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포기하지 않는 사랑2022.01.23.
“널 아프게 해서 미안해, 겨울아.”
단정하던 겨울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거센 해일에 휩쓸리듯 온몸이 떨려오는 기분이었다. 조금씩 커지던 심장 박동 소리는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애꿎은 입술을 달싹이고 있자니 단단한 팔이 뻗어져 겨울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품으로 강하게 끌어안는 손길에 겨울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숨결이 닿을 듯 거리가 가까워지고 시원한 체향이 밀려왔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전해져오는 따스한 체온에 겨울의 가슴은 녹아내리는 듯했다. 겨울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시후의 등에 살포시 얹었다. 그 손길에 시후는 겨울의 여린 몸을 더욱 강하게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엄청난 속도로 뛰기 시작한 가슴을 느끼며 겨울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지금까지 그가 했던 모든 말과 행동 중, 가장 진솔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그가 과거의 일을 직면하고, 이렇게 사과를 할 것이라고는……. 그와의 악연을 끊어내겠다고 굳게 다짐했던 결심이 흐트러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겨울은 굳게 다물린 입술을 살며시 벌렸다.
“……솔직히.”
제 머리를 감싼 손이 부드럽게 쓰다듬자 겨울의 가슴이 쿵쿵거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예전 그 행동들을 전부 용서할 수는 없어요.”
케케묵은 상처들은 치료할 시기를 지난 지 오래였고, 아프게 곯아 오랜 시간 겨울을 괴롭혀 왔었다. 단 한 번의 사과로 가슴에 뭉친 응어리와 지금껏 원망하며 살아온 세월이 전부 녹아내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여전히 그때 그 행동들이 이해 안 되는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맞닿은 부위로 느껴지는 심장 박동이 점점 더 크기를 키웠다.
“사과해줘서 고마워요. 진심이라고 믿을게요.”
겨울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시후를 올려다보았다. 진중한 눈빛이 달빛과 함께 겨울을 향해 따뜻하게 쏟아졌다. 작은 머리를 감싼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흘러 흑갈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 손길과 뜨거운 시선에 조금 창피해진 겨울의 볼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어수선하게 눈을 돌린 겨울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강시후 씨는…….”
꼴깍 마른침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나랑…… 정확히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거예요?”
“같이 있고 싶어.”
시후는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고 곧바로 답했다.
“그것만 원해. 네 옆에만 있어도 난 좋으니까.”
겨울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득하니 눈을 감았다가 뜨자 가슴이 욱신거렸다. 작게 벌어진 입술로는 한숨 같은 숨결이 흘러나왔다. 제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없는 이유는 너무도 많았다. 발목을 잡는 과거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다름 아닌 미래의 강시후였다. 자칭 2030년에서 온 강시후는 우리가 8년 뒤의 미래에 헤어질 운명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앞으로 몇 년간 계속 싸우고 바닥을 보며 서로 미워하게 될 것이라 말했고, 그렇기에 괜히 시간 낭비를 하지 말고 빨리 이혼하라고 종용했다. 그렇듯 끝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지금 이 시간들은 아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잘 알고 있는데……. 그런데도 자꾸 흔들리는 건 왜일까. 혹시나, 만에 하나. 현재의 행동으로 인해, 다른 미래를 그릴 수 있지는 않을까. 작게 심호흡한 겨울이 시선을 들어 올려 시후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전에 한 제안 받아들일게요. 연애든 뭐든, 한 달 동안 그쪽이 하고 싶은 대로 해봐요.”
어차피 끝이 정해진 관계이니, 과정이야 어쨌든 상관없지 않을까……. 이 정도쯤은 허용해주어도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시후는 그 마음에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보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된다고?”
“……뭐예요, 그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차게 빛나는 까만 눈동자에 겨울이 주춤했다.
“정말 다?”
겨울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시후의 입꼬리가 싱그럽게 올라갔다. 그 미소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겨울이 미간을 좁혔다. 설마 이상한 요구를 하려는 건…….
“그럼 네가 예전처럼 편하게 말했으면 해. 존댓말 하지 말고.”
“……그게 전부?”
“응. 지금까지 엄청 마음에 걸렸거든. 그리고 너 기억 잃기 전에 원래 나한테 반말했었어.”
“……그래?”
“그래.”
“으음…….”
뭐든 그의 마음대로 해보라고 한 것은 그가 제게 미련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왕이면 헤어질 때 서로 쿨하게 뒤돌아보지 않고 헤어지고 싶었지, 끝이 안 좋게 파탄이 나는 것은 그녀도 원하지 않았다.
“뭐, 어려운 거 아니니까 그 정도는 해줄게.”
겨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시후가 또다시 환하게 웃었다. 지금껏 겨울이 본 웃음 중에 가장 눈이 시리도록 밝은 미소였다.
“고마워.”
달빛을 받은 얼굴이 꼭 화보 속 한 장면 같았다. 가슴이 아릴 정도로 예쁜 미소에 겨울의 심장이 움찔거렸다. 커다란 동공을 굴린 겨울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렇게 웃지 마. 짜증 나.”
“이렇게 생긴 걸 어떡해?”
짜증 난다고 구박해도 마냥 좋다고 웃는 얼굴은 쓸데없이 과하게 잘생겼다.
‘……괜히 설레잖아, 짜증 나게.’
속없이 뛰는 심장을 느끼며 겨울은 확 뒤를 돌아 척척 걸어갔다. 낮게 웃은 시후는 그런 겨울의 뒤를 곧바로 쫓아갔다.
“같이 가.”
시후는 벅차오르는 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현재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전하니 겨울이 한 발짝 제게 더 다가온 것 같았다. 비록 한 달뿐이어도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더없는 기쁨이었다.
“너무 많이 걸어와서 차 있는 데까지 또 한참 걸어야겠네…….”
한숨 쉰 겨울이 중얼거리며 말꼬리를 늘렸다.
“택시 탈까?”
“여기서 택시를 어떻게 잡아. 안 잡히지.”
“너 추울 것 같아서 걱정되는데.”
“괜찮아. 조금 참지 뭐.”
겨울은 시린 손을 한번 비비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주머니가 없는 코트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겨울의 하얀 손은 차가운 공기에 그대로 노출된 상태였다. 톡 치면 부러질 것처럼 자그마한 손을 물끄러미 보던 시후는 제 손끝을 하릴없이 구부렸다. 욕심 같아서는 저 작은 손을 잡고 나란히 걷고 싶었지만, 미움받게 될까 봐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겨울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지만, 정말 맘대로 했다가 겨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왠지. 시후가 겨울의 손가락 끝을 살짝 건드리자 움찔한 겨울의 눈이 커졌다. 이내 커다란 손이 자그마한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자 겨울이 놀란 눈으로 시후를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조금 머쓱해진 시후가 작게 헛기침하며 딴청을 피웠다.
“…….”
살짝 놀랐지만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가 싫지만은 않았던 겨울은 잠자코 걸음을 옮겼다. 심장이 콩닥거리고, 은근히 긴장되는 분위기가 낯설었다. 길쭉한 손가락은 이내 겨울의 손가락 틈을 파고들며 그물처럼 끈적하게 맞물렸다. 시후는 하나가 된 손을 부드럽게 제 주머니 안으로 끌어당겨 넣었다. 포근한 온기가 느껴지자 겨울은 미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능숙해?”
“응?”
“아니…… 전에 키……스할 때도 그렇고.”
겨울이 머뭇거리며 약간 뾰로통하게 물었다.
“뭐, 그동안 여자를 얼마나 만났길래.”
“별로. 난 옛날부터 너밖에 없었어.”
“……안 만났긴. 학생 때도 툭하면 여자애들이 나한테 강시후 소개해달라고 그렇게 난리였는데. 그때 거의 한 서른 명은 나한테 소개해달라고 완전 난리에 난리…….”
“그래? 이상하네.”
시후가 나지막이 웃었다.
“한 번도 네가 나한테 여자 소개해준 적이 없는데 말이지.”
“…….”
겨울의 얼굴로 소리 없이 열기가 몰렸다. 학창 시절에 친구들이 시후를 소개해달라고 수없이 요청했었으나 단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겨울도 시후를 마음에 품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소개해줄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때는 정말 별의별 이유를 다 갖다 대서 소개해주지 않았고, 그래서 친구들에게 안 좋은 소리도 여러 번 들었었다.
“그, 그건…… 내 친구들이 훨씬 아까워서 그랬다.”
“정말 그 이유였어?”
겨울이 대답 대신 찌릿 시후를 흘겨보았다. 우씨. 그냥 그러려니 하면 될 것이지.
“알았어. 그렇게 무섭게 보지 마.”
“하나도 안 무서우면서.”
“무서워. 난 함겨울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거든.”
좋아하는 감정이 나날이 커지니 이제는 두려울 정도였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이 가슴을 눌러올 때마다 감당하기 버거웠으니까.
“참나, 무서운 사람이랑 손은 왜 잡고 있대?”
겨울이 툴툴거리며 시후의 손을 놓았다. 그러나 빠져나가기가 무섭게 곧바로 시후의 손에 다시금 검거당해 그의 주머니에 감금되었다.
“만지면 부서질까 봐 무서워. 그런데도 만지고 싶고…… 안고 싶고, 그래.”
나직한 목소리가 고막을 깊숙이 파고들자 겨울은 손끝을 움츠렸다. 따뜻한 온기가 뒤엉키고 얽힌 손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거웠다.
“놓기 싫어. 네 체온이 나한테 전해져오는 게 너무 좋아.”
……저, 저 요망한 입. 대체 어디서 저런 말들을 배워오고 계속 써먹는 걸까. 이러나저러나 혀를 놀리는 수준이 보통이 아니다.
“나한테 음소거 찬스 3개만 줘.”
“그게 뭐야?”
“오빠가 5분간 말 못 하게 할 수 있는 찬스.”
시후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말을 안 하면 입으로 뭘 해.”
숨소리처럼 속삭이며 내려다보는 눈빛이 데일 듯 뜨거웠다. 일순간 놀란 심장이 날뛰는 걸 느끼며 겨울이 미간을 좁혔다.
“……지금 찬스 써야겠어. 5분간 말하지 마.”
“그래?”
그 말에 부드럽게 멈춰선 시후가 상체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내려다보는 시선에 겨울이 뻐근하게 고개를 들자 하얀 목덜미로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덮였다. 달빛을 받아 몽롱해진 시야로 내려오는 입술에 겨울이 떨리는 눈을 감았다. 열기를 한껏 입은 뜨거운 입술이 강렬하게 부딪쳐왔다. 아랫입술을 빨아들이는 아찔한 감각에 겨울의 숨결이 끊기고 머릿속이 어지러이 뒤덮였다. 부드럽게 입술 틈을 가르고 들어온 시후가 겨울의 입안을 이리저리 헤집고 휘젓자 겨울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비벼지는 달콤한 감각으로 열기가 뜨겁게 들끓었다. 입안이 온통 녹아내리는 듯한 착각에 겨울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야릇한 마찰음이 점점 더 진해지고 겨울의 숨결은 점차 거칠어졌다.
하아, 입술을 뗀 겨울이 작게 숨을 터뜨렸다. 시후는 빨갛게 부풀어 오른 통통한 입술을 엄지로 쓸며 나직이 웃었다.
“내가 너한테 줬던, 푸른 장미의 꽃말이 뭔 줄 알아?”
묵직한 숨소리가 귓가에서 어른거리자 겨울의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새까만 눈동자가 겨울을 꿰뚫을 듯이 응시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랑.”
겨울의 눈동자가 뒤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