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곁에 있어 주세요2022.03.02.
“치과 개원 자금, 엄마가 지원해줄까?”
지금으로부터 4일 전, 자선 파티의 전날. 주형은 어머니로부터 치과 개원 자금을 지원해주는 대신, 내일 있을 자선 파티에 참석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태림그룹 사모가 주최하는 자선 파티인데, 내일 너희 아버지하고 나는 다른 중요한 행사에 가봐야 해서 말이야.”
주형의 아버지는 태림그룹 계열의 종합 광고대행사인 인벤티의 대표였다. 아무리 중요한 행사라고 한들 모그룹의 회장 부인이 주최하는 자선 파티에 얼굴을 비추지 않을 수는 없었기에 하나뿐인 외동아들 주형에게 무리한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가 국내에 들어왔다던데, 둘이 같이 파트너로 갔다 오렴.”
“오민주 누나요?”
“그래. 오랜만에 한국 왔다고 어제 연락받았단다. 너와 같이 자선 파티 참석하고 싶다던데.”
주형과 민주네 집안은 오래전부터 친한 사이였는데, 그 때문에 주형과 민주도 서로 적당히 친분이 있었다. 하지만 결코 편한 사이는 아니었기에 그녀와 공식적인 자리에 나가는 것은 내키지 않았으나 개원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지금 패를 쥐고 있는 건 어머니였기에 그녀의 말대로 순순히 민주와 함께 태림에서 주최하는 자선 파티에 참석했다. 하지만, 설마 그곳에서 겨울을 마주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제 집안과 관련된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꽤 놀란 듯 보였다. 물론 속이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바로 해명하려고 했지만, 그녀에게 말을 걸 때마다 번번이 강시후가 나타나 훼방을 놓았다. 일부러 자신을 의식하고 행동하는 듯한 시후의 위선적인 모습에 주형은 부아가 치밀었다. 겨울이 결혼한 이후, 그녀의 표정이 얼마나 어두워졌는지를 떠올리면 강시후의 그런 행동들은 모두 가식이고 폭력으로 느껴졌다. 부부 사이의 일은 알 수 없지만, 주형은 지금껏 겨울이 불행한 결혼생활을 해왔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늘 행복한 신혼을 즐기는 척 웃으며 연기했지만, 주형은 그 미소 아래 숨겨진 처참한 어둠을 똑똑히 목격했다. 겨울을 행복하게 해 줄 수도 없으면서 질투와 독점욕만 가득한 그가 한없이 한심했다. ……나라면 그녀를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여자로 만들 자신이 있는데. 하지만 결코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되는 감정이었다. 다음 날, 월요일에 주형은 겨울에게 민주와 함께 자선 파티에 참석한 것에 대해 해명을 하기 위해 함께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같이 저녁을 먹는 내내 겨울은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사람처럼 멍한 상태였다. 제 집안 배경에 관한 이야기와 민주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솔직히 털어놓았지만, 그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 그랬구나. 주형이 네가 금수저였다니…… 되게 신기하다.”
딱히 친구로 지낸 9년간 말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고 그러려니 하는 반응이었다.
“치과 개원하면 이제 평생 나는 공짜로 치료해주나?”
오히려 장난스럽게 반응할 뿐이었고, 거기에 또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실망도 없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운해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범주였다. 그녀는…… 남편이 있는 여자니까. 그로부터 이틀 뒤, 학회 때문에 진리호텔에 하루 숙박하게 된 주형은 저녁을 먹고 홀로 술 한잔 기울이기 위해 라운지 바로 향했다. 바 테이블에 앉아서 보드카를 주문한 뒤 태블릿 PC로 학회 내용을 검토하는 찰나였다.
“이혼은 잘 되어 가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 돌리니 마스크와 선글라스, 모자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시야에 들어찼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서 굳은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는 여자는 틀림없는 겨울이었다. 그렇다면 저 남자는 강시후가 맞을 텐데, 저번에도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더니 이번에도 역시나 범죄자라도 된 양 얼굴을 꽁꽁 가린 모습이었다. 뭔가 느껴지는 분위기가 수상해서 주형은 슬며시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가 8년 후 이혼한 게, 정말 사이가 나빠져서 이혼한 거 맞아요?”
“……그래. 서로 지긋지긋하게 싸웠다고 말했잖아.”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지는 둘의 대화는 기묘하고 해괴하게 느껴졌다.
“알 거 없어. 어차피 8년 뒤 미래의 일인데 네가 알아서 뭐 하게?”
“내 미래인데 내가 알아야지, 그럼 누가 알아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대화만 들으면 마치 강시후는 미래를 전부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더욱 황당한 것은 겨울이 아무렇지 않게 그런 그의 말을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잘 아네. 하루빨리 헤어지고 각자 갈 길 가잔 말이야.”
“말 잘했네요. 안 그래도 이미 이혼 서류 제출했어요.”
“……제출했다고?”
“네. 한 달 후면 법적으로 남남 돼요.”
이어지는 대화에 주형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뭐? 이혼 서류를 제출했다고?
“……그러니까 빨리 도로 타임머신인지 뭔지 타고 8년 후의 미래로 돌아가 버리란 말이에요. 짜증 나게 나만 들들 볶지 말고.”
……8년 뒤의 미래? 타임머신은 또 무슨 얘기인가.
“중간에 이혼 철회할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못 돌아가.”
“하, 진짜 누가 강시후 아니랄까 봐……!”
모른 척 넘어가 주기엔 대화가 보통 수상한 것이 아니었다. 조금 세게 잔을 내려놓자 겨울과 시후의 시선이 동시에 주형에게로 꽂혔다.
“전에 우연히 들었을 때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이상한 대화네요.”
무언가 엄청난 비밀을 들킨 듯 사색이 된 겨울의 표정을 똑바로 응시하며 미간을 좁혔다.
“타임머신 타고 8년 후의 미래로 돌아가 버리라니……. 그리고 강시후 씨는 또 얼굴을 가리고 있고.”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한 겨울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이번 일은 결코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겨울아.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어?”
“……아, 그게.”
당황한 겨울은 어쩔 줄 모르고 커다란 동공을 이리저리 굴렸다. ……대체 어디서부터 들은 거지? 하필이면 집요한 면이 있는 주형에게 이런 대화를 들키다니. 마른침을 삼킨 겨울이 아득하니 멀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아무렇게나 입을 벌렸다.
“어. 그……. 얼마 전에 읽은 소설 얘기하고 있었어.”
“무슨 소설?”
“그…… 그게 무슨 소설이더라. 하하하…….”
“뭐?”
“음……그러니까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본 소설이 있거든? 그거 갖고 남편이랑 얘기하는 중이었어.”
점점 더 표정이 굳어가는 주형을 보며 겨울은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전혀 믿지 않는 듯한 태도였으나 이미 시작한 변명, 그만둘 수도 없었다.
“그, 내용이 미래에서 남편이 찾아와서 이혼하라고 하는 내용이거든. 진짜…… 어이없지? 음…… 내가 봐도 황당하더라. 하하하…….”
“내가 들은 게 전부 소설 내용이라고?”
“으음? 뭘 들었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전부 소설 내용이지, 그럼.”
애써 둘러대며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데, 일순 옆에서 단호한 음성이 공기를 갈랐다.
“소설 내용 같은 거 아닙니다.”
미래에서 온 강시후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 충격적인 발언에 경악한 겨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일단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아래 제가 묵고 있는 룸으로 내려가죠.”
겨울은 온몸에 피가 전부 빨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온 얼굴을 꽁꽁 싸매고 다니는 주제에, 저런 폭탄 발언을 한다니……. 아연실색한 겨울은 황당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따가운 시선을 읽은 듯 그는 겨울 쪽을 흘끗 바라보며 태연자약하게 말을 이었다.
“이미 들킨 거 어쩔 수 없잖아. 박주형 씨 표정을 보니 믿는 것 같지도 않고.”
나지막이 목소리를 내리깐 그가 박주형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조력자가 있으면 더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조력자? 살짝 움찔한 주형이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 한편 오민주로부터 사진을 전송받은 시후는 심장이 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근데 보통 친구 사이에서 호텔을 가진 않잖아? 너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호텔의 룸으로 들어가는 여자는 확실히 겨울이 맞았으며, 같이 들어가고 있는 남자 두 명 중 한 명 또한 박주형이 틀림없었다. 가슴이 엄청난 속도로 뛰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먹먹해진 귀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까만 눈동자가 한참 동안 전송된 사진을 씹어먹을 것처럼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감정에 손이 떨리고 이성이 남아나질 않았다. 꽉 핸드폰을 움켜쥐자 힘줄이 곤두섰다. 하, 헛숨을 터뜨린 시후는 이내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을 가까스로 누르고 꾹꾹 액정 위를 강압적으로 눌렀다.
[이따위 쓸데없는 거 찍어서 보내지 마. 이제부터 업무 외 연락하면 차단한다.]
전송을 누른 뒤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겨울을 믿고 있었다. 아직 법적으로 부부인 상황에 그녀가 다른 남자와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겨울은 믿어도 박주형과 다른 남자는 절대 믿을 수 없었다. 대체 왜 위험하게 남자 두 명과 호텔에 들어간 건지…….
“박주형…….”
결혼식에서부터 건방진 눈깔로 보더니. 끝까지 겨울의 곁에서 친구라는 이름을 빌미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이 새끼는 또 뭐야?”
겨울의 옆에 모자를 쓴 키 큰 남자는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박주형과 더불어 이런 누군지도 모를 수상한 인간과 왜 호텔에 간 건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휴대전화를 쥔 시후는 겨울의 번호를 화면에 띄웠다. 그러나 통화연결음은 끊길 기미 없이 오래도록 이어졌고, 겨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
끝내 연결되지 않은 휴대전화를 내린 시후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싸늘한 시선이 액정으로 다시금 꽂혔다. *** 한편 시후가 묵고 있는 룸으로 내려온 세 사람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래에서 온 시후는 모든 걸 밝히기로 작정한 듯 주형에게 이제껏 있었던 일을 전부 말해버렸고, 겨울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8년 후의 미래에서 온 강시후 씨라고요?”
물론 가장 놀란 것은 주형이었다. 그는 도무지 자신이 듣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멍한 얼굴로 여전히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강시후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겨울이와 하루빨리 이혼하기 위해 과거로 찾아왔다고요.”
“네. 맞습니다.”
“……말도 안 돼…….”
주형은 홀린 듯 고개를 내저으며 겨울과 시후를 번갈아 보았다.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형의 반응을 보며 시후는 모자와 마스크, 선글라스를 차례로 벗었다. 이내 맨얼굴이 드러나자 놀란 주형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
며칠 전 자선 파티에서 봤던 모습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선명한 이목구비로 미루어보아 같은 사람은 분명했으나, 느껴지는 분위기가 훨씬 매서웠고 나이도 조금 더 들어 보였다.
“얼굴을 보면 좀 믿어지겠습니까?”
원래도 날카롭던 인상은 더욱 차가워져 이제는 사납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정말 그의 말대로 8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이 그에게서 묻어나왔다.
“……혹시 이거 깜짝 카메라 같은 거 아니죠?”
저도 모르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제 볼을 꼬집어 보았으나 생생한 아픔만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도무지 쉽사리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혼돈에 빠진 머리로는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혼자 잠시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주형은 더듬더듬 입술을 열었다.
“저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서…… 잠시 화장실 좀 빌려도 되겠습니까?”
시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자리에서 일어난 주형이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겨울은 기다렸다는 듯 시후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이 얘기를 다 말하면 어쩌자는 거예요?”
“널 못 믿겠으니까 하나라도 조력자를 만들려는 거 아냐.”
“그럼 주형이는 믿는다는 거예요?”
“쟤는 널 좋아하니까. 적어도 너한테 나쁘게 할 일은 없겠지.”
“하…….”
황당함에 벌어진 입술 틈으로 헛숨이 흘러나왔다. 괜히 부아가 치밀고 불쾌함이 밀려왔다.
“진짜 제멋대로네요. 맘에 안 들어요. 당신도, 지금의 강시후도!”
“난 뭐 네가 맘에 들어서 여기 있는 줄 알아?”
“하, 말 다 했어요? 지금 싸우자는 거야?”
격양된 목소리로 쏘아붙이자마자 화장실 문이 열렸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걸어오는 주형을 보며 겨울은 잘근 입술을 씹었다. 도로 의자에 앉은 주형이 겨울과 시후를 번갈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믿기 어렵지만, 상황은 이해했어요. 눈으로 봤는데 더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주형의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도울게요. 제가 뭘 하면 되죠?”
주형의 시선이 시후에게로 향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혼돈에 빠져 있던 겨울은 눈동자를 굴려 시후를 바라보았다. 찰나의 정적을 꿰뚫고 시후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겨울이 곁에 있어 주세요. 그거 하나면 됩니다.”
겨울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렇게 말하는 음성이 어딘가 슬프게 느껴진 탓이었다. 묘한 기류에 휩싸이고 왠지 울적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저 말은 또 뭐야.’
허벅지 위에 올려둔 손을 꼭 움켜쥐며 미간을 좁혔다.
‘내 마음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왜 제멋대로 정하는 거야.’
……미래의 강시후 너는, 내가 다른 남자와 함께해도 아무렇지 않은 거야? 울컥 감정이 올라오고 눈물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두 주먹을 더욱 세게 쥔 겨울은 가까스로 호흡하며 울음을 삼켰다. *** 밤늦은 시간이 되어 겨울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까 집을 나오기 전에 시후에게 언성을 높이며 화를 냈던 탓에 그의 얼굴을 보기가 조금 껄끄러웠다. 그와 대면하지 않고 최대한 빨리 제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발걸음을 높였으나, 거실에 앉아 있던 시후의 목소리에 우뚝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디 갔다가 이제 와?”
어딘가 차가운 기운이 묻어나는 듯했다. 괜히 가슴에 시린 바람이 불어오자 입술을 짓씹은 겨울이 대충 둘러대었다.
“그냥 잠깐 바람 쐬러…….”
“혹시 박주형 씨 만났어?”
냉랭하게 말을 끊은 시후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움찔한 겨울의 심장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