 다리를 움직여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길쭉한 손가락이 선글라스를 벗자 어둠 속 까만 눈동자와 일순 마주쳤다.
“……할 말이 뭐예요?”
경계심을 품은 겨울이 뾰족하게 묻자 날렵한 눈매가 가늘게 길어졌다.
“글쎄.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까…….”
스스로를 미래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강시후는 흐른 세월만큼이나 목소리도 매우 거칠어 있었다. 대체 8년간 어떤 삶을 살았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서른아홉의 강시후가 풍기는 퇴폐한 기운에 비하면 지금의 강시후는 곱상한 축에 속할 정도였다.
“일단, 난 너한테 한 가지 부탁을 하기 위해 찾아왔어.”
“……무슨 부탁을…….”
겨울이 뒷말을 흐리자 그는 굵직한 목을 뒤로 한번 꺾었다가 원위치시켰다.
“8년 뒤, 그러니까 2030년에 우리는 이혼하게 돼.”
“……네?”
움찔한 겨울의 호흡이 멈추었다.
“네에에?!”
화들짝 놀라 큰 소리로 되물었다. 동요가 인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지금부터 앞으로 8년이나 우리가 부부로 살았다는 거예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겨울의 입이 떡 벌어졌다. 따지듯이 시후의 코트를 움켜쥐자 그가 뒤로 몸을 빼며 말을 이었다.
“그래……. 네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지?”
“…….”
“우린 이혼하기 전까지 무려 8년을 서로 볼꼴 못 볼 꼴 다 보며 수도 없이 싸웠어. 서로 온갖 생고생을 다 했지.”
“……허.”
겨울이 황당함에 헛숨을 터뜨렸다.
‘대체 내가 왜……?’
이해할 수 없었다. 8년 뒤라면 겨울 역시 서른일곱이나 먹었을 터였다. 그 나이 먹도록 왜 강시후와 계속 부대끼고 살았던 건지,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너한테 부탁하고자 하는 게 뭔지 알겠어?”
“……설마…….”
“우린 진작에 이혼했어야 했어.”
그가 씹듯이 뱉으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질질 끌다 보니 30대 젊은 시절 다 지나고, 어느덧 마흔이 코앞이야.”
“…….”
“다 늙어서 이혼하게 되니 후회만 남았지. 그래서 비싼 돈 주고 아직 상용화도 안 된 타임머신을 이용해 찾아왔고.”
겨울은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이야기들에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그러니까 너도 네 인생 망치고 싶지 않으면, 하루빨리 나와 이혼하는 게 좋을 거야.”
“그…… 그렇지만.”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겨울이 소리쳤다.
“나는 이미 이혼하자고 말했어요! 세 달의 시간을 달라면서 구질구질하게 매달린 건 그쪽이잖아요!”
“과거의 내가 콩깍지가 씌었던 거지. 잠시 미쳤던 거야.”
“뭐라고요?”
그 말에 겨울이 쌍심지를 켜고 이를 갈았다.
“지금 말 다 했어요?”
“아니. 다 안 했어.”
단호한 기세에 움찔한 겨울이 주춤했다.
“난 너하고 무려 9년간 부부로 사느라 스트레스로 화병까지 올뻔했어. 알아? 좋은 시절 다 지나고 이제 내일모레 마흔이라고.”
“…….”
“어디 나뿐이야? 너도 나하고 살아봐야 좋을 거 하나 없어.”
당황한 겨울이 어깨를 움츠리고 눈을 끔뻑거렸다.
“8년 뒤, 너도 스트레스성 폭식 때문에 살찌고, 탈모에 주름도 자글자글해지니.”
“……뭐, 뭐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있어.”
황당함에 헛숨을 터뜨린 겨울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벙긋거렸다. 미친놈인가, 이 사람 진짜?!
“그러니까 빨리 이혼해서 각자 갈 길 가자고. 어?”
“…….”
“너도 스물아홉이면 새 시작하기 나쁘지 않은 나이잖아.”
어두운 동공은 꼭 경고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달려오는 트럭에 정면으로 부딪친 것처럼 겨울의 머리는 충격으로 욱신욱신했다.
“잘 생각해 봐. 어차피 답은 하나야.”
넋을 놓고 있는 겨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강시후는 겨울을 지나쳐 유유히 사라졌다. 오늘도 역시, 그가 사라질 때까지 겨울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창백하게 낯빛이 질린 겨울은 조금 전 그 남자가 말하는 말을 전부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가령 내가 스트레스성 폭식으로 살이 찐다던가, 탈모가 온다거나, 주름이 자글자글해진다던가. 하지만……. 한 가지 결심은 확연히 섰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강시후와 최대한 빨리……!
“이혼할 거야, 죽어도!”
혼란스러운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도착한 겨울은 전쟁에 나가기 직전의 장군처럼 비장한 얼굴로 현관문을 노려보았다. 지금 시간은 아홉 시, 이제 곧 강시후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올 시간이었다. 그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이혼하자고 선언할 생각으로 겨울은 굳게 닫혀 있는 문을 흉흉하게 노려보았다. 그렇게 옴짝달싹도 안 하고 현관 쪽을 쏘아보며 버티기를 약 한 시간.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용수철처럼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겨울은 현관으로 뛰어갔다.
“……저기, 할 말이……!”
겨울은 뒷말을 채 이을 수 없었다.
“있…….”
여린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눈앞을 한가득 메운 푸른 장미 꽃다발 때문이었다. 풍성하고 화려한 크기에 놀라 두 눈을 깜빡거리자 웃음기 어린 음성이 귓가를 적셨다.
“마중 나온 거야?”
흠칫 놀라 고개를 드니 환하게 웃고 있는 시후의 얼굴이 들어찼다.
“보고 싶었어, 겨울아.”
달콤하게 속삭인 그는 장미 꽃다발을 겨울의 품에 한 아름 안겨주었다. 향긋한 장미의 향기가 코끝에서 어른거리자 겨울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