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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족쇄 (27/112)

27. 족쇄2022.01.02.

희수는 독한 보드카를 물처럼 꿀꺽꿀꺽 마시는 겨울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요즘 들어 겨울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는데,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말해주지 않으니 답답한 심정이었다. 작게 한숨 지으며 비스듬히 오른쪽으로 고개 돌린 희수가 귀를 찌를 듯한 사운드 속에 몸을 맡긴 사람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VIP층에서 내려다보이는 열띤 1층의 전경에는 어느덧 수많은 인파로 바글바글했다. 그 모습을 보니 엉덩이가 근질거렸던 희수가 겨울을 향해 물었다.

16550877964107.jpg“너 계속 여기 앉아 있을 거야? 이럴 거면 왜 오자고 했대?”

16550877964111.jpg“그냥. 20대의 마지막을 불태우기 위해?”

16550877964107.jpg“앉아서 동물원 원숭이 보듯이 사람들 지켜보는 게 불태우는 거냐?”

겨울은 대답 대신 나지막이 웃으며 술잔으로 입가를 적셨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희수가 벌떡 일어나 겨울의 가느다란 팔을 잡아끌었다.

16550877964107.jpg“일어나. 같이 밑에 내려가자.”

16550877964111.jpg“됐어, 너 내려가서 놀아. 나 여기서 지켜보고 있을게.”

16550877964107.jpg“네가 여기 있는데 어떻게 나 혼자 놀아?”

16550877964111.jpg“나 머리가 조금 아파서 그래.”

두통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계속해서 뇌를 꽝꽝 울리는 음악 소리를 듣자니 숨이 막히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아침에 들어가겠다고 당당히 선포한 이상,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에 슬그머니 집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최소한 2시에서 3시까지는 버텨보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겨울은 아까부터 계속해서 불난 듯 진동하는 휴대전화의 전원을 껐다.

16550877964135.jpg“어? 너 함겨울 아니야?”

그때, 어디선가 고음의 목소리가 시끄러운 음악 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비어 있던 옆 테이블에 앉은 세 여자의 얼굴을 알아본 겨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들은 겨울이 고등학교 1학년 때, 가장 친했었던 친구들인 한승희와 김규리, 모채연이었다.

16550877964107.jpg“누구? 겨울이 너 아는 사람들이야?”

눈치를 보던 희수가 묻자 승희가 웃으며 겨울 대신 대답했다.

16550877964135.jpg“겨울이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안녕하세요.”

16550877964107.jpg“아, 동창이시구나. 저는 겨울이 친구예요. 겨울이가 고등학생 때 얘긴 통 안 해서 몰랐네요.”

16550877964135.jpg“당연히 안 했겠죠, 뭐.”

풋 비웃음을 흘린 승희가 흘끗 겨울을 곁눈질했다. 승희와 규리, 채연은 한때는 겨울과 자매처럼 친했던 친구들이었지만, 겨울의 집안이 몰락한 뒤 한순간에 등을 돌렸던 족속들이기도 했다.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진 않았지만, 어린 겨울의 가슴에 가장 큰 상처를 안겨준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친했던 시절부터 내내 겨울을 시샘했던 한승희는 겨울이 유흥업소에서 일한다는 헛소문을 최초로 퍼뜨린 장본인이었다. 그녀는 끝없는 루머를 만들어내 겨울을 나락까지 빠뜨렸었다.

16550877964111.jpg“좋은 말로 할 때 꺼져. 말 섞기 싫으니까.”

내리깔은 눈을 번뜩인 겨울이 씹듯이 뱉었다. 순식간에 조성된 험악한 분위기에 흠칫 놀란 희수가 커다랗게 뜨여진 눈으로 겨울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눈앞의 이들이 겨울의 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16550877964135.jpg“어머, 왜 그래. 너? 설마 아직도 옛날 일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지?”

한쪽 입꼬리를 늘어뜨린 승희가 비꼬듯이 물었다.

16550877964135.jpg“진짜 뒤끝도 적당히 길어야지. 안 그러니, 애들아?”

16550877964135.jpg“내 말이. 누가 아니래?”

규리가 맞장구를 치자 승희는 신이 나서 혓바닥을 마구잡이로 놀렸다. 겨울은 그 혀를 잡아다가 다 뽑아버리고 싶은 심정을 누르며 헛숨을 터뜨렸다.

16550877964111.jpg“옛날 일?”

비록 10년도 더 된 일이지만, 겨울에게는 그때의 지옥 같은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16550877964111.jpg“웃지 마. 다 고친 얼굴 뜯어버리기 전에.”

섬뜩한 목소리가 칼날처럼 공기를 가르자 승희와 규리, 채연이 일순 숨을 멈추었다. 순간적으로 겁을 먹었던 스스로의 모습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승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16550877964135.jpg“야, 가자. 그냥.”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전전긍긍하며 상황을 지켜보던 채연이 승희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재촉했다. 그런 그녀의 손길을 팍 뿌리친 승희가 입가에 비소를 띠며 헛숨을 뱉었다.

16550877964135.jpg“뭣도 없는 계집애. 주제 파악 못 하고 당당한 건 여전하구나, 너?”

어떻게 해서든 가슴에 생채기를 내고 싶어 하는 속마음이 뻔히 들여다보였다. 겨울은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16550877964135.jpg“그러고 보니…… 너 집도 망하고 빈털터리 된 주제에 이 테이블은 무슨 재주로 긁었대?”

16550877964111.jpg“…….”

16550877964135.jpg“아, 알겠다. 네 남편?”

두 손을 가볍게 맞잡은 승희가 과장되게 웃었다.

16550877964135.jpg“너 소문 들으니까 KU그룹의 그 강시후 선배랑 결혼했다던데, 뭘 어떻게 꼬신 거야?”

눈썹을 찡그리며 물은 승희는 더러운 오물을 보는 듯이 겨울을 내리깔아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는 추잡스러운 시선에 잔을 쥔 겨울의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16550877964135.jpg“뭐, 말 안 해도 알 것 같지만…….”

쾅! 겨울이 잔으로 세차게 테이블을 내리찍었다. 일대가 잘게 진동하며 놀란 한승희 무리의 어깨가 들썩였다.

16550877964111.jpg“야.”

눈을 들어올린 겨울이 차갑게 그들을 쏘아보았다.

16550877964111.jpg“한 번만 더 입 놀려봐. 그땐 나도 가만히 안 있어.”

험악한 경고에 승희의 눈꺼풀이 파르르 진동했다. 싸하게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 눈치를 살피던 채연이 굳어 있는 승희를 붙잡아 끌었다.

16550877964135.jpg“그만 하자니까, 승희야.”

16550877964135.jpg“그래. 저런 애 신경 쓰지 말고 앉자.”

채연과 규리가 연달아 말하자 그제야 승희는 다리를 움직여 제 테이블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하필이면 바로 옆 테이블이었기 때문에 분위기는 껄끄럽기 그지없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희수는 내리 술만 들이켜는 겨울의 눈치를 흘끗 살피며 어쩔 줄 모르고 입술만 깨물었다. 정작 이런 불편한 상황을 조성한 세 명의 여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술을 마시다가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우르르 계단으로 향한 세 사람은 1층 스테이지로 내려가 춤을 추었다.

16550877964111.jpg“나 잠깐 화장실 좀…….”

16550877964107.jpg“어어, 같이 가자!”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비틀거리며 일어난 겨울이 중얼거리자 희수가 곧바로 따라 일어났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는 겨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희수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16550877964107.jpg“괜찮아? 술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이제 집에 갈까?”

16550877964111.jpg“……그러자. 이 정도면 충분히 있었으니까.”

더 있어 봐야 속만 더 뒤집힐 뿐, 이득 될 게 전혀 없었다. 테이블로 향한 겨울은 외투를 입고 핸드백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는 와중에 부아가 치밀고 짜증이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화가 났다. 폭발할 것만 같은 속을 가까스로 누르고 다리를 움직이는데, 일순 코를 찌르는 듯한 향수 냄새와 함께 어깨가 뒤흔들렸다. 아래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온 한승희가 겨울의 어깨를 일부러 치고 지나간 것이었다.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것처럼 어깨를 털은 겨울이 다시 등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16550877964135.jpg“어? 내 핸드폰!”

일순 승희가 뒤에서 크게 소리쳤다.

16550877964135.jpg“왜? 뭐가 사라졌어?”

16550877964135.jpg“아까 여기 테이블 위에 올려놨는데, 사라졌어.”

규리의 물음에 승희가 테이블을 마구 뒤져보며 답했다. 어수선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승희가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겨울을 큰소리로 불러 세웠다.

16550877964135.jpg“야, 함겨울! 잠깐만.”

멈춰선 겨울이 말없이 고개 돌려 승희를 쏘아보았다.

16550877964135.jpg“의심하는 건 아닌데, 네가 내 옆 테이블이었잖아.”

16550877964111.jpg“그런데?”

16550877964135.jpg“가방 한 번만 확인하자.”

16550877964111.jpg“뭐?”

하, 겨울이 헛숨을 터뜨렸다.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16550877964135.jpg“아니, 우리가 오자마자 자리 비키려는 네 행동이 좀 수상하지 않아?”

주먹을 꽉 움켜쥐자 치밀어오르는 분노로 손이 바르르 떨렸다. 예나 지금이나 어떻게 해서든 겨울의 위신에 스크레치를 내려고 안달복달하는 건 똑같았다.

16550877964107.jpg“저기, 말이 좀 심한 것 같은데……!”

16550877964135.jpg“그러니까 가방 한번 열어보면 될 일이잖아요?”

보다 못한 희수가 끼어들자 승희가 되레 당당하게 소리쳤다.

16550877964135.jpg“안 그래, 함겨울?”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마치 겨울의 핸드백 안에 핸드폰이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사람 같았다. 동시에 겨울은 머릿속으로 스치는 것은 조금 전 희수와 함께 화장실을 갔던 일이었다. 스멀스멀 매연처럼 피어오르는 불안감과 함께 겨울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16550877964111.jpg‘내가 화장실 갔을 때 핸드폰을 넣어놓은 건가?’

핸드백을 꽉 움켜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과 함께 겨울은 아래로 끝없이 침식해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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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등학교 1학년 때, 전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된 직후. 그런데도 떳떳하게 고개를 펴고 학교에 다녔던 겨울의 자존심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중소기업 사장의 딸인 승희는 아버지가 사준 고가의 머리핀을 하고 와서 여기저기 자랑하다가 돌연 자지러지게 외쳤다.

16550877964135.jpg“내 머리핀이 사라졌어!”

체육 시간이 끝난 직후였고, 겨울은 배가 아파서 교실에 홀로 남아 있었다. 승희와 아이들은 겨울을 둘러싸고 몰아붙이며 매섭게 다그쳤다.

16550877964135.jpg“야. 함겨울. 너 여기 혼자 있었잖아. 혹시 네가 가져간 거 아니야?”

16550877964111.jpg“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그걸 왜 가져가!”

16550877964135.jpg“모르지, 나야. 돈 때문에 술집에서 일하는데 도둑질이라고 못하겠어?”

16550877964111.jpg“하. 네가 봤어? 내가 술집에서 일하는 거?”

16550877964135.jpg“그걸 봐야 아니? 하여간 질 떨어져서는…….”

풋 실소한 승희가 책상 옆에 걸려 있는 겨울의 가방을 덥석 쥐었다.

16550877964135.jpg“그렇게 떳떳하면 가방을 까보던가.”

16550877964111.jpg“야!”

겨울이 말릴 새도 없이 승희는 가방 지퍼를 열고 우르르 바닥에 내용물을 쏟아냈다. 책과 학용품, 생리대 등 온갖 물건들이 마구잡이로 엎질러지고 화가 난 겨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16550877964135.jpg“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마지막으로 떨어진 건 보석이 박힌 승희의 머리핀이었다. 놀란 겨울의 동공이 거칠게 뒤흔들렸다. 심장이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고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16550877964135.jpg“하다 하다 도벽도 있니, 이제?”

순간 교실을 둘러싼 아이들의 시선이 매섭게 쏟아지고 겨울의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여기서 아니라고 부인해봐야 자신의 말을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쏟아지는 눈빛들은 전부 겨울을 더러운 오물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겨울은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겨울이 입술을 으스러지도록 깨물었다. 틀림없었다. 이번에도 겨울이 화장실을 갔다 올 동안 핸드백에 휴대전화를 몰래 넣어놓은 것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당당하게 나올 수 있을 터였다.

16550877964135.jpg“저기, 보아하니 함겨울 친구 같은데……. 조심하세요.”

옆에 있던 규리가 희수를 톡톡 치며 속닥거렸다.

16550877964135.jpg“얘가 시기 질투도 심하고 성격도 더러운 데다, 고등학생 때 도벽도 좀 있었거든요.”

16550877964111.jpg“…….”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겨울은 귓가에서 이명이 들려오는 듯했다. 여기서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또다시 과거에 묶여 이렇듯 지옥으로 끌려가는 이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16550877964135.jpg“네가 핸드백을 안 열면, 내가 전화해 보지. 뭐.”

입꼬리를 비틀며 말아 올린 승희가 규리의 휴대전화를 뺏어 제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겨울의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진동 소리가 울리고 이내 밝은 휴대전화의 불빛이 번뜩였다.

16550878129483.jpg“이거 찾으세요?”

승리를 확신하며 미소 짓고 있던 승희의 입꼬리가 일순 내려갔다. 뒤에서 소리 없이 나타난 남자가 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6550877964135.jpg“……그게, 어떻게 거기에…….”

16550878129483.jpg“아까 겨울이 핸드백 안에 넣는 거 보고, 제가 빼 왔는데.”

겨울의 친구 박주형이었다. 뒤늦게 클럽에 도착한 주형은 겨울을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문득 익숙한 핸드백에 휴대전화를 밀어 넣는 여자를 발견했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1층으로 내려가는 여자들을 수상하게 보던 주형이 몰래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빼 온 것이었다.

16550878129483.jpg“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16550877964135.jpg“…….”

16550878129483.jpg“사람 하나 누명 씌우려고 추잡스러운 짓까지 하다니…….”

주형이 헛숨을 터뜨리며 승희의 핸드폰을 던지듯이 돌려주었다.

16550878129483.jpg“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유치하기 짝이 없네요.”

그렇게 말하며 옆에 묶인 듯 가만히 서 있는 겨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손길에 떨리던 어깨가 잦아들며 하얗게 물들었던 겨울의 머리가 차게 식었다.

16550878129483.jpg“정식으로 사과하시죠. 겨울이에게.”

16550877964135.jpg“…….”

주형의 단호한 말에 승희가 분한 듯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자존심이 상한 듯 입술을 벙긋거리던 승희가 주형의 매서운 눈빛에 억지로 입을 열었다.

16550877964135.jpg“미안…… 꺄악!!!”

겨울은 무작정 옆의 술잔을 들어 승희의 얼굴에 부어버렸다. 돌연 얼굴로 끼얹어진 액체에 놀란 승희가 자지러졌다. 퍼드득 경련하듯 손발을 휘저으며 제 얼굴에 묻은 술을 닦아내었다. 규리와 채연은 놀란 듯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입만 벙긋거렸다. 탁, 태연하게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겨울을 승희는 아연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겁에 질린 듯한 눈이었다. 그 눈을 보며 비웃음을 흘린 겨울은 그대로 뒤를 돌아 계단을 내려갔다. 1층 스테이지로 내려가는 겨울을 주형과 희수가 쫓아갔지만, 곧바로 놓치고 말았다. 고막을 꿰뚫을 듯한 사운드와 수많은 인파를 뚫고 무작정 바로 향한 겨울은 바텐더에게 술을 주문했다.

16550877964111.jpg“제일 독한 걸로. 희석하지 말고 주세요.”

미쳐버릴 것 같았다. 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기분에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술을 끼얹는 게 아니라 뺨이라도 올려붙이고 싶었다. 아니, 그 난간에서 밀어버려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16550877964111.jpg“……왜 이렇게 열 받지.”

으득 입술을 씹은 겨울이 바텐더가 건넨 술을 단번에 넘겼다. 그 술을 제조해준 바텐더의 눈이 놀란 듯 휘둥그레졌다. 툭 치면 쓰러질 것처럼 마르고 아담한 여자가 희석도 되지 않은 술을 한 번에 들이켜니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16550877964111.jpg“같은 걸로 한잔 더 줘요.”

그렇게 말하며 카드를 내밀자 바텐더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 깊게 숨을 내쉰 겨울은 제 머리를 한 손으로 쥐어뜯었다. 입안을 짓씹자 비릿한 혈향이 번지며 분노는 점점 더 크기를 키웠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건지 모르겠다. 모든 게 짜증 나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족쇄처럼 따라다니는 과거의 기억도, 아직 돌아올 기미가 없는 사라진 1년도, 갑자기 나타나서 내 속을 뒤집어 놓는 서른아홉 살의 강시후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현재의 강시후! 겨울은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술잔을 비우며 내부의 모든 사념을 없애고자 했다.

16550877964111.jpg“……하아.”

그냥 다 포기하고, 전부 놓아버리고 아무렇게나 살고 싶었다. 어차피 동생 이경도 곧 대학교를 졸업할 터였고, 엄마도 더는 제게 손 벌리지 않았다. 클레르에도 겨울의 빈자리를 채워줄 사람은 수없이 많았으며, 희수와 주형도 제 음울한 과거를 알게 되면 멀리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 나 같은 건, 하나 사라져도 이 세상은 달라지는 거 하나 없다. 끊임없이 술을 마시자 점차 세상이 핑글 돌고 눈앞이 아찔했다. 머지않아 만취한 겨울을 향해 주위에 있던 남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가만히 서 있는 겨울의 몸 뒤로 제 몸을 딱 붙이고 흔드는 변태도 있는가 하면, 겨울의 몸에 손을 대려고 무작정 팔부터 뻗는 정신 나간 놈도 있었다.

16550877964111.jpg‘자고 싶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등 대고 편히 쉴 곳이 있었으면 했다.

16550877964111.jpg‘어지러워…….’

클럽을 빠져나가기 위해 입구를 향해 비틀거리며 걷는 겨울이 누군가와 툭 부딪혔다. 사과할 정신도 없이 스쳐 지나가려는데, 겨울의 손을 누군가가 확 잡아끌었다.

16550878157702.jpg“드디어 찾았다.”

낮은 목소리가 고막을 깊숙이 찔러왔다. 흠칫한 겨울이 고개를 들자 두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강시후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미 인사불성이 된 겨울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손을 뿌리쳤다. 또 그저 그런 놈들의 수작이라고 생각한 겨울이 비틀거리며 뒤돌아 가려고 한 찰나였다. 두 다리가 허공에 뜨고 시야가 확 위로 올라갔다. 놀란 겨울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부딪친 겨울의 시야는 뿌옇게 흐렸다.

16550878157702.jpg“도대체 어디까지 삐뚤어질 작정이지.”

겨울을 무작정 안아 든 남자는 시후였다.

16550878157702.jpg“화나게 하려는 게 목적이면 성공했어.”

늘 웃으며 내려다보던 얼굴엔 선명하게 균열이 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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