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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진실의 행방 (43/112)

43. 진실의 행방2022.02.27.

서류 봉투 밖으로 살짝 삐져나온 하얀 종이에는 ‘혼전계약서’라고 적혀 있었다. 살며시 미간을 좁힌 시후는 천천히 손을 뻗어 봉투 속 서류를 꺼내 보았다. [유서진(이하‘갑’)와(과) 함겨울(이하‘을’라고 한다)는(은) 다음과 같이 계약을 체결한다. 제1조(계약의 목적) 본 계약은 갑이 을의 결혼생활을 제한하는 것에 대한 대가를 지급함에 있어 양 당사자 간의 권리 의무 및 기타 제반 사항을 규정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시후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이건 겨울과 새어머니 유서진이 쓴 계약서가 틀림없었다. [제2조 (권리와 의무) ① 을은 남편 강시후와의 결혼생활에서 부부관계를 맺을 시 피임을 철저하게 이행하도록 한다. ② 제1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신하게 되었을 경우, 을은 남편 강시후에게 알리지 않고 즉시 임신중절수술을 받아야 한다. 제3조 (대가) ① 갑은 을의 결혼생활을 제한하는 것에 대가로 100,000,000원을 을의 지정 계좌에 지급한다.] ……이게 무슨. 계약서를 쥔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머리가 차게 식고 눈앞이 칠흑처럼 어둡게 물들었다. 이 말도 안 되는 계약서의 가장 아래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것은 틀림없는 겨울의 날인이었다. 바로 오늘 함께 법원에 제출한 이혼 서류에도 똑같은 서명이 적혀 있었다.

16550881840749.jpg“…….”

일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몰아치며 시후의 동공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풍랑에 맞은 듯 표류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들고 있던 서류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기억을 잃기 전, 겨울이 제게 적대심을 품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몰래 이런 계약서를 썼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16550881840749.jpg“하…….”

헛숨을 터뜨린 시후는 잇새를 악물었다. 그녀는 이 결혼에 단 한 번도 진심이었던 적이 없는 것이다. 이런 계약서를 썼던 겨울이, 자신을 사랑하게 될 일은 끝내 없을 터였다. 그리고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의 결혼생활이 행복할 리 없었다. 반쯤 나가버린 정신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저 멀리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한참 동안 넋을 놓고 바닥을 바라보던 시후를 깨운 것은 시끄러운 진동 소리였다. 초점이 어긋난 까만 동공이 옆에 놓인 핸드폰으로 향했다. 액정 화면에 떠오른 ‘아버지’라는 세 글자에, 까만 눈에는 불길이 일었다. *** 눈물을 닦고 겨우 마음을 추스른 겨울은 미래에서 온 서른아홉의 강시후가 임시로 머무는 호텔에 찾아갔다. 지금 기분으로는 도저히 단둘이 밀폐된 호텔의 룸에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호텔의 최상층에 위치한 라운지 바로 올라오라고 문자를 남겼다. 겨울이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인 블랙 러시안을 주문하고 하릴없이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뚫어져라 휴대전화를 바라보았으나 시후에게서는 연락 한 통 없었다. 그렇게 헤어지고 내내 말이 너무 심했나 싶어 마음이 불편했는데, 이렇듯 조용한 휴대전화를 보니 다시금 부아가 치밀었다. 무작정 잔을 들어 올린 겨울이 글라스 안에 담긴 얼음을 세게 씹었다. 얼음을 분쇄하는 소리가 고요한 라운지 바를 울리고, 이내 묵직한 걸음걸이가 가깝게 다가왔다. 익숙한 실루엣의 남자는 겨울의 건너편에 앉았다. 조명이 어두운 라운지 바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오늘도 역시나 마스크와 선글라스, 모자로 얼굴을 완전히 가린 복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바텐더에게 와인을 한 잔 주문하고 느른하게 팔짱을 꼈다. 비스듬히 어둑한 시선이 꽂히자 겨울의 입술이 경직되었다.

16550881840763.jpg“이혼은 잘 되어 가나?”

만나자마자 인사도 없이 그는 이혼부터 말을 꺼냈다. 무례함에 불쾌해진 겨울이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16550881840766.jpg“……당신, 솔직히 말해봐요.”

16550881840763.jpg“뭘?”

16550881840766.jpg“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있어요?”

일순 놀란 듯 그의 호흡이 멎었다. 찰나의 동요를 포착한 겨울이 확신을 갖고 다시금 물었다.

16550881840766.jpg“우리가 8년 후 이혼한 게, 정말 사이가 나빠져서 이혼한 거 맞아요?”

16550881840763.jpg“……그래. 서로 지긋지긋하게 싸웠다고 말했잖아.”

16550881840766.jpg“왜 싸웠는데요, 정확히?”

16550881840763.jpg“……흔한 이유인 거지. 서로 생활방식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다르고…….”

말끝을 길게 늘인 그가 이내 한숨 쉬며 미간을 좁혔다.

16550881840763.jpg“알 거 없어. 어차피 8년 뒤 미래의 일인데 네가 알아서 뭐 하게?”

16550881840766.jpg“내 미래인데 내가 알아야지, 그럼 누가 알아요?”

16550881840763.jpg“쓸데없는 거 따지지 말고, 넌 네 할 일이나 똑바로 해.”

16550881840766.jpg“내 할 일이 뭔데요? 이혼?”

16550881840763.jpg“잘 아네. 하루빨리 헤어지고 각자 갈 길 가잔 말이야.”

16550881840766.jpg“말 잘했네요. 안 그래도 이미 이혼 서류 제출했어요.”

16550881840763.jpg“……제출했다고?”

16550881840766.jpg“네. 한 달 후면 법적으로 남남 돼요.”

그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겨울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미간을 좁혔다. 마스크와 선글라스 때문에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아 답답했다.

16550881840766.jpg“……그러니까 빨리 도로 타임머신인지 뭔지 타고 8년 후의 미래로 돌아가 버리란 말이에요. 짜증 나게 나만 들들 볶지 말고.”

16550881840763.jpg“중간에 이혼 철회할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못 돌아가.”

16550881840766.jpg“하, 진짜 누가 강시후 아니랄까 봐……!”

발끈한 겨울이 격양된 음성을 낸 순간, 옆 테이블에서 다소 잔을 세게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움찔한 겨울이 고개가 소리의 근원지로 돌아갔다. 놀란 겨울의 시야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16550881896824.jpg“전에 우연히 들었을 때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옆 테이블에 홀로 앉아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박주형이었다.

16550881896824.jpg“정말 이상한 대화네요.”

경직된 겨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겨울의 여린 심장이 발작했다.

16550881896824.jpg“타임머신 타고 8년 후의 미래로 돌아가 버리라니……. 그리고 강시후 씨는 또 얼굴을 가리고 있고.”

……어디서부터 들은 거지? 전부 다 들은 건가? 주형의 집요한 성격을 아는 겨울은 소리 없이 입술을 짓씹었다.

16550881896824.jpg“겨울아.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어?”

……아.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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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시후는 겨울과 관련하여 할 말이 있다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본가로 찾아갔다. 가정부가 대문을 열어주고 기다란 복도를 따라 걸어간 시후는 굳게 닫혀 있는 서재의 문 앞에 섰다. 짧게 호흡을 가다듬고 들어서자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성호가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50881896847.jpg“왔느냐.”

16550881840749.jpg“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시후가 건조하게 답했다.

16550881840749.jpg“하실 말씀이란 게 뭡니까?”

16550881896847.jpg“내 김 실장한테 보고 받았다. 너 결국 그 계집애하고 이혼하기로 했다지?”

16550881840749.jpg“…….”

시후는 입술을 꾹 일자로 다물었다. 한 달 후 법적으로 남남이 될 때까지 이혼 신청을 한 사실을 비밀로 하고 싶었지만, 이렇듯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곧바로 들키고 말았다. 팽팽한 침묵 속에 말없이 성호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이 가소롭다는 듯이 받은 성호가 이내 픽 웃음을 터뜨리며 시후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16550881896847.jpg“잘했다. 한때 엇나가는 것쯤이야 봐줄 수 있어.”

16550881840749.jpg“칭찬받으려고 한 일 아닙니다. 엇나가는 것도 아니고.”

성호의 눈썹이 고요하게 들썩였다.

16550881840749.jpg“미리 말씀드리지만, 이혼한다고 해서 겨울이와 그 가족에게 손대면 저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분명한 경고였다. 제 친아버지라고는 하지만, 겨울을 위험에 빠뜨린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락으로 빠뜨릴 것이라는.

16550881896847.jpg“그래서 내가 너한테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하는데 말이야.”

성호의 목소리가 일순 낮아졌다.

16550881896847.jpg“네 와이프하고 깔끔하게 이혼하고, 네가 운영하는 회사, 넥스트 게임즈 정리하고 우리 회사 들어와서 일 배워라.”

16550881840749.jpg“……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 겁니까?”

16550881896847.jpg“이번에 창영이 그놈이 기어코 또 사고를 쳤어. 무리하게 해외 사업 확장을 진행한 탓에 손실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야. 이사회에서도 그놈을 차기 회장으로 인정하지 않는 모양새고.”

16550881840749.jpg“…….”

16550881896847.jpg“나도 그런 나사 빠진 놈한테, 뼈 빠지게 키워놓은 회사를 맡길 생각 없다.”

작게 한숨 쉰 성호의 눈매가 일순 짙어졌다.

16550881896847.jpg“네 녀석이 엇나가긴 했어도, 내 도움 없이 회사를 창업해 그 규모까지 키운 능력은 인정하니까 말이야.”

성호는 시후의 어깨를 한 손으로 툭 치며 낮게 말했다. 입술을 다문 시후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16550881896847.jpg“맨입으로 거래를 제안하는 게 아니란 건 알 거야.”

16550881840749.jpg“…….”

16550881896847.jpg“네 와이프, 그리고 그 집구석 인간들 모두. 털끝 하나 건들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네가 원하는 게 이거 아니냐?”

시후의 눈동자가 태풍에 휩쓸린 것처럼 거세게 흔들렸다.

16550881896847.jpg“회사 들어와서 제대로 경영 배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 회사를 맡길 놈은 네 녀석밖에 없으니까.”

시후는 성호의 말에 쉽사리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금 침묵이 이어졌다. 뻐근하게 굳은 몸을 가까스로 움직인 시후가 반원을 그리며 뒤를 돌았다. 말없이 자리를 떠나는 시후를 보며 성호는 혈압이 오르는 듯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뒤에서 온갖 험악한 욕설이 들려왔지만 시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나긴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16550881954092.jpg“어머, 벌써 가니?”

그때, 새어머니 유서진이 여유롭게 웃음 지으며 등장했다. 그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두통이 몰려오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16550881954092.jpg“저녁도 먹고 가지 뭘 벌써 가.”

16550881840749.jpg“…….”

16550881954092.jpg“아버지하고는 무슨 얘기 나눴니? 또 그 물건 얘기?”

사납게 눈을 치켜뜬 시후가 경고하듯 서진을 내려다보았다.

16550881840749.jpg“그 물건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제 아내, 어머니한테 천대받을 이유 없습니다.”

16550881954092.jpg“……뭘 또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고 그러니? 걔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키던?”

16550881840749.jpg“그만 하세요. 어머니하고 더 이상 대화할 생각 없습니다.”

저 몰래 겨울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계약서를 쓰게 시킨 서진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16550881840749.jpg“대화도 정상적인 사고가 될 때나 하는 거니까요.”

16550881954092.jpg“……뭐?”

16550881840749.jpg“전, 어머니 얼굴만 보면…….”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왜 뒤에서 그딴 더러운 짓까지 했냐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16550881840749.jpg“이가 갈려요.”

하지만 두 사람이 시후 몰래 한 계약이었기에, 시후가 아는 척을 했다간 겨울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 있었다. 잇새를 악문 시후는 계약서에 관한 것을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수십 년간 가슴에 담아 왔던 응어리를 폭발시키듯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16550881840749.jpg“지난 24년간 단 한 번이라도 절 가족이라고 생각하신 적이 있습니까?”

조금 놀란 듯 일렁이는 서진의 눈동자를 보며, 시후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모조리 부수고 깨뜨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16550881840749.jpg“제 앞가림도 못 하는 멍청한 당신 아들이나 계속 챙기세요. 더는 내게 아는 체하지 마시고.”

16550881954092.jpg“…….”

16550881840749.jpg“그리고, 이제 어머니라고 부르는 일도 없을 겁니다.”

씹듯이 뱉자 서진이 새빨간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런 그녀를 뒤로 하고 시후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는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0881954092.jpg“너도 나중에 자식 낳아봐. 팔이 안으로 굽는 건 어쩔 수 없잖아.”

시후가 헛숨을 삼켰다. 더는 대화할 가치가 없었으니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들끓다가 차게 식었다가를 반복했다. 머리가 한 대 얻어맞은 듯이 얼얼했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복도를 빠져나온 시후가 대문을 나선 뒤에야 참았던 숨을 내몰아 쉬었다. 그때 손안에 들린 핸드폰으로 짧은 진동이 울렸다. 오민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16550882009267.jpg[시후야. 나 이번에 촬영 때문에 진리 호텔에서 묵는데, 네 와이프가 주형이하고 어떤 남자랑 같이 호텔 안에 들어가는 걸 봤다? 두 사람 친구라는 얘기는 저번에 들었는데.]

시후의 미간이 세차게 구겨졌다. 이건 또 무슨…….

16550882009267.jpg[근데 보통 친구 사이에서 호텔을 가진 않잖아? 너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뒤이어 도착한 사진에 시후의 입매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호텔의 룸으로 들어가는 여자는 확실히 겨울이 맞았으며, 같이 들어가고 있는 남자 두 명 중 한 명 또한 박주형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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