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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오늘 같이 잘래? (34/112)

34. 오늘 같이 잘래?2022.01.26.

16550879674753.jpg“내가 너한테 줬던, 푸른 장미의 꽃말이 뭔 줄 알아?”

묵직한 숨소리가 귓가에서 어른거리자 겨울의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새까만 눈동자가 겨울을 꿰뚫을 듯이 응시했다.

16550879674753.jpg“포기하지 않는 사랑.”

겨울의 눈동자가 뒤흔들렸다. 무더운 열기에 몸이 굳은 듯 숨을 쉴 수 없었다. 어차피 결과가 정해진 관계였지만, 그걸 꿈에도 모르는 현재의 시후는 그저 올곧게 자신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겨울은 왠지 죄를 짓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도저히 눈을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겨울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올리며 시선을 맞추어왔다. 이내 느리게 고개를 비튼 시후가 다시 한번 겨울의 입술을 부드럽게 감쳐 물었다. 한차례 다시금 속살을 헤집으며 키스를 퍼붓자 겨울이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며 그의 코트를 꼭 움켜쥐었다. 그런 겨울이 귀엽다는 듯 살포시 웃음을 터뜨린 시후가 그녀의 콧잔등에 입을 맞추었다. 쪽, 입술이 닿은 부위가 화상을 입은 듯 화끈거렸다. 시후는 겨울의 머리카락을 뒤로 부드럽게 넘겨주며 웃었다.

16550879674753.jpg“꿈 같아.”

끈적한 목소리가 겨울의 피부에 감겼다.

16550879674753.jpg“지금 이 순간, 네 곁에 있을 수 있어서 행복해.”

진솔한 고백에 겨울은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혼미해진 머릿속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16550879674771.jpg‘……나, 어떡해.’

한 달 뒤, 이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끝없는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밤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집에 도착한 시후와 겨울은 조금 미묘한 분위기로 현관으로 들어섰다. 겨울이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며 시후에게 속닥거렸다.

16550879674771.jpg“벌써 잘 시간이네.”

16550879674753.jpg“그러게. 시간이 빠르다.”

……이 복잡미묘한 분위기는 대체 무엇인가.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겨울이 마른 입술만 달싹거렸다. 집 안으로 들어섰지만 두 사람은 아직도 손을 잡고 있는 상태였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겨울이 황급히 시후의 손을 놓고 신발을 빠르게 벗었다. 어색한 기분에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뒤에서 시후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0879674753.jpg“오늘 같이 잘래?”

뜻밖의 말에 흠칫한 겨울의 눈이 휘둥그레 뜨여졌다. 놀란 눈으로 시후를 가만히 바라보자 되려 당황한 시후가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16550879674753.jpg“아니, 그…… 이상한 뜻은 아니고.”

16550879674771.jpg“……그럼 무슨 뜻인데?”

16550879674753.jpg“……음.”

16550879674771.jpg“…….”

분위기는 점점 더 수렁으로 빠져가고 있었다. 마음만 앞서 괜한 말을 던졌다는 생각에 시후는 속으로 뼈저리게 후회했다. 더는 변명할 길도 없자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자니 조금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약 1분간 서로 멍청하게 바라만 보는데…….

16550879674771.jpg“그래. 같이 자자.”

의외의 대답이 겨울의 입술 틈으로 흘렀다. 시후는 상상도 못 한 승낙이 신경 쓰여 겨울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16550879674753.jpg“……정말?”

16550879674771.jpg“응. 일단 샤워부터 하고 올게, 그러면.”

16550879674753.jpg“그래. 씻고 나와.”

애써 무던한 척 답했지만 사실 지금 시후의 심장은 곧 떨어질 것처럼 쿵쾅대고 있었다. 겨울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시후가 깊은숨을 토해내며 벌렁거리는 가슴을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뛰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널뛰며 머리가 취한 듯 어지러웠다. 물론, 진심으로, 추호도 건들 생각은 없었다. 혼자 마음만 앞서 들이댔다가 겨울을 무섭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냥 정말 순수하게 어렸을 때처럼 손만 잡고 얌전히 잘 생각이었다. 하지만 설레는 마음은 도무지 진정되지 않고…….

16550879674753.jpg“하아.”

시후는 조금 붉어진 귀를 손으로 쓸며 한숨지었다. *** 한편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온 겨울은 세면대 앞에 서서 물을 틀어놓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16550879674771.jpg“……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같이 자자고 한 거지, 지금? 나는 거기다 대고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며 알겠다고 답한 거고? 겨울은 비명이라도 새어 나올 것 같아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며 거울을 보았다가 문득 빨갛게 부풀어 오른 제 입술이 시야에 들어왔다. 조금 전 오래도록 나누었던 진득한 키스가 떠오르자 얼굴에 화르륵 불이 붙었다. 입술을 흐무러지도록 빨아들였던 행위와 입안을 무례하게 침범하여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녔던 느낌이 떠오르자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더욱 부끄러운 것은 좋다고 끌려가 함께 뒤섞였던 저 자신의 행동이었다.

16550879674771.jpg“창피해…….”

점점 강시후와 있으면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기분이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이 풀린 겨울은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 씻고 나온 시후는 보디로션을 꼼꼼히 바른 뒤 잠옷 바지와 가운을 걸쳐 입었다. 살짝 마른침을 삼킨 시후는 조금 긴장한 상태로 괜히 이부자리를 만지작거리며 겨울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똑똑 문을 두드린 겨울이 방 안으로 살금살금 걸어들어왔다.

16550879674753.jpg“……뭐야?”

겨울의 모습을 본 시후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16550879674771.jpg“뭐가?”

정작 겨울은 뭐가 문제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시후는 할 말을 잃고 입술만 벙긋거렸다. 긴소매 잠옷, 긴바지.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 위에 수면 잠옷을 껴입고 그 위에 털이 북슬북슬 달린 원피스를 하나 더 껴입을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대체 몇 겹을 껴입은 건지, 이글루에서 생활하는 사람도 저렇게는 안 입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이상한 장갑은 왜 끼고 있는 건지, 보이는 살이라곤 오직 얼굴뿐이었다.

16550879674753.jpg“설마 그러고 잘 거야?”

16550879674771.jpg“응. 내가 추위를 많이 타서 말이지.”

16550879674753.jpg“너…….”

이럴 거면 같이 자자는 말에 허락은 왜 했냐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정말 손댈 생각은 하나도 없었는데, 저렇게까지 중무장을 하니 왠지 치한 취급을 당한 기분이었다.

16550879674753.jpg“그래. 어디 이글루에서 동침하는 기분으로 같이 자보자.”

16550879674771.jpg“으으응. 근데 있잖아…….”

말꼬리를 늘인 겨울이 등 뒤에 숨기고 있던 것을 꺼내 보였다.

16550879674771.jpg“오빠도 옷 더 입어야지. 없으면 이거 입어.”

16550879674753.jpg“…….”

오빠 소리에 심쿵한 것도 잠시, 겨울이 꺼내 보인 것은 커다란 토끼가 그려져 있는 분홍색 수면 잠옷이었다.

16550879674753.jpg“……이거 나한테 안 맞을걸?”

16550879674771.jpg“커서 대충 맞을 것 같은데? 일단 그 위에 입어 봐.”

안 입으면 같이 못 자게 할 게 뻔했다. 두 손 두 발 다 든 시후가 할 수 없이 가운 위에 수면 잠옷을 대충 구겨 입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작은 수면 잠옷의 어깨선은 하나도 맞지 않았다. 게다가 섬유 위로도 용솟음치는 우람한 근육들 때문에 대략 터질 것 같은 비주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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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도 안 되는 그 부조화에 웃음을 터뜨린 겨울이 제 입가를 가렸다.

16550879674771.jpg“잘 어울리는데? 귀엽다.”

놀리듯이 웃는 미소에도 그만 사르르 녹아버린 시후는 해탈한 사람처럼 따라 웃었다.

16550879674753.jpg“네가 더 귀여워.”

……짝사랑이 죄지, 죄야. 이제 슬슬 잠자리에 드는가 했는데, 겨울은 커다란 침대 정중앙에 분홍색 곰 인형을 떡하니 갖다 놓았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하는 표정으로 겨울을 바라보자 그녀가 웃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16550879674771.jpg“이 곰 인형 건너편으로 절대 넘어오지 마.”

시후는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이럴 거면 그냥 따로 자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자는 겨울의 얼굴이라도 가만히 구경하고 싶은 욕심에 꾹 참았다.

16550879674771.jpg“넘어오면 바로 신고할 거야.”

16550879674753.jpg“무슨 신고?”

퉁명스러운 겨울의 말에 시후가 헛웃음 쳤다.

16550879674753.jpg“혼인신고? 우리 이미 신고해서 또 못 하는데.”

16550879674771.jpg“경찰에 신고.”

16550879674753.jpg“…….”

16550879674771.jpg“아니면 이혼신고는 어때?”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얼굴이 악마나 다름없었다. 시후가 제일 무서워하는 걸 약점 삼아 협박하니 별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16550879674771.jpg“어쨌든 국경이라고 생각하고 절대 넘어오지 마. 여긴 함겨울 구역. 거긴 강시후 구역.”

16550879674753.jpg“……여권 있으면 들여보내 주나?”

은근슬쩍 장난삼아 떠보았으나 겨울이 정색하며 시후를 째려보았다.

16550879674753.jpg“안 넘어가. 네가 오라고 애원해도 절대 안 넘어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렇게 말하면서도 솔직히 억울해서 결국 따지듯 묻고 말았다.

16550879674753.jpg“근데 이럴 거면 왜 같이 자는 거 허락한 거야?”

16550879674771.jpg“왜? 무슨 이상한 짓 하려고 했나?”

16550879674753.jpg“……그럴 리가. 절대. 내 순수한 의도를 매도하지 마.”

16550879674771.jpg“그럼 조용히 잠이나 잡시다, 이제.”

대꾸한 겨울이 목을 가다듬으며 침대 한쪽에 정자세로 누워 눈을 감았다. 말은 그래도 사실 그 누구보다 긴장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겨울이었다. 뻣뻣하게 굳은 몸과 미세하게 꼼지락거리는 손끝에서 그 미묘한 긴장이 읽혔다. 스탠드를 끄는 소리가 들려오고 겨울은 마른침을 삼켰다. ……오늘 잠을 잘 수 있을까? 자신은 없었으나 억지로 눈을 꽉 감은 채 잠을 자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묘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이상한 기류를 느낀 겨울이 비스듬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눈앞을 가득 메운 것은 남자의 널찍한 상체였다.

16550879674771.jpg“꺄아아악!”

기겁한 겨울이 그대로 용수철처럼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갑자기 일어난 겨울의 머리에 코를 얻어맞은 시후가 한 손으로 얼얼한 코를 쥐었다.

16550879674753.jpg“윽…….”

16550879674771.jpg“너, 너, 너, 지금 나한테 뭐 하려고 했어?!”

16550879674753.jpg“내가 대체 뭘?”

16550879674771.jpg“넘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16550879674753.jpg“핸드폰 협탁에 놓으려고 한 건데.”

16550879674771.jpg“뭐?”

그 말에 겨울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시후의 옆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협탁은 겨울의 쪽에만 있었다.

16550879674771.jpg“아…….”

조금 뻘쭘해진 겨울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 옆의 시후는 괴로운 듯 제 코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16550879674753.jpg“코 부러진 것 같아.”

16550879674771.jpg“뭐? 스탠드 켜봐.”

시후가 코를 잡고 있는 손이 아닌 다른 손으로 더듬더듬 스탠드를 켰다. 겨울이 심각한 표정으로 시후의 손을 떼어냈으나 코는 부러지기는커녕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우뚝 솟아 있었다.

16550879674753.jpg“코피 나지?”

16550879674771.jpg“멀쩡하거든.”

16550879674753.jpg“이렇게 아픈데? 코가 좀 주저앉은 거 같지 않아?”

16550879674771.jpg“높기만 한데 왜 난리야. 이 정도면 한 1cm 줄어들어도 티도 안 나겠구만.”

16550879674753.jpg“그거 칭찬이지?”

시후가 장난스럽게 웃자 겨울이 으휴, 소리 내며 확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

16550879674753.jpg“근데…….”

그 너머로 쏟아지는 섹시한 음성이 겨울의 고막을 적셨다.

16550879674753.jpg“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게 문제였어?”

겨울의 손가락이 머뭇거리며 움츠러들었다.

16550879674753.jpg“그럼 기대할게. 마음의 준비 될 때.”

16550879674771.jpg“……평생 될 일 없거든?”

겨울이 빨개진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며 대꾸하자 시후가 나지막이 웃었다.

16550879674753.jpg“잘 자, 겨울아.”

이래서야 도무지 잠이 올 리가 없었다. 길고 긴 밤, 한 침대에 누운 건강한 성인남녀는 한참 동안 잠들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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