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이상한 하룻밤2022.01.30.
한참 동안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겨울이 잠이 든 것은 야심한 새벽이었다. 겨울은 언제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냐는 듯 태평하게 입까지 벌리고 꿀잠을 자는 중이었다. 반면 여전히 한숨도 자지 못한 시후는 그런 겨울을 흘끔 바라본 후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아직 한겨울도 아닌데 수면 잠옷을 껴입고 있자니 답답함이 몰려왔다. 은근슬쩍 자는 겨울의 눈치를 보며 수면 잠옷을 벗어 침대 밑에 내려놓은 시후는 다시금 침대에 몸을 뉘었다. 조금 편안해진 기분으로 제게 등 돌린 채 자는 겨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깐 선잠이 든 시후는 잠결에 느껴지는 달콤한 향기에 비스듬히 눈을 떴다. 놀란 눈이 소리 없이 커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두꺼운 잠옷을 전부 벗어 던지고 얇은 옷 하나만 입고 있는 겨울이 떼구르르 굴러와 시후의 품에 쏙 안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잠결에 더워서 옷을 벗은 것 같았는데, 그렇게 철벽이란 철벽은 혼자 다 쳐놓고 정작 먼저 선을 넘은 건 겨울이었다. 작게 헛웃음 친 시후는 제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새근새근 자는 겨울의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기다란 속눈썹과 오뚝한 코, 헤 벌어진 빨간 입술을 차례로 훑은 시후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으음…….”
작게 신음한 겨울이 시후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더욱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 야릇한 행동에 움찔한 시후의 심장은 이내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얇은 잠옷 너머로 느껴지는 말랑말랑한 살결에 시후가 아득하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자리를 피하기로 한 시후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껌딱지처럼 딱 달라붙어서 굵직한 허리를 붙잡고 있는 가녀린 팔은 결코 떨어질 기미가 없었다. 겨울의 손을 붙잡아 떼어낼까 했지만, 단잠이 든 그녀를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다시 침대에 누운 시후는 작게 한숨 쉬며 겨울을 흘끗 보았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왼쪽 손을 조심스레 움직여 겨울의 어깨 위에 살포시 올렸다. 그러자 허리를 붙잡고 있던 작은 손이 은근하게 꾸물거리더니 시후의 얇은 가운 틈을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탄탄한 맨 허리를 더듬거리는 자그마한 손에 시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함겨울은 함겨울이다. 밤새 번뇌에 시달린 시후는 결국 한숨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뜬금없이 보이는 남자의 가슴에 화들짝 놀란 겨울의 입이 떡 벌어졌다.
“꺄악!”
그리고 시후의 가운 틈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는 제 왼쪽 손을 보고는 자지러지게 비명을 질렀다. 불에 덴 듯 손을 떼고는 저만치 멀어져서 제 가슴을 두 팔로 확 가렸다. 한바탕 일어난 소란에 이제 막 조금 잠이 들려던 시후가 미간을 문지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야, 강시후 너! 내가 이쪽으로 오지 말라고 했잖아!”
“……네가 굴러온 거잖아.”
“내가 언제……!”
“침대를 봐. 이 넓은 침대에서 네가 어느 쪽으로 치우쳐 있는지.”
그 말에 흘끔 주위를 둘러본 겨울이 입술을 옹송그려 물었다. 누가 보더라도 명확하게 시후 쪽으로 치우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떼어냈어야지! 좋다고 붙어 있냐?”
“네가 허리 붙잡고 안 놔줬잖아?”
“기억 못 한다고 조작하기야? 왜, 내가 아주 덮치려고 했다고 그러지?”
겨울의 말에 시후는 억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세상 순수한 마음과 의도로 같이 자자고 했을 뿐이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진짜 치한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내가 정말 널 건들기라도 했으면 이렇게 억울하진 않았을 것 같아.”
이 미칠듯한 억울함을 표명할 길이 없어 시후는 너저분하게 말을 이었다.
“근데 나 진짜 너 건든 적 없어. 결백해.”
“…….”
“솔직히 머릿속으로는 별짓 다 했어도, 전부 생각으로만…….”
그 말에 겨울의 얼굴이 앵두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저도 모르게 본심이 나오자 당황한 시후가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취소. 이 말 취소할게.”
“됐어! 앞으로 내가 이 침대에서 다시 자나 봐!”
발갛게 물든 얼굴로 한바탕 성을 낸 겨울이 씩씩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흩뿌려진 수면 잠옷들을 챙긴 겨울이 제 방으로 돌아가려는 찰나였다.
“그럼 다음엔…… 내가 네 침대에서 잘까?”
시후가 넌지시 던진 물음에 겨울이 말없이 그를 찌릿 노려보았다. 곧바로 깨갱거린 시후가 무해하게 두 손을 펼쳐 보였다.
“알았어. 조용히 할게.”
커다란 덩치와 안 어울리게 제 눈치나 살살 살피는 게 조금 우스웠다. 겨울은 순간 살짝 웃음이 터질 뻔했으나 가까스로 참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
“잠깐 앉아봐, 겨울아.”
같이 아침을 먹은 뒤 두 사람은 거실에 마주 보고 앉았다. 시후는 서재에서 가져온 갈색 봉투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이게 뭐야?”
“이혼 신고서야.”
그 말에 겨울의 가슴에는 돌덩이가 쿵 내려앉는 듯했다.
“난 도장 찍었고, 너만 하면 돼.”
살짝 놀란 겨울이 갈색 서류 봉투와 시후를 번갈아 보았다.
“왜 그래?”
“아니, 그냥…… 벌써 준비해놓은 줄은 몰랐네.”
떨떠름하게 답한 겨울이 서류 봉투를 받아들었다.
“서류는 같이 제출하러 가자. 언제 갈래?”
덤덤하게 물어오는 시후의 말에 겨울은 애꿎은 입술만 달싹거렸다. 분명히 그동안 이혼해달라고 계속해서 요구했던 건 나인데. 이혼해주는 대신, 한 달 숙려기간 동안 연애하자는 그의 조건에 응한 것도 나인데. 왜…….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
“다음 주에 가자. 나도 도장 찍어서 돌려줄게.”
겨울은 일렁이는 가슴을 외면하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작게 웃은 시후는 소파에서 일어나 겨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클레르까지 데려다줄까?”
“아니야. 괜찮아. 혼자 가도 돼.”
“그럼 이따가 끝나고 나서는 데리러 갈게. 문자 보내.”
곧 이혼 서류를 제출할 사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세상 다정한 목소리와 미소였다. 시후의 말에 겨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르에 출근하는 동안 겨울은 계속해서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속이 체한 듯 답답해서 제 가슴을 두어 번 내리쳤으나 여전히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모든 게 결국 다 내 마음대로 된 건데…….’
원하던 이혼을 할 수 있게 된 건데, 대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작게 한숨을 내쉰 겨울은 복잡한 머리를 카페인으로 날려버리기 위해 오늘도 출근 전 카페에 들렀다.
“겨울 씨, 안녕하세요.”
언제봐도 서글서글하니 성격 좋은 석우는 겨울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 네. 안녕하세요.”
“오늘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드릴까요?”
“네. 샷 추가해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석우는 곧바로 능숙하게 커피를 제조해 건넸다.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든 겨울이 눈인사하고 떠나려는 찰나, 석우가 겨울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그런데 무슨 일 있어요? 표정이 안 좋은 것 같아서요.”
“아……. 잠을 잘못 자서 그런가 봐요.”
조금 어색하게 웃음으로 회답한 겨울이 고개를 숙였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나중에 또 봬요.”
남들 눈에 보일 정도로 제 심란한 마음이 얼굴에까지 묻어나온 건가 싶었다. 작게 한숨 쉰 겨울이 카페의 문을 나서려는데, 동시에 가게 안으로 화려한 복장을 한 여자가 들어섰다. 지독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찌르자 겨울은 저도 모르게 흘끗 여자를 바라보았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도배를 하고 있었다. 살짝 눈이 마주치자 흠칫한 겨울은 곧바로 카페를 나와 클레르 스파로 향했다. 겨울이 떠나자 여자는 제 선글라스를 벗으며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카페 도스 트레스 신코입니다.”
석우가 웃으며 인사하자 여자는 빨간 입술을 길게 늘어뜨렸다.
“도스 트레스 신코…… 스페인어?”
“네. 잘 아시네요.”
“내가 젊었을 때 스페인에서 유학을 좀 했거든요.”
픽 웃은 여자는 지갑에서 카드를 건네며 웃었다.
“멋있네요.”
*** 클레르에 도착한 겨울은 분주하게 오늘의 첫 번째 예약 손님을 받을 준비를 했다. 오늘 첫 번째 고객은 클레르 스파의 첫 방문이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관리를 해야 했다. 지속적인 고객으로 이어지려면 그만큼 첫 관리에서 최고의 만족을 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관리를 도와드릴 테라피스트 함겨울입니다.”
첫 번째 고객이 관리실 안으로 들어서자 겨울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가 멈칫했다. 조금 전 카페에서 만났던 화려한 차림의 여자였다. 살짝 놀랐지만 잠깐뿐이었다. 겨울은 다시금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가 오늘 케어받으실 룸입니다. 안쪽 옷장에 입고 계신 겉옷과 속옷까지 모두 탈의하시고, 일회용 속옷과 가운, 두 가지만 입어주신 다음에 벨 눌러주세요.”
겨울의 말에 여자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고개를 삐딱하게 끄덕였다.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는 길게 찢어진 눈으로 겨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어내렸다. 꺼림칙한 시선에 겨울은 기분이 나빴지만 능숙하게 표정을 가다듬으며 관리실을 나왔다. 이후 족욕을 하고 오일을 초이스 하는 동안 여자는 계속해서 겨울을 깔보는 듯한 태도를 유지했다.
“베드 온도는 괜찮으실까요?”
“뜨거워. 온도 내려.”
“네, 알겠습니다.”
처음 보는 사이에서 반말을 찍찍하는 것도 불쾌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싫은 것은 자꾸만 겨울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었다.
“이 정도 세기 괜찮으세요?”
하지만 이런 일로 얼굴을 구기면 프로라고 할 수 없었다. 겨울은 웃으며 여자의 몸을 능숙하게 마사지했다. 여자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괜찮다는 뜻으로 해석한 겨울이 마사지를 이어 하는데, 돌연 여자가 겨울의 손목을 확 움켜쥐었다.
“아프다니까?”
“……아. 네, 고객님. 압 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손목을 잡히자 당황한 겨울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여자는 겨울의 손목을 놓지 않고 계속 붙잡고 있었다. 엎드려 있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겨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픽 웃었다.
“머리가 고장 났다더니 진짜인가 보네?”
“……네?”
놀란 겨울의 동공이 거칠게 뒤흔들렸다.
“제 시어미도 못 알아보는 걸 보니 말이야.”
시후의 새어머니, 유서진은 빨간 입술을 늘어뜨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일순 가슴이 섬뜩해진 겨울의 등 뒤로 식은땀 한줄기가 흘렀다. 심장이 엄청난 속도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