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남편에게 이혼당하기 프로젝트 (2)2021.12.26.
“비건이었어? 언제부터?”
시후의 물음에 겨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거짓말도 앞뒤가 맞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아차 했다.
“저번 주에도 같이 스테이크 먹었잖아.”
“음, 그게…….”
커다란 동공이 부자연스럽게 굴렀다. 변명을 생각해낸 겨울이 자연스럽게 입술을 벌렸다.
“비건은 아닌데, 그, 제 MBTI가 INFP라서…….”
“MBTI?”
“네. 제 성격이 워낙 예민하고 약간 감성적이라서, 가끔 이래요.”
횡설수설 아무 말이나 하며 하하, 소리 내서 웃은 겨울이 순간 정색하며 그릇을 쭉 밀었다.
“어쨌든 이건 토할 것 같으니까 치워줘요.”
“그래, 알겠어.”
이쯤 되면 짜증 날 법도 한데, 그는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차분하게 직원을 호출한 시후는 스테이크 접시를 치워달라고 요청하며 샐러드파스타를 하나 추가 주문했다. 머지않아 채소가 잔뜩 올라간 샐러드파스타가 서빙되고, 포크를 집어 든 겨울은 아무 생각 없이 먹으려다가 일순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편식하는 사람도 싫어한댔지? 이왕 부릴 패악이라면 끝까지 미친 척 몰아붙이자는 심정으로 굳게 결의를 다졌다. 이윽고 포크를 접시 위에 깨작깨작 움직이며 먹는 둥 마는 둥 하자, 이상한 기류를 눈치챈 시후가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왜 그래. 맛없어?”
“아니요……. 그냥, 원래 제가 채소를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비건인데 채소를 싫어한다고? 고기도 싫어하고?”
“비건 아니라니까요? INFP에요.”
“아, 그래. INFP.”
“고기도 싫어하지는 않아요. 그날 날씨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뿐이죠.”
“고기와 날씨가 무슨 연관성이……?”
“관계 있죠, 당연히! 비 오면 무릎 아픈 거 몰라요?”
이제는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를 정도였다. 그저 혓바닥이 빨간 구두처럼 제멋대로 춤추도록 내버려 둘 뿐이었다.
“그런 느낌으로 나도 날씨가 맑으면 고기가 싫어졌다가 좋아졌다가 하는 거라고요.”
자. 어때, 강시후? 이 정도면 너도 내가 아주 징글징글할 거야. 끔찍하지 지금? 세상 미친년과 겸상한 기분이지?
“아, 근데 생각해 보니까…….”
근데 끝이 아니야. 여기서 딱 1퍼센트 죽고 싶지 않을 만큼만 더 괴롭게 해줄게.
“아까 그 스테이크 맛있어 보이긴 했는데, 역시 그냥 그거 다시 먹을래요.”
말하면서도 스스로가 밉상 중의 밉상, 개진상처럼 느껴졌다.
“그래?”
그러나 유일하게 그녀를 진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남자가 여기에.
“내 거 먹을래? 바꾸자.”
세상 상냥하게 웃은 시후가 웃으며 자신의 스테이크 접시와 겨울의 샐러드파스타 접시를 바꾸어주었다. 여전히 타격이라고는 조금도 입지 않은 얼굴로 싱긋 웃는 입매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더 얄미운지……. 포크를 쥔 겨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자기가 언제부터 천사표였다고…….’
새삼 과거 못돼 먹은 주둥이의 소유자 강시후와 지금 마더 테레사의 환생 같은 강시후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에 소름이 돋아났다.
‘진짜 짜증 나, 강시후!’
이러나저러나, 수치심을 이기고 강행한 작전이 전혀 통하지 않자 겨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열 오른 속을 식히기 위해 무작정 컵을 집어 든 겨울은 가득 담겨 있던 물을 전부 비워냈다. 도저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무릎에 힘을 준 겨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시후는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이 자리를 비키자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있던 시후가 느슨하게 턱을 괴었다. 한쪽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 톡, 두드리다가 마른 목을 레드 와인으로 적셨다. 촉촉하게 젖은 굳게 다물린 입술로 살포시 웃음이 터졌다. 이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린 시후가 고개를 비틀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귀엽네…….”
겨울의 속셈은 이미 전부 다 읽힌 후였다.
“그래 봐야 절대 안 놔주지.”
어린 시절, 겨울과 시후는 원수가 되기 전, 절친한 친구기도 했지만……. 서로 양보하지 않는 승부욕 때문에 쟁쟁한 경쟁상대기도 했다.
*** 비록 2점이나 허망하게 내주었지만, 여기서 단념하고 멈출 수는 없었다. 겨울은 무려 5단계까지 구성된 이혼당하기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남편에게 이혼당하기 프로젝트, 3단계! 작전명, 세상 귀찮고 짜증 나게 질척거리기! 월요일 아침, 클레르 스파에 출근해 유니폼으로 갈아입자마자 무작정 휴대전화를 움켜쥔 겨울은 시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웬일이야? 일하는 시간에 전화를 다 하고.
“지금 뭐 해요?”
-일하지. 너는?
“나도 일해야죠, 이제.”
-그래.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해.
“네. 그럼 끊어요.”
한차례 의미 없는 대화 끝에 통화는 뚝 끊어졌다. 휴대전화를 캐비닛 안으로 밀어 넣은 겨울은 오늘의 첫 번째 예약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테라피스트 함겨울이었습니다.”
60분 타임으로 예약한 첫 번째 고객이 떠나고, 빠르게 직원 대기실로 달려온 겨울은 깊숙이 박아두었던 휴대전화부터 찾았다. 곧장 최근 통화기록의 강시후를 찾아 버튼을 꾸욱 눌렀다.
-여보세요?
“네. 여보세요.”
-무슨 일이야?
“그냥요. 지금 뭐 하는지 궁금해서요.”
-음……. 일하지? 이제 회의 가려고.
“그래요. 회의 잘해요.”
-응, 너도.
“난 두 번째 예약 손님 받으러 가야 해서 끊을게요.”
-그래. 힘내.
뚝 끊어진 전화와 함께 겨울의 입가에 악마의 미소가 띠어졌다. 귀찮지? 슬슬 짜증 나지? 근데 어쩌니. 끝이 아닌데.
“여보세요?”
약 90분이 지난 뒤 또 시후에게 전화를 건 겨울이 태연한 목소리로 내었다.
-응, 겨울아.
“네, 지금 뭐하…….”
-지금 일하고 있고, 홍보대행사 미팅 가는 중이야.
이번에는 정말 바쁜 와중인지 목소리가 조금 다급하게 들려왔다.
-미안. 지금 좀 바빠서 이따가 연락할게.
수화기 너머로도 느껴지는 초조함에 겨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때. 짜증 나지? 미치겠지? 이혼하고 싶지?!
-사랑해.
뚝.
“…….”
충격적인 한마디가 귓가를 울리고, 겨울은 넋이 나간 얼굴로 망연하게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진짜 미친놈인가?”
대체 왜 사랑한다는 거야, 왜! 이 정도까지 했는데 왜!!! 답답해서 숨이 다 넘어갈 지경이었다. 으스러지듯 입술을 깨문 겨울은 캐비닛 안에 넣어두었던 수첩을 꺼냈다. 귀찮게 하는 것도 실패, 편식하는 것도 실패, 더러운 것도, 깨작거리는 것도 게걸스럽게 먹는 것도 전부 꽝……. 그가 싫어한다고 말했던 수많은 것 중, 이제 남은 것은 수다스러운 사람과 향수 냄새 진하게 나는 사람 둘이었다. 설마설마 4단계까지 올 줄은 몰랐으나, 여기까지 온 거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시 한번 굳게 마음을 다진 겨울은 평소에는 뿌리지도 않는 향수로 샤워를 하듯 온몸에 마구 펌프질해댔다. 토할 것 같았지만 정신력으로 버티고서 시후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왔어요?”
“응. 근데 집에서 향수 냄새가 좀 심하게 나는데…….”
후각이 예민한 편인 시후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코를 찌를 듯한 향수 냄새에 한쪽 눈을 찡그렸다.
“무슨 냄새요? 난 안 나는데?”
“그래?”
무지막지한 향기의 발원지가 겨울이란 것을 깨달은 시후가 픽 웃음을 흘렸다.
“내가 잘못 맡았나 봐.”
놀랍게도 그게 끝이었다. 시후는 더 이상의 불평을 표하지 않고 한 손으로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수다스러운 사람을 싫어한댔지…….’
겨울은 제 혓바닥을 살짝 깨물며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저 있잖아요.”
“응.”
크게 심호흡하며 준비한 겨울은 이내 산탄총이라도 쏘아내듯이 혀를 아무렇게나 놀렸다.
“제가 오늘 새로운 고객을 받았는데요. 제우기획 알죠? 거기 기획팀 팀장이래요. 남편도 같은 회사 기획본부장이라고 하는데, 이름은 홍예술이라던데요? 되게 특이하죠? 나보다 나이도 많은데, 진짜 날씬하고 귀여우시더라고요. 심지어 딸도 있다던데요. 그 이름이 뭐더라…… 홍차인가 홍주인가.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음, 그게…….”
“계속 말해봐. 재밌네.”
그렇게 말하며 내려다보는 입꼬리에 걸린 장난스러운 미소. 차마 저 웃음 앞에서 더는 할 말이 없다.
“그냥, 그렇다고요.”
씩 올라가는 시후의 입꼬리에 단정한 보조개가 잡혔다. 낮게 웃음을 흘린 시후가 재킷을 벗고 셔츠 단추를 하나 풀었다.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
“네?”
“오늘 아침에는 데이앤데이 태국 런칭 현황 보고 받으며 회의했고, 이번에 새로 출시한 게임 히어로 체이스가 내일모레 정식 출시 예정이라 최종 점검도 했어. 그리고 점심은 프로그램 파트 총괄팀장인 신재환하고 비빔밥 먹었고, 곧바로 우리 홍보대행사인 인벤티 사람들하고 히어로 체이스 마케팅 일정 관련해서 미팅했고, 또다시 회사 돌아와서 서버팀 직원들과 회의한 다음 밀린 건들 전부 결재하고 저녁은 대충 샌드위치 먹고 집으로 돌아왔어.”
“…….”
“질문은?”
참, 사람을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없어요.”
“그래.”
픽 웃음을 흘린 시후가 와이셔츠 단추를 단숨에 풀어 내렸다. 놀란 겨울이 뒤를 돌 틈도 없이 벗겨진 셔츠 틈으로 우람한 근육들이 공기 중으로 드러났다. 굵직한 목부터 깊게 팬 쇄골, 떡 벌어진 어깨, 탄탄한 가슴 근육과 선명하게 쪼개진 복근……. 저도 모르게 휘둥그레 뜬 눈으로 그의 상체를 바라보던 겨울의 입술이 툭 벌어졌다.
“으악, 갑자기 옷을 왜 벗어요!”
화들짝한 겨울은 한 박자 늦게 반응하며 두 손으로 눈을 확 감추었다.
“집에 돌아왔으니까 갈아입으려고 벗은 것뿐이야. 안방까지 따라 들어온 건 너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
할 말이 없어 입술만 삐쭉거리는데, 손틈 사이로 시후의 근육이 자꾸만 시선을 강탈했다. 조각 같은 반나체는 본능적으로 눈길을 끌어당겼고, 겨울은 저도 모르게 입안에 고인 마른침을 삼켰다.
“뭘 그렇게 봐? 눈 빠지겠다.”
흠칫한 겨울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왜, 아래도 보여줄까?”
“뭐, 무무무슨 헛소리를……! 됐거든요!”
창피해진 겨울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씩씩거리며 뒤를 돌았다. 방문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데, 문득 등 뒤에서 장난기 어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발끈한 겨울이 이를 갈며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가 멈칫했다.
“왜 그래?”
“아……. 아니요. 아무것도…….”
놀란 겨울은 어수선하게 말을 돌리며 방 밖으로 나와 문을 꼭 닫았다. 천천히 걸어 소파에 앉은 겨울은 잠시 상념에 잠겼다.
‘……그 흉터는 뭐지?’
조금 전 봤던 시후의 뒷모습을 떠올린 겨울의 미간에 실금이 그어졌다. 그가 셔츠를 벗고 뒤를 돌았을 때, 짤 짜여진 등 근육 위로는 화상의 잔해로 보이는 심각한 흉터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듯한.
‘어쩌다가 생긴 흉터지? 크기가 엄청 큰데…….’
겨울이 막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까지는 시후와 가끔 수영장을 함께 갔었는데, 그때만 해도 저런 흉터는 없었다. 왜인지 몰려오는 찝찝한 기분과 함께 겨울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12년 전, 겨울이 갇힌 창고에서 발생했던 화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