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남편에게 이혼당하기 프로젝트2021.12.22.
커다란 푸른 장미 꽃다발을 안아 든 겨울의 표정이 멍하니 백지가 되었다. 향긋한 장미의 향기가 코끝에서 어른거리자 겨울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게…… 뭐예요?”
“오다가 꽃집을 발견했는데, 네 생각이 나서 샀어.”
유유히 웃은 시후가 낮게 속삭였다.
“네가 이렇게 마중 나와준 건 처음인 것 같은데.”
“…….”
“기뻐, 정말로.”
그렇게 말하는 시후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끈적끈적한 눈빛에 꼬르륵 잠긴 겨울은 속으로 더없이 절망할 뿐이었다. 이 앞에 대고 이혼을 외칠 만큼 겨울은 잔인하지 못했다. 입술을 꾹 다문 겨울은 들고 있던 꽃다발을 망연하게 내려다보았다.
“물론 꽃보다는…….”
시후의 숨결 같은 웃음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네가 더 아름다워.”
……푸른 장미에 꽃말이 있다면, 그건 틀림없이 절망일 것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 침대에 걸터앉은 겨울은 화병에 다소곳하게 꽂아 둔 푸른 장미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저 어여쁜 장미에는 죄가 없었으니 얌전하게 꽂아놓기는 하였지만, 꽃에 시선이 닿을 때마다 푹푹 나오는 한숨은 겨울이 제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 벌러덩 눕자 조금 전 미래에서 온 강시후의 말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과거의 내가 콩깍지가 씌었던 거지. 잠시 미쳤던 거야.’
……그래. 미친 건 확실하다.
“하아…….”
또다시 한숨을 내쉰 겨울이 심각하게 고뇌하기 시작했다. 웬만하면 소송까지 가지 않고 협의 이혼을 하고 싶은데, 지금 시후는 절대 순순히 이혼해줄 것 같지 않았다. 물론 세 달 뒤면 깔끔하게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준다고 하기는 했지만, 그때 가서 그의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는 터.
“역시 이건…….”
강시후에게 차이는 그림이 가장 이상적일 것 같았다. 일단 정떨어지는 행동을 하든 해서. 저놈 자식의 눈에 씐 콩깍지라는 것부터 벗겨내야 할 것 같은데……. 가늘게 뜬 눈으로 고뇌하던 겨울은 한 가지 큰 결심을 했다. *** 다음 날, 비장하게 의지를 다진 겨울은 미래에서 왔다는 서른아홉의 강시후와 다시금 카페에서 조우했다.
“그래서 생각은 좀 해봤어?”
여전히 마스크와 선글라스, 모자로 얼굴을 꽁꽁 가리고 있는 그는 느슨하게 팔짱을 꼈다.
“네. 생각해봤는데…….”
겨울이 작게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이혼할 거예요, 무조건. 다만 강시후가 날 차도록 유도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백날 말해봐야 2022년의 강시후는 나와 이혼할 생각이 없으니까.”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좋은 수가 있어?”
“온갖 정떨어지는 짓을 해야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글쎄. 그 시절 나한테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비스듬히 고개를 튼 시후가 불길한 소리를 중얼거렸다. 초 치지 말라는 듯 단호하게 손으로 엑스를 만든 겨울이 턱을 치켜들었다.
“아니요! 내 철저한 분석력과 계획이라면 틀림없이 차일 수 있을 거예요. 일단 그 전에, 내 계획이 성사되려면 그쪽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해요.”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쉬워요.”
겨울은 어깨를 으쓱한 뒤 핸드백 안에서 작은 노트를 꺼내 들었다. 순식간에 공부 모드로 바뀐 눈빛과 함께 겨울은 펜촉을 꾹 눌렀다.
“싫어하는 걸 전부 말해봐요.”
한때 의대 진학을 노렸던 모범생이었던 만큼 펜을 쥔 모습이 범상치 않았다.
“가령 어떤 타입의 여자가 싫은지, 어떤 습관이나 행동이 싫은지.”
“나?”
슬며시 미간을 좁힌 시후가 제 턱을 쓸며 곰곰이 생각했다.
“글쎄…….”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다 말해요.”
“음. 일단 들러붙고 매달리는 사람, 말 많고 수다스러운 사람…….”
빠르게 움직이는 펜촉은 그의 말을 단 한마디도 놓칠 수 없다는 듯 꼬박 필기해 내려갔다.
“날 귀찮게 하는 건 딱 질색이고, 질척거리는 것도 싫어.”
“또?”
“아, 편식하는 사람도 싫어해. 밥상 앞에서 깨작거리거나 게걸스럽게 먹는 것도 싫어하고. 주변 정리 못 하고 더럽게 생활하는 사람도 사절이야. 잘 안 씻는 사람도 싫어해. 향수 냄새 진하게 나는 것도 안 좋아하고.”
“누가 강시후 아니랄까 봐, 싫어하는 거 한번 더럽게 많으시네요.”
겨울이 자그마한 소리로 뒷말을 덧붙였다.
“자기는 뭐 얼마나 잘났다고.”
“뭐?”
“아니에요. 어쨌든…….”
빼곡하게 적힌 노트를 탁 소리 나도록 덮은 겨울이 자신만만하게 눈웃음 지었다.
“손자병법에도 나와 있죠. 지피지기 백전불태.”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타겟의 취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든 겨울이 시후를 향해 비스듬히 겨누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한테 정떨어지게 할 거니까.”
빵! 이른바, 최단기간 남편에게 이혼당하기 프로젝트! *** 토요일 아침, 겨울은 일어나자마자 화장실로 향해 거울을 바라보았다. 아침이라 퉁퉁 부은 얼굴에 눈곱까지 껴서 더없이 흉한 얼굴이었다. 안 그래도 산발이 되어 있는 머리를 손으로 더욱 헝클어뜨리자 흡사 거지의 몰골을 한 자신이 눈앞에 보였다.
“그래, 함겨울. 할 수 있다!”
남편에게 이혼당하기 프로젝트, 1단계! 주먹을 불끈 쥔 겨울은 창피함을 무릅쓰고 비장하게 화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다이닝룸에서 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서 아침 먹어, 겨울아.”
세상 다정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외면하며 겨울은 입이 찢어지라 하품하는 척을 했다.
“졸려?”
머리를 벅벅 긁으며 가까이 다가가자 시후가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폭탄이라도 맞은 듯 산발이 된 겨울의 머리를 천천히 손으로 빗겨주며 시후가 속삭였다.
“피곤한 것 같은데 클레르까지 데려다줄까?”
“……아니요. 괜찮아요.”
이미 이 정도로는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예측하였다. 동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은 겨울은 한쪽 무릎을 접어 의자에 발을 척 올렸다. 등을 구부정하게 굽히고 거북목을 하니 완벽하게 날짐승의 자세가 완성되었다. 그런 겨울을 가만히 응시하던 시후가 픽 웃음을 흘렸다.
‘……저 웃음의 의미는 뭐지?’
왠지 불길했으나 가까스로 무시하고 숟가락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그래, 맛있게 먹어.”
얼굴에 철판을 깐 겨울은 그대로 숟가락을 밥그릇에 콰악 꼬라박았다. 곧이어 급발진하듯이 쌀밥을 와구와구 입안에 게걸스럽게 밀어 넣었다. 젓가락 사용하는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반찬도 숟가락으로 푹푹 퍼서 입 안에 넣고 있는 힘껏 쩝쩝거렸다. 그야말로 걸신들린 사람처럼 미친 듯이 흡입하는데, 문득 저를 바라보는 시후와 눈이 마주쳤다.
“왜요?”
아직 수저도 들지 않은 시후는 그저 말없이 겨울을 빤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진득한 시선에 수치심이 몰려오고, 겨울은 얼굴이 화끈거렸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며 음식물이 든 입을 쩍쩍 벌렸다.
“안 먹어요? 그럼 나 줘요. 내가 먹을게.”
솔직한 심정으로 너무 급하게 먹어 토할 것 같았으나 꾹 참고 시후의 밥그릇을 빼앗아 가져왔다. 아예 접시를 입에 대고 와르르 붓자 안 그래도 작은 구강구조에 쌀알이 빵빵하게 차올랐다.
“맛있어?”
시후는 토끼처럼 부풀어 오른 겨울의 볼을 보며 나직하게 웃었다.
“천천히 먹어, 체하겠다.”
자상하게 속삭이며 물을 떠다 주는 모습에 겨울의 눈꺼풀이 하릴없이 나풀거렸다. 일순 상실한 전의와 함께 꿀꺽, 쌀알이 목구멍 안으로 넘어가자 시후의 길쭉한 손가락이 겨울의 입술 위를 쓸었다.
“귀엽기는…….”
입술에 붙은 밥풀을 엄지로 떼어낸 시후가 전혀 더럽지 않다는 듯 새빨간 혀끝으로 손가락을 할짝 핥았다.
그 야릇한 모습에 겨울의 양 볼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확 고개 돌린 겨울이 제 입술을 깨물며 탄식했다. 이래서야 1단계는 완벽한 겨울의 패배였다.
“참. 내일 시간 괜찮아?”
“……내일이요?”
“일요일이잖아, 너 오프기도 하고.”
시후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데이트하자. 맛있는 거 사줄게.”
자연스러운 데이트 신청에 잠시 고민하던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강시후가 제게 정떨어지게 할 절호의 기회였다. *** 대망의 일요일, 겨울은 평소에 하얗게 둥둥 떠서 쓰지 않던 파운데이션을 꺼내 덕지덕지 피부 위로 올렸다. 달걀귀신처럼 새하얗게 화장한 뒤, 어제 퇴근길에 사 온 하늘색 아이섀도를 멍이 든 사람처럼 잔뜩 펴 발랐다. 아이라인은 관자놀이에 가깝게 그리고, 입술은 새빨갛게 오버립으로 꾸역꾸역 발랐다. 거울 속 자신을 노려보는 겨울의 표정이 다시금 전장에 나가기 전 장군의 모습처럼 진지해졌다.
“그래, 이 정도면 준비는 완벽해.”
남편에게 이혼당하기 프로젝트, 2단계!
“내가 오늘 화장이 좀 과하죠?”
이미 준비를 마치고 겨울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시후는 겨울의 몰골에 살짝 놀란 기색이었다. 그러나 잠시 커졌던 시후의 눈은 이내 반달처럼 곱게 접혔다.
“아니.”
“…….”
“넌 뭘 해도 예뻐.”
……하여간 짜증 나는 남자. 함께 차를 타고 예약한 레스토랑에 도착한 겨울과 시후는 홀 직원의 안내를 받고 루프탑에 위치한 좌석에 앉았다. 아무렇게나 시키라는 겨울의 말에 시후는 능숙하게 주문을 이어갔고, 간단히 곁들일 와인 한 병을 시켰다.
“네, 그렇게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웬만한 뮤지컬배우의 화장보다도 더욱 진한 겨울의 화장을 본 직원은 놀란 듯 살짝 움찔했다. 그 반응에 겨울은 창피함에 얼굴이 붉어지는 기분이었으나, 오늘만큼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진상을 연기하기로 했다. 직원이 돌아가고 단둘이 되자 겨울은 흘끗 시후를 바라본 뒤 곧바로 제 어깨를 마구 털었다.
“아오 씨, 이게 뭐야! 웬 가을에 모기 새끼가 있나!”
육두문자를 걸쭉하게 내뱉으며 목을 마구 벅벅 긁자 시후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이제 곧 11월인데 아직도 모기가 있어? 괜히 루프탑으로 왔나. 안으로 들어갈래?”
“…….”
제발 다정하게 말하지 말란 말이다, 이 정신 나간 인간아! 할 말을 잃은 겨울이 말없이 뚱하게 있자 시후의 단정한 입술이 길게 늘어졌다.
“그런데…….”
턱을 괸 그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읊조렸다.
“넌 욕 하는 것도 섹시하네.”
……정말 욕이 나올 것 같았다. 물론 겨울의 사전에 포기란 없었다. 각오한 만큼 오늘은 겨울에게 필승 전략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녀노소 누구나 싫어하는 게 행패인데, 오늘은 진상 그 자체가 되어 온갖 패악을 부려보기로 했다.
“흡…….”
안심 스테이크가 식탁에 오르자마자 겨울은 눈물을 글썽이는 척을 하며 제 입을 틀어막았다.
“왜 그래?”
“아니…… 사실 그게.”
자, 함겨울. 할 수 있어! 수치심은 한때일 뿐이야!
“갑자기 이 소의 끔찍하고 잔혹한 죽음이 눈앞에 떠올라서요.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 동물인지 새삼…….”
“비건이었어? 언제부터?”
시후의 물음에 겨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저번 주에도 같이 스테이크 먹었잖아.”
……아. 거짓말도 앞뒤가 맞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