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작전명, 집 나간 와이프2021.12.29.
‘어쩌다가 생긴 흉터지? 크기가 엄청 큰데…….’
조금 전 봤던 시후의 뒷모습을 떠올린 겨울의 미간에 실금이 그어졌다. 그가 셔츠를 벗고 뒤를 돌았을 때, 짤 짜여진 등 근육 위로는 화상의 잔해로 보이는 심각한 흉터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듯한. 겨울이 막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까지는 시후와 가끔 수영장을 함께 갔었는데, 그때만 해도 저런 흉터는 없었다. 왜인지 몰려오는 찝찝한 기분과 함께 겨울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12년 전, 겨울이 갇힌 창고에서 발생했던 화재였다.
‘한 남학생이 불길을 뚫고 환자분을 구조했어요. 구급대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면 이렇게 무사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누군가에게 구조된 뒤, 겨울이 응급실에서 의식을 찾았을 때. 의사는 겨울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 학생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그 학생, 등 쪽에 화상도 심하게 입었고요.’
그때 겨울은 자신을 살려줬다는 남학생이 누구냐고 의사와 경찰에게 여러 번 물었으나, 매번 구해준 사람이 본인의 정체를 비밀로 하길 원한다는 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설마.”
조금 전 시후의 등에 명확하게 자리하고 있던 커다란 화상자국을 떠올린 겨울의 미간이 슬며시 좁아졌다.
“……그럴 리가 없잖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거야. 고개를 저은 겨울은 터무니없는 추측이라고 생각하며 의혹을 털어버렸다.
‘그보다…….’
하, 깊은 한숨이 뒤를 이었다. 귀찮게도 해보았고, 수다스러운 척도 해보았고, 더러운 짓도 했으며, 온갖 행패와 추잡스러운 짓은 남김없이 다 했다. 그래, 이 정도면 콩깍지가 씐 게 아니라 일부러 괴롭히려고 놓아주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헤어나올 수 없는 지독한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은 겨울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근데, 잠깐.”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던 겨울이 우뚝 멈추었다. 생각해보니 그 미래에서 왔다는 강시후……. 왜 자기 자신한테 찾아가지 않고 나한테 찾아와서 난리인 거야?! *** 도저히 의문을 지울 수 없었던 겨울은 미래에서 왔다는 강시후가 임시로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갔다. 똑똑, 굳게 닫힌 호텔 문을 두드리는 겨울은 약간 화가 치밀어 오른 상태였다. 왜 자기 자신이 아니라 굳이 나한테 찾아와서 닦달인 건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누구세요.”
이 와중에 음성 변조기에 대고 말을 하는 철저함에 혀를 내둘렀다.
“나예요. 열어요.”
겨울이 쏘아붙이듯 말하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는 문 사이로 눈만 빼꼼 내밀고 겨울을 내려다보았다.
“왜. 뭐 물어볼 거 있어?”
“일단 안에 들어가서 얘기해요.”
마구잡이로 문을 잡아당기고 안으로 들어가자 시후가 당황한 듯 뒷걸음질 쳤다.
“야, 잠깐…….”
“잠깐은 무슨 잠깐!”
매서운 기세로 쿵쾅거리며 들어온 겨울은 확 고개를 치켜들었다가 멈칫했다. 늘 야심한 밤의 다리 밑 같은 어두운 곳에서 만나거나, 얼굴을 꽁꽁 감춘 채로 만났었던 탓에 이렇게 밝은 호텔의 조명 아래에서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더욱이 그는 옷을 갈아입고 있던 도중이었는지 바지만 입고 있었는데, 훤히 드러난 상체에 겨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젯밤 봤던 서른한 살 강시후의 반나체에 이어 본의 아니게 보고 말아버린 서른아홉 살 강시후의 몸에 놀란 겨울이 확 뒤를 돌았다.
“내가 잠깐 기다리라고 했잖아. 하여간 성질만 급해서는…….”
그는 옆에 놓인 가운을 대충 걸치며 옆의 의자에 앉았다. 긴 다리를 꼬고 앉은 그가 팔짱을 끼고 겨울에게 앉으라며 고갯짓했다. 쭈뼛쭈뼛 다가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겨울이 목을 한번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미안해요. 옷 입던 도중인지는 몰랐어요.”
“됐어. 어차피 흉한 거 본 건 넌데.”
“…….”
사실 시후의 몸을 봤을 때 겨울은 적잖이 놀랐었다. 마흔을 코앞에 둔 남자의 몸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탄탄한 근육질 몸도 놀라웠지만……. 다른 것보다도 오른팔을 중심으로 그의 상반신의 절반을 넘게 뒤덮고 있는 흉측한 화상 흉터 때문이었다. 일전에 봤을 때는 워낙 어둡기도 했고, 팔만 보았기에 저토록 심각한 흉터인 줄 미처 몰랐었다. 몇 개월 후에 일어난다는 사고가 뭐길래 저렇게 심하게 다친 걸까? 문득 의문이 들었던 겨울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 화상 흉터…… 어쩌다가 다친 거예요?”
“뭐?”
“보기보다 심각해 보이는데, 어떤 사고로 다친 건가 궁금해서요.”
“별거 아니야. 회사에서 야근하다가 잠깐 눈 붙였는데 불이 났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덤덤하게 말하는 투에 겨울은 이상하게 기분이 껄끄러웠다. 뭐라고 답을 할지 생각하던 겨울은 문득 전날 강시후에게서도 봤던 등의 화상 흉터를 다시금 떠올렸다.
“그럼 그 등에 난 화상 흉터는요? 어제 보니까 그건 지금의 강시후한테도 있던데.”
“…….”
“그 상처는 또 어쩌다가 난 건데요?”
“그게 왜 궁금한데?”
“…….”
“어차피 이혼할 사이에, 너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자꾸 묻는 거지?”
겨울이 살며시 미간을 좁혔다. 차갑게 공격적으로 내뱉는 말투가 지금의 강시후의 모습과는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다. 온몸의 뒤덮은 흉터와 사나워진 분위기를 제외하면, 얼굴은 지금과 거의 똑같았으나……. 저 모습은 마치 12년 전 매정했던 강시후의 모습 같았다. 꾸욱 주먹을 움켜쥔 겨울이 말없이 시후를 응시하고 있자, 그가 푹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를 쓸어올렸다.
“대학생 때 MT 갔다가 숙소에 불 나서 다쳤어. 이제 됐나?”
“……진짜 말 정떨어지게 하는데 재주 있으시네요.”
“너한테 정 붙일 이유 없어.”
하, 헛숨을 터뜨린 겨울이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렇다. 역시 강시후는 이런 남자였다.
‘아마도 이게 본성인 거겠지.’
빠득 이를 간 겨울은 11년 전처럼 뺨이라도 한 대 더 올려붙이고 싶은 맘을 꾹 참았다.
“할 말은 그게 전부야? 그걸 물어보려고 날 찾아왔나?”
“아니요.”
두 눈을 흉흉하게 뜬 겨울이 욱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내가 봤을 때 과거의 당신은 미친 게 틀림없어요.”
잇새를 악문 겨울이 따지듯이 소리쳤다.
“무슨 짓을 해도 좋다고, 사랑한다고 구질구질하게 지껄여대는데, 내가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요? 그리고 생각해보니까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억눌러왔던 화가 폭발하며 겨울이 제 가슴을 콩콩 두드렸다.
“그냥 현재의 강시후 본인한테 가서 헤어지라고 하면 되잖아요! 왜 나한테 와서 난리에요? 이 상황을 만든 건 내가 아니라 강시후잖아요! 이혼 안 하려고 빡빡 우기는 것도 내가 아니라 강시후, 너!”
한바탕 쏟아내듯이 따지자 날이 서 있던 미래 시후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굳게 다물어져 있던 입술이 열리고 깊게 숨을 내뱉은 그가 차분하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미래에서 온 사람이 과거의 자신과 만나면 안 돼.”
“왜……요?”
“마주치는 건 물론, 과거의 내가 나의 존재를 인식만 하더라도 시공간이 왜곡돼서, 난 원래 살던 2030년의 미래로 다시 돌아가게 돼. 그리고 다신 과거로 돌아갈 수가 없지.”
“…….”
“그래서 할 수 없이 함겨울 너를 찾아온 거야. 내가 아니라.”
시선을 내리깐 남자의 까만 눈이 겨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즉 우리의 지긋지긋한 악연을 끊어내는 건, 너만 할 수 있다는 뜻이야. 알아들어?”
사납게 물어오는 말에 겨울은 화가 치밀고 억울했으나 납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와 관계없이 드는 의문이 한 가지. 아무리 세월이 흘렀고, 사람이 바뀔 수 있다지만. 지금은 그토록 한없이 자상한 사랑꾼처럼 징글징글하게 구는 강시후가……. 불과 8년 뒤의 미래에는 저렇듯 나를 지긋지긋하도록 싫어한다는 게…….
‘대체 앞으로 있을 8년간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미래에 얼마나 서로 싸우고 바닥을 봤길래, 저토록 180도 태도가 변한 건지 의문이 들었다.
“어쨌든…… 마흔 살의 강시후 씨.”
“서른아홉.”
“거, 한 살 갖고 참……. 그래요, 서른아홉의 강시후 씨.”
은근히 한 방 먹인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 말은 충분히 이해했어요. 나도 협조해서 마지막 시도, 해볼게요.”
“뭘 하게?”
싱긋 미소 지은 겨울이 주먹을 쥐었다 펴며 눈을 곱게 접었다.
“삐뚤어질 거예요. 아주 제대로.”
작전명, 집 나간 와이프. *** 금요일 늦은 밤,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청담동의 한 거리에는 클럽과 라운지 바가 모여 있었다. 희수의 손에 이끌려 23살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클럽이란 곳에 들러본 이후 처음 방문하는 곳이었지만, 겨울은 꽤 침착한 모습이었다. 반면 동행한 희수는 걱정이 산더미처럼 불어난 얼굴로 겨울에게 몇 번이고 되물었다.
“너 진짜 여기 와도 돼? 남편이 뭐라 안 해?”
“응. 괜찮아. 우리 남편은 거의 테레사 수녀님의 환생이거든. 별 진상짓 다해도 눈 하나 꿈쩍 안 해.”
겨울이 희수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으나,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오늘은 내가 기필코…….’
그 무던한 얼굴에 금이 가는 걸 반드시 보고야 말 것이다. 굳게 다짐한 겨울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계속 걱정을 쏟아내던 희수가 별수 없이 아는 MD에게 전화를 걸었고, 겨울과 희수는 MD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에 발을 올리자마자 귀가 터질 것처럼 울려 퍼지는 사운드에 귀가 먹먹해 겨울은 미간을 좁혔다. 소란스러운 곳은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목적을 달성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큰맘 먹고 거금을 들여 VIP층의 테이블을 긁은 겨울은 얼음이 들어간 보드카 잔을 흔들며 비장하게 얼굴을 굳혔다. 희수는 그런 겨울의 눈치를 보다가 팔뚝을 툭 치고 물었다.
“근데 너 박주형도 부른다더니, 걘 왜 안 왔어?”
“몰라. 오늘 세미나 늦게 끝난다고 하는 것 같던데. 다시 전화해 볼까?”
“아냐, 아냐. 안 오는 게 낫지. 이런 데 남자랑 왜 와. 여자들끼리 놀아야 재밌는 거지.”
희수가 음흉하게 웃으며 턱을 괬다.
“여자들끼리 와야, 여기서 새로운 인연이…….”
“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아차, 넌 어쨌든 법적으로 유부녀지. 쏘리쏘리.”
과장되게 제 이마를 탁 친 희수가 깔깔거렸다.
“나 드디어 알겠다, 네 맘!”
“……뭐?”
흠칫한 겨울이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그러니까 이건 결혼한 지 1년도 안 된 신혼부부의 질투 유발 작전인 거지, 그렇지?! 으휴, 엉큼한 계집애. 몇 년째 손가락 빨고 있는 솔로는 미처 몰랐네.”
“……희수야. 난 가끔 널 때리고 싶다고 생각해. 365일 중에서 364일 정도.”
겨울이 차분하게 눈웃음 지으며 말을 잇자 희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자정이 되지 않은 시간이었기에 클럽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겨울의 눈에는 충분히 피곤할 정도로 바글바글했다. 흘끗 제 휴대전화를 내려다본 겨울이 입술을 짓씹었다. 언제쯤 반응이 오려나. 고막을 찌를 듯이 시끄러운 클럽 음악을 들으며 술을 홀짝이는데, 기다렸다는 듯 휴대전화가 시끄럽게 진동했다. 액정에 뜬 강시후 세 글자를 보자 놀란 희수가 겨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야야, 네 남편 전화 아니야? 어떡해? 너 뭐라고 둘러댈…….”
“네. 여보세요.”
희수의 호들갑을 뚫고 겨울은 무작정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 겨울아. 나 지금 집에 왔는데, 너 집에 없어서.
남편에게 이혼당하기 프로젝트, 대망의 마지막 5단계! 속 살살 긁어서 사람 미치게 만들기!
“네. 그런데요?”
-지금 어디야?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데.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시끄러운 클럽 사운드에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시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글쎄요. 내가 어디인지 반드시 알려줘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뭐?
“내가 캐나다겠어요, 알래스카겠어요? 어차피 한국 땅이에요. 아침에는 얌전히 집에 기어들어 갈 테니까 우리 서로 프라이버시는 지켜주기로 하죠.”
-……설마 클럽이야? 내일 아침에 들어온다니, 그게 무슨…….
“어머, 내일 아침이라니요.”
소리 내서 웃은 겨울이 제대로 염장을 질렀다.
“모레일 수도 있고 글피일 수도 있고 일주일 후일 수도 있지.”
-뭐? 일주일?
하, 수화기 너머로 헛숨이 들려왔다.
-……함겨울.
“이름 좀 그만 불러요. 그러다 닳아 녹아서 함여름 되겠네, 아주.”
-클럽은 왜 갔어. 집에 왔는데 너 없어서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나라고 매일 집에만 꼬박꼬박 붙어 있어야 해요? 누가 그래요?”
-…….
“그리고 난 원래 클럽 자주 다녔어요. 느닷없이 생긴 남편 때문에 갑자기 유부녀가 돼서 못 간 거지.”
-너 지금…….
“몰라요. 나 바빠요.”
-……뭘 하느라 바쁜데?
“당연한 걸 뭘 물어요. 신체 부위 어딘가를 격렬하게 흔드느라 바쁘겠죠.”
-뭐? 뭘 흔들어. 어딜 흔들어?
“알아서 상상해요. 끊어요.”
뚝. ***
“…….”
시후는 한 대 얻어맞은 얼굴로 갑작스럽게 끊어진 휴대전화를 멍청하니 바라보았다. 금요일 밤이기도 겨울과 함께 단둘이 맥주 한잔하며 시간을 보낼 생각으로 야식을 사 왔는데, 정작 겨울은 집에 없었다.
“……하.”
시후의 눈썹이 세차게 구겨졌다.
“미치겠네, 진짜.”
졸지에 아내에게 신체 부위 어딘가를 격렬하게 흔들겠다고 선언 당한 남편이 되었다. 휴대전화를 꽉 움켜쥐고 초조하게 전전긍긍하던 시후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