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 여진 (42/112)

42. 여진2022.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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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881662163.jpg“오빠 맞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겨울은 아무렇게나 입술을 움직였다.

16550881662163.jpg“12년 전 그 불타는 창고에서 나 구해준 사람.”

시후의 까만 눈동자가 고요하게 흔들렸다.

16550881662163.jpg“강시후 맞잖아…….”

사고 이후, 병원과 경찰에서는 겨울에게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끝끝내 말해주지 않았다. 그 당시, 겨울은 제 목숨을 살려준 은인을 위해서라도 꿋꿋하게 살아가자고 스스로 되뇌었었다. 그리고 흐르는 시간 속에서 삶이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져 다시금 충동적인 마음이 들 때, 그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남자를 떠올리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었다. 목숨을 걸고 이 한 몸 살려준 그를 위해서라도, 절대 이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얼굴은 당연히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삶의 벼랑 끝에 내몰려 있던 나를 구원했던 그 따뜻한 손길을 기억할 뿐.

16550881662163.jpg“……오빠.”

17살, 어렸을 때부터 겨울은 오래도록 강시후를 증오해왔었다. 제게 등을 돌리고 차갑게 외면했던 그가 미웠고, 모진 말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던 그가 죽도록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의 뾰족한 말과 행동들은 겨울의 가슴에 생채기를 남겼었을지언정, 사실상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11년 전, 천만 원을 돌려주려고 갔던 겨울에게 그는 날이 선 말로 그녀의 자존심을 바닥까지 끌어내렸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천만 원으로 엄마의 병원비, 이경의 합의금, 월세, 생활비, 학비 등등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남자의 돈이 겨울의 인생을 구제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6550881662163.jpg“왜 그랬어?”

겨울은 끊어질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16550881662163.jpg“대체 오빠 진심이 뭐였던 거야?”

물기에 젖은 목소리가 갈라지며 흘러나왔다. 심장이 아리도록 뛰었다. 한 번 터진 눈물샘에서는 쉴새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16550881662163.jpg“우리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거야…….”

……역시 그때, 우리 서로 사랑했던 거 맞잖아. 같은 마음이었던 거잖아……. 하얀 볼로 떨어지는 눈물을 가만히 응시하는 시후의 마음은 먹먹하게 조여들었다. 서로 어떠한 계산도 없이 그저 행복하게 웃을 수 있었던, 함께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즐거웠던 오래전의 기억이 이제는 아득했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심장이 부서질 것처럼 욱신거렸다. 칼날이 가슴을 관통한다고 한들 이보다 아프지는 않을 것 같았다.

16550881662204.jpg“……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잖아.”

겨울이 과거에 그녀를 구한 사람이 자신이란 걸 눈치챘다고 한들, 한시라도 빨리 제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그녀에게 마음의 짐을 지워주고 싶지는 않았다. 부디 그녀가 과거의 일에 무게를 느끼지 않기만을 바랐다.

16550881662204.jpg“네가 무사한 게 중요하지, 누가 널 구했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그 말에 입술을 짓씹은 겨울은 극심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이상하게 속이 타들어 가고 이유 모를 서러움이 밀려 들어왔다. 12년 전 그 사건은 겨울을 오래도록 지독하게 괴롭혀 왔었다. 밤에는 수없이 악몽을 꾸었고, 트라우마에 오래도록 폐소공포증까지 앓았었다. 자칫하면 죽었을지도 모르는 그날의 기억은 아리도록 제 가슴을 짓눌러왔고, 그날 저를 구해준 신원미상의 남자를 생각하며 지금껏 치열하게 살아왔다. 저한텐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였는데…….

16550881662163.jpg“그럼 대체 뭐가 중요한데……?”

그는 또 제멋대로 중요하지 않다고 단정 지으며 선을 그었다. 울컥 치받쳐온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겨울이 울음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16550881662163.jpg“날 구한 게 오빠란 걸, 대체 왜 말하지 않았어?”

격양되는 감정이 떨리는 음성에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16550881662163.jpg“왜 내가 평생 오빠를 원망하며 살아가게 둔 건데…….”

한때는 바라만 봐도 행복했던 남자를, 죽도록 미워하는 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이 괴로운 일이었다.

16550881662204.jpg“……속이려고 했던 건 아니야.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뿐이지.”

그 대답에 겨울은 허탈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대체 왜 스스로 판단하고 제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걸까. 혼란스러움이 밀려오며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눈물이 시야를 가리고 겨울은 지난 세월 시후를 원망하며 살아온 시간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16550881662163.jpg“바보가 된 기분이야……. 난 정말 오빠 마음을 모르겠어.”

내가 눈치채지 못했다면 그는 평생 이 사실을 비밀로 할 생각이었던 걸까?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고 입안이 바싹 말랐다.

16550881662163.jpg“전에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지? 그럼 나도 하나만 묻자.”

16550881662204.jpg“…….”

16550881662163.jpg“왜 그랬어?”

힘겹게 입술을 떼어낸 겨울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16550881662163.jpg“그 창고에서 목숨 걸고 날 구해줬으면서, 그렇게 심하게 다치면서까지 날 생각해줬으면서…….”

가팔라진 호흡에 시후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16550881662163.jpg“왜 앞에서는 그렇게 모질게 대한 건데? 왜 나한테 그렇게 쉽게 등을 돌린 건데…….”

16550881662204.jpg“…….”

16550881662163.jpg“미안하다는 말 말고.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16550881662204.jpg“…….”

16550881662163.jpg“또 내가 모르는 게 있는 거지……? 뭐라고 말을 좀 해봐.”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가 놓은 시후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12년 전, 아버지가 너와 어울리면 네 인생을 완전히 무너뜨리겠다고 협박했었던 일? 널 해치지 않는 조건으로 너와 절대 엮이지 않겠다고 무릎 꿇고 아버지에게 약조했던 일? 알량한 생각으로 네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억지로 천만 원을 쥐여주려고 한 일? 심지어는 최근까지도 아버지는 겨울과 그녀의 가족들을 해치려고 했다. 이 결혼은 그 위협으로부터 그녀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혼하게 되면 다시금 아버지가 겨울과 그녀의 가족들에게 해코지하려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걸 이유로 이 결혼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겨울을 강제로 붙잡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저와 있으면 한없이 불행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까. 나는 어떻게 해서든 널 아프게만 하니까. 이혼 후 겨울이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는 몰래 사람을 붙여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을 몰래 지켜줄 생각이었다. 기억을 찾으면 혼전계약서의 내용대로 아버지의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가족들과 함께 떠나라고 할 생각이었다. 이 모든 일련의 사실을 알게 되면 그땐……. 네가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녀가 겪을 불안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겨울에게 언제까지나 비밀로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기 위해 입술을 벌렸으나 쉽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16550881662163.jpg“……끝까지 비겁하네.”

겨울은 한참 동안 아무 말 고개를 떨군 채 가만히 있는 시후를 보며 낮게 읊조렸다.

16550881662163.jpg“난 기억도 사라져서 없고, 이제 믿을 건 오빠밖에 없는데…….”

터진 상처로부터 흘러내린 진물은 오래된 아픔까지 건드리며 점점 더 곪아갔다. 겨울이 자신의 턱 끝에 맺힌 물방울을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닦아내며 너저분한 음성을 내었다.

16550881662163.jpg“그래. 이제 와서 과거가 다 무슨 소용이겠어. 어차피 우리는 이혼할 사이인데.”

헤집어진 가슴이 난도질당한 듯 괴로웠다.

16550881662163.jpg“아니, 이미 이혼 서류까지 제출한 사이지.”

16550881662204.jpg“……겨울아.”

16550881662163.jpg“솔직히 나 착각했어. 근 며칠 오빠가 나한테 계속 잘해주니까, 어쩌면 날 사랑한다는 게 진심이 아닐까 하고.”

뜨거워진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낮게 숨을 뱉은 겨울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16550881662163.jpg“근데……. 솔직하지 못한 거, 그거 사랑 아니야.”

시후에게 등 돌린 겨울이 나지막이 속삭인 뒤 방문에 손을 얹었다.

16550881662163.jpg“그러니까 이제 나 그만 흔들어.”

한마디를 남긴 겨울은 그대로 시후를 남겨두고 방 밖으로 나갔다. 도무지 이 집에 그와 함께 있을 자신이 없어 무작정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홀린 사람처럼 불 꺼진 비상계단을 따라 빠르게 내려갔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멈춰선 겨울은 저도 모르게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16550881662163.jpg“뭘 기대한 거야, 함겨울……. 바보같이.”

발갛게 부은 눈가를 문지르자 또다시 울컥 코끝이 찡해졌다. 왜 이렇게 계속 눈물이 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제 목숨을 구해준 남자가 강시후였다는 사실도, 그것도 모르고 지금껏 바보처럼 그를 원망만 해왔다는 것도. 결국 끝까지 제게 입을 열지 않던 강시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그에게 흔들리는 내 마음도……. 모든 게 미칠 듯이 억울하고 서러웠다. 그리고 일어난 균열을 틈으로 문득 파고드는 오민주의 말.

16550881747434.jpg‘특히나 겨울 씨처럼 하루아침에 신데렐라 된 여자들은 더더욱 조심해야 해요. 그건 하루아침에 다시 버려질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잊어버려야 마땅한 악랄한 말을 한심하게도 가슴에 품고 버리지 못하는 내가 있다. 그리고 오민주의 네 번째 손가락에 보란 듯이 끼워져 있던 내 결혼반지.

16550881662163.jpg“흐윽……. 흑…….”

뭐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 건지. 도대체 나는 누굴 믿어야 하는 건지…….

16550881662163.jpg“……흐윽…….”

자꾸 제게 진실을 감추려는 그를 향한 믿음은 얕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에라도 과거의 이야기를 해 주지 않는 남자였으니까. *** 겨울이 떠나버리고 방 안에 홀로 앉은 시후는 복잡한 심경을 감출 수 없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고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커다란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떨어지던 광경이 계속해서 눈앞에 어른거려 눈가가 뜨거워졌다.

16550881662163.jpg‘난 기억도 사라져서 없고, 이제 믿을 건 오빠밖에 없는데…….’

나는 또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그녀를 지켜주기 위해 한 결혼이었지만, 나는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 주지도 못했고, 든든한 아군이 되어 주지도 못했다. 대체 나는 뭘 하고 있는 걸까……. ……내가 지키고 싶었던 건 네 미소였는데. 오히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할 뿐이었다.

16550881662204.jpg‘역시 나는 어떻게 해서든 널 아프게만 하는 건가.’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고 함께 이겨내자고 말했다면, 이렇게까지 상황이 악화하지는 않았을 텐데.

16550881662204.jpg‘한심해…….’

주먹을 꽉 움켜쥔 시후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이라도 정신을 찾고 겨울을 뒤쫓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빠르게 방 밖으로 향하려다가 실수로 방문에 걸려 있는 겨울의 가방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16550881662204.jpg“아…….”

내용물이 엎질러지고 짧은 숨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다급하게 무릎을 접은 시후는 물건들을 주워 가방 안에 도로 넣었다. 그런데, 문득 한 서류 봉투에 시선이 닿고 빠르게 움직이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서류 봉투 밖으로 살짝 삐져나온 하얀 종이에는 ‘혼전계약서’라고 적혀 있었다. 살며시 미간을 좁힌 시후는 천천히 손을 뻗어 봉투 안 서류를 꺼내 보았다. [유서진(이하‘갑’)와(과) 함겨울(이하‘을’라고 한다)는(은) 다음과 같이 계약을 체결한다. 제1조(계약의 목적) 본 계약은 갑이 을의 결혼 생활을 제한하는 것에 대한 대가를 지급함에 있어 양 당사자 간의 권리 의무 및 기타 제반 사항을 규정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시후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이건 겨울과 새어머니 유서진이 쓴 계약서가 틀림없었다. [제2조 (권리와 의무) ① 을은 남편 강시후와의 결혼 생활에서 부부관계를 맺을 시 피임을 철저하게 이행하도록 한다. ② 제1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신하게 되었을 경우, 을은 남편 강시후에게 알리지 않고 즉시 임신중절수술을 받아야 한다.] ……이게 무슨. 계약서를 쥔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머리가 차게 식고 눈앞이 칠흑처럼 어둡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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