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언어의 온도2022.01.19.
“지…… 진정해요.”
“먼저 긁어놓고 진정하라고?”
“빠, 빨리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성기…… 아니, 김성기 팀장이 아프시다면서요!”
“너와 잠깐 노닥거릴 시간은 있어.”
그렇게 말하며 겨울의 얼굴 옆 벽을 짚는 손에 그녀가 소스라쳤다.
“그만, 그만!”
커다란 몸집이 가로막고 있으니 어둑하니 그림자가 졌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거리에 당황한 겨울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내 시후의 턱이 비스듬히 비틀리며 사선으로 내려오자 겨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꼭 모으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온 안면근육을 찡그리고 이상한 표정으로 있기를 약 5초, 갑자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흠칫한 겨울이 반사적으로 눈을 떴으나, 이미 시후는 집 밖으로 홀랑 나가고 없었다. 잔뜩 긴장해서 굳어 있던 입술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이, 씨…….”
또 놀림당했어!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을 두 손바닥으로 푹 가린 겨울이 씩씩거렸다.
“하여간 누가 강시후 아니랄까 봐…….”
아주 가죽을 넘어 뼛속까지 재수가 없다. 후들거리던 다리에도 긴장이 풀린 겨울은 그대로 벽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는 심장을 떨리는 손으로 움켜쥔 겨울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진짜 뭔 일 나는 줄 알았네…….”
강시후의 앞에서는 도무지 평정을 찾을 수가 없다. 왜 이렇게 동요하는지, 그 이유를 이제는 알 것도 같았다. 그가 다정하게 대할 때, 그러면서도 종종 짓궂게 굴어올 때마다, 꼭 어렸을 때의 강시후의 모습과 겹쳐지기 때문이었다. 아주 오래 전. 겨울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그 시절의 강시후와.
*** 한편 운전석에 앉은 시후는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입가에 웃음이 마르지 않았다. 집에서 나오기 전, 겨울의 귀여운 얼굴과 행동들이 자꾸만 떠오르는 탓이었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어두운 욕망 속에 고이 묻어둔 일종의 가학심이 은근슬쩍 피어올랐다. 울리고 싶고, 짓궂게 괴롭히고 싶은 이상한 마음. 교복을 입던 시절에 진작 두고 왔어야 하는 철없는 감정인데, 나이 서른하나 먹어서 나타난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빨개진 겨울의 얼굴을 떠올리면 또다시 실없이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렸을 때도 겨울은 놀리면 곧잘 발끈하고 얼굴을 붉히고는 했는데. 요즘 들어 자꾸만 오래전, 한없이 해맑고 좋았던 시절이 떠오른다.
“……그립네.”
그때의 우리는 정말로 순수했으니까. 기쁘면 기쁜 대로 아무런 계산 없이 웃을 수 있었던 그때. ……돌아갈 수 있을까? 아마도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
상념을 가득 실은 한숨이 시후의 입술을 타고 길게 뻗어져 나왔다. 눈앞 빨간 신호를 가만히 바라보는 시후의 머릿속으로는 조금 전 겨울과 있었던 일이 다시금 잔잔하게 흘렀다. 겨울이 집에 오기 전, 시후는 서재에서 서버팀이 보내준 내용을 확인하다가 잠시 몰려오는 졸음에 선잠이 들었었다. 꿈 내용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겨울이 등장했었던 것 같다. 기분 좋은 꿈이었기에 깨고 싶지 않았지만, 좋은 향기와 간지러운 손길에 살며시 의식이 현실로 돌아왔다. 눈을 뜨려고 했으나 제 눈썹과 뺨, 콧잔등을 따라 흐르는 가녀린 검지 탓에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 여리지만 따뜻한 손길에 잠결에서도 울컥 감정이 올라왔었다. 그런 사소한 일들에도 자꾸만 희망을 품게 되는 자신이 싫었다. 자그마한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기대고 싶어지니까.
“…….”
시후는 핸들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이 세상 모두가 등을 돌려도…… 오빠만은 내 편일 거라고 믿었어…….’
어젯밤 겨울이 술에 취해 속삭인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강시후만은…… 내 곁을 지켜줄 거라고 믿었다고.’
눈가에 고인 투명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릴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괴로워할 자격이 있나. 내가 널 사랑할 자격이 있나. 상처입힌 주제에 지켜주겠다며 옆에 있는 게 맞는 건가. 그런 고민이 시후를 끊임없이 괴롭혀왔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이혼이었고, 그런데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한 달의 시간을 달라고 한 것이었다.
“…….”
이 감정이 그녀에게 짐이 된다면 버리는 게 맞다. 하지만, 놓아줄 땐 놓아주더라도. 하지 못한 이야기는 끝을 맺어야 한다는 걸 안다. 그녀에게 입혔던 상처에 대한 솔직한 사과를. *** 한편 집에 홀로 남은 겨울은 반신욕을 하기 위해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았다. 향긋한 입욕제를 한껏 풀고 찌뿌둥한 몸을 따뜻하게 녹이니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따끈한 물에 머리까지 푹 담갔다가 뺀 겨울이 제 얼굴을 쓸어올리며 푹 숨결을 내뱉었다.
“…….”
요즘 들어, 강시후에 대한 제 감정이 조금 달라졌다는 것을 스스로도 느꼈다. 그리고 그 변화는 겨울에게 두려움으로 와 닿았다. 과거가 발목을 잡고 있었기에 무서웠고, 미래를 알고 있었기에 더욱 무서웠다. ……다시 사랑하는 건 정말 그야말로 미친 짓이다.
‘우리 이혼하자.’
시후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어른거리는 듯했다. 이혼해주는 조건은 단 하나.
‘나랑 연애할래? 법적으로 남남 되기 전까지만.’
단칼에 잘라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스스로가 바보스러웠다.
“아, 내가 이걸 왜 고민하냐고. 자꾸…….”
빨리 그에게 답을 해주어야 했다. 그래야 그토록 바라던 이혼도 빨리할 수 있는 거고……. 강시후와의 악연도 깔끔하게 정리하고 새 출발 할 수 있는 것이다. *** 하지만 겨울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고, 눈 깜짝할 새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겨울이 시후의 제안에 대답해 주지 않았으니, 두 사람은 데면데면한 사이로 며칠을 그저 그렇게 보냈다. 서로 인사도 하고 아침도 종종 같이 먹었지만, 대화는 거의 없는 동거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 시후도 그날 이후 딱히 다가오거나 답을 재촉하지 않았으니 겨울도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었다.
“이제 겨울이네…….”
어느덧 11월이 되고, 밤공기는 눈이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쌀쌀해졌다. 퇴근하기 위해 건물을 나선 겨울은 택시를 타기 위해 큰길로 향하는데, 문득 익숙한 차가 갓길에 주차된 것을 발견했다.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차에서 웃으며 내리는 남자는 다름 아닌 시후였다.
“아…….”
요 며칠 서로 데면데면했으니 조금 어색한 기분이었다.
“오랜만이네요. 데리러 온 거.”
“응. 네가 불편할 것 같아서 안 왔었지. 나 퇴근도 계속 늦었었고.”
“오늘은 안 바빠요? 왜 왔어요?”
“그냥.”
시후가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오고 싶었어.”
입을 다물자 둘 사이로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견딜 수 없었던 겨울이 아무렇게나 입술을 움직였다.
“그…… 저녁은 먹었어요?”
“응. 먹었어. 너는?”
“나도 먹었어요. 아까 희수랑 같이…….”
겨울이 뒷말을 흐렸다. 오늘따라 묘하게 시후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던 탓이었다. 항상 여유만만이었던 그가 오늘만큼은 왜인지 초조해 보였고,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도 같았으며 괴로워 보이기도 했다. 무어라 말을 하기 전에, 시후는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집으로 가기 전에, 우리 잠깐 공원 걷다가 들어갈까?”
……할 말이 있는 건가? 아마도 일전의 제안에 대한 대답을 들려달라는 뜻으로 들렸다. 마음을 굳게 먹은 겨울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래요. 나도 할 말 있으니까.”
오늘에서야 드디어 끝맺음할 때가 온 것이다. 언제까지 질질 끌 수는 없었다. *** 강가를 둘러싼 공원의 한없이 긴 트랙을 시후와 겨울은 말없이 함께 걸었다. 날씨는 꽤 쌀쌀했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시후는 겨울의 작은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었고, 겨울도 시후의 커다란 보폭에 맞춰 평소보다 걸음을 빨리했다. 서로 조금씩 조율하자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의 속도는 일정했다. 누구 하나 빠르거나 느리지 않았다. 말없이 한참을 걷다가 흘끗 시후를 바라본 겨울이 마른 입술을 한번 축였다.
“요즘 엄청 바쁜 것 같았는데, 이제 좀 한가해졌나 봐요?”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새로 출시한 게임 정식 런칭하고 조금 바빴었어.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화돼서 한숨 돌렸지, 뭐.”
“다행이네요.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 보였거든요.”
“그건, 그냥 고민 좀 많이 하느라.”
……무슨 고민? 설마, 나와의 관계에 대한 고민? 겨울의 미간이 고요하게 조여들었다. 뭐라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자 시후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꿨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간간이 하며 1시간에 가깝도록 공원을 따라 한참을 거닐었다. 다시 잠깐의 정적이 내려앉았을 때, 겨울은 이제 슬슬 시후에게 자신의 결정을 말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혼은 무조건 해야겠고, 숙려기간 동안 더 가까워지는 건 두려웠으니…….
‘역시…….’
그냥 깔끔하게 여기서 모든 걸 끝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왠지 심장 한쪽이 욱신거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았지만 애써 외면하며 입술을 벌린 찰나였다. 어디선가 강한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겨울이 눈살을 찡그렸다. 살짝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가려는데, 시후가 옆에서 짧게 ‘아’ 소리를 내었다.
“왜 그래요?”
우뚝 걸음을 멈춘 시후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한쪽 눈을 가린 채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은데.”
“그래요? 어디 봐요.”
살짝 까치발을 든 겨울이 시후의 손을 내리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눈을 떠봐요. 내가 보게.”
시후가 눈을 깜빡거리며 힘겹게 뜨자 겨울이 살짝 붉게 충혈된 그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보기엔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확실히 약간 빨개진 눈은 어딘가 조금 아파 보였다. 입술을 모은 겨울이 호, 바람을 불어넣자 시후의 긴 속눈썹이 잘게 흔들렸다.
“어때요?”
한 번 더 호 불어넣자 시후는 제 눈꺼풀로 와 닿는 포근한 입바람을 느꼈다. 눈 안에 들어갔던 이물질이 빠져나왔는지 따끔한 감각이 점차 멀어지고 흐려졌던 시야가 다시금 선명해졌다.
“괜찮아요? 눈 뜰 수 있어요?”
눈을 한 번 더 꾹 눌러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조명을 켠 듯 선명해진 시야로 겨울의 하얗고 말간 얼굴이 가득 찼다. 원망도 미움도 아닌, 걱정이 한 움큼 담긴 표정이었다.
“…….”
……어렸을 때도 너는, 가끔 내가 아플 때 그런 표정을 짓고는 했는데. 시후는 그런 겨울의 얼굴을 한참 동안 말없이 응시했다.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시선에 겨울이 고개를 갸웃하며, 한 번 더 까치발을 들어 눈을 살폈다.
“왜 그렇게 봐요? 눈은 괜찮냐니까?”
숨결이 얽힐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달콤하고 보드라운 겨울의 숨이 느껴지자 시후의 심장이 거칠게 흔들렸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뜨자 겨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살짝 충혈된 젖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얽히자 겨울의 눈가가 흔들렸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고요한 눈의 대화가 오고 갔다.
“…….”
넌, 내가 싫다고 했으면서……. 왜. 시후는 가슴이 욱신 조여오는 기분이었다. 욕심이 생길 때마다 심장이 깨질 것처럼 옥죄어왔다. 엉킨 매듭을 풀기엔 너무 늦은 걸까. 자르고 다시 이을 수는 없는 걸까. ……아직 너에게 제대로 전하지 못한 말이 있다.
“겨울아.”
하부가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탑의 위에는 아무것도 쌓아 올릴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이미 무너져버린 지 한참이 지나, 폐허가 되어버린 너의 마음에 들어가……. 내 멋대로 성을 쌓으려 했다.
“미안해.”
시후는 굳게 닫힌 입술을 느슨하게 열었다. 지금 바로,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뭐가요, 갑자기?”
갑작스러운 사과에 당황한 겨울이 눈을 크게 떴다.
“어렸을 때, 네 곁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겨울의 커다란 동공에 해일이 일어났다. 거센 파도가 넘실거렸다.
“너한테 말로 상처를 입혀서, 정말 미안해.”
술에 취한 너에게 용기 없이 흘리는 사과가 아니라, 이건 나의 진심이 담긴 고백이다. 무려 10년이 넘도록 하지 못하고, 비겁하게 혀끝에만 가둬놓았던.
“우리의 어린 시절 소중한 추억까지 더럽혀서 미안해…….”
나직한 고백에 겨울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속삭이는 언어가 피부로 잔잔하게 스며들었다.
“이혼해주겠다는 말, 연애하자는 말, 좋아한다는 말보다…….”
“…….”
“이 말을 제일 먼저 해야 했었어.”
시후의 검은 눈동자에서는 전에 없던 떨림이 읽혔다. 그 미세한 진폭이 겨울의 가슴에 거세게 와닿았다. 분명히 계절은 추운 겨울이었다. 언제 눈이 내려도 이상하지 않은 온도였다. 하지만 겨울의 고막에 맺힌 열기는 그녀의 얼었던 심장을 녹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널 아프게 해서 미안해, 겨울아.”
……말에는 온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