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엇갈린 마음2022.03.06.
“어디 갔다가 이제 와?”
어딘가 차가운 기운이 묻어나는 듯했다. 괜히 가슴에 시린 바람이 불어오자 입술을 짓씹은 겨울이 대충 둘러대었다.
“그냥 잠깐 바람 쐬러…….”
“혹시 박주형 씨 만났어?”
냉랭하게 말을 끊은 시후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움찔한 겨울의 심장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어떻게 알았는지 생각할 겨를 따위 없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가시를 세운 겨울은 뾰족한 음성을 내었다.
“……글쎄. 내가 누굴 만나든 오빠가 신경 쓸 입장은 아닌 것 같은데.”
단정한 미간 사이로 주름이 지는 걸 보며 겨울이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입만 열면 자꾸 날선 소리가 나가는 것을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었다. 시후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겨울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 따가운 시선을 더는 받고 있기 힘들어, 겨울은 굳어 있는 다리를 가까스로 움직였다. 쾅,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적막한 집 안을 울리고 시후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난 많은 일에 머리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세게 이를 악문 시후가 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올렸다. 겨울과 유서진이 쓴 계약서도, 박주형과 그녀가 호텔에 간 일도, 겨울에게 따져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차마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어떠한 대답이 돌아오든 그녀의 진심을 알게 되면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
혼란스러운 생각들이 겹치고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뻐근해진 고개를 들어 올리자 조금 전 아버지가 했던 말들이 무질서하게 부유했다.
‘네 와이프하고 깔끔하게 이혼하고, 네가 운영하는 회사, 넥스트 게임즈 정리하고 우리 회사 들어와서 일 배워라.’
그는 시후가 그의 회사에 들어가 경영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거래를 제안했다.
‘네 와이프, 그리고 그 집구석 인간들 모두. 털끝 하나 건들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네가 원하는 게 이거 아니냐?’
성인이 된 이후 시후는 아버지에게 조금의 지원도 받지 않았고, 거의 연을 끊다시피 하며 살아왔다. 시후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어머니도, 사랑하는 여자도, 소중한 존재를 전부 앗아가는 인간일 뿐이었고, 단 한 번도 그의 회사에 들어가 일할 것으로 생각한 적 없었다. 그리고 대학 시절, 겨울을 향한 향수를 잊기 위해 집착적으로 몰입했던 것이 게임이었고, 개발에도 관심이 생겨 그 방향으로 온 신경을 몰두하다 보니 지금의 넥스트 게임즈가 있도록 해준 대표 게임인 <더 넥스트>가 탄생했었다. 그렇게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지금의 넥스트 게임즈는 하나부터 열까지 그의 손이 거치지 않은 곳이 없었고, 그만큼 커다란 애착이 있는 회사였다. 이 회사를 버리고 아버지의 밑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시후가 스스로를 내던져 버리는 것과도 같았다. 이성적으로는 당연히 거절해야 할 아버지의 제안을 고민하는 것은……. 오직 겨울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한번 뱉은 말은 번복하지 않는 성격이었으니, 겨울과 그녀의 가족들을 건들지 않겠다는 약속은 틀림없이 지킬 터였다. 이미 이혼하기로 한 이상, 저와 함께 있으면 불행해지기만 하는 겨울을 더 이상 결혼이라는 도구로 구속할 생각은 없었다.
“…….”
그리고 아버지의 제안은 겨울과 이혼하더라도, 그녀를 확실히 지켜줄 방법이었다. 시후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흐트러진 숨이 시후의 입술 사이를 타고 흘렀다.
*** 방 안으로 들어온 겨울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이 머릿속에 다시금 떠오르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가 그렇게 차가운 얼굴을 하는 것에는 면역이 되지 않아, 가슴에 시린 바람이 부는 듯했다. 마치 8년 후 강시후의 싸늘한 표정과 겹쳐 보이자 심장에 바늘이 꽂힌 듯 아릿했다.
“……하.”
겨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이혼 확인 기일까지 냉랭한 상태가 유지되는 걸까. 물론 이혼하자고 한 것도, 낮에 먼저 화를 내고 집 밖을 나선 것도 겨울이었다.
“나도 모르겠다…….”
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내 마음이 향하는 지점이 뭔지, 겨울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사실 정말 원하는 것은…….
“…….”
입술을 꼭 말아 삼킨 겨울은 그대로 욕실에 들어가 샤워했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오자 시후는 여전히 소파에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를 지나쳐 방으로 가려는데, 문득 낮은 음성이 발목을 움켜쥐었다.
“잠깐 얘기 좀 해.”
어디선가 시린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겨울은 입술이 뭉개지도록 깨물었다. 망설이며 걸어간 그녀가 시후의 건너편으로 앉자마자 그는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액정 위에 뜬 사진을 본 겨울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주형과 미래에서 온 강시후, 그리고 겨울이 호텔의 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었다.
“이 사진이 어떻게…….”
“오민주가 우연히 봤다면서 보내줬어.”
겨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혹시 오민주가 라운지 바에서 얘기한 걸 들은 건 아니겠지?’
중요한 이야기는 룸 안에서 했으니 아마 내용까지는 듣지 못했을 터였다. 무엇보다도 이 사진을 시후에게 보냈다는 건, 사진 속 얼굴을 가린 남자가 강시후 본인이란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이건…… 오해야.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무슨 사정인데?”
“……그건…….”
벌어진 입술 사이로 고요한 숨만 흘렀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일방적으로 화를 내고 집을 나간 아내가 남자인 친구와 함께 호텔에서 사진이 찍혀 돌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설명하려면 미래에서 온 강시후의 존재부터 전부 털어놓아야 했다. 차마 둘러댈 길이 없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넌 네가 아직 법적으로 유부녀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할 것 같은데.”
“…….”
“확인 기일까지 딱 한 달 남았어. 이혼 후 네가 누구를 만나든 상관 안 할 거야.”
냉랭한 음성에 우뚝 굳은 숨이 터지는 것처럼 흘러나왔다.
“그런데 법적으로 부부인 동안은 아니야. 사람들 눈에 책잡힐 구실 주지 마.”
차갑게 돌변한 태도에 상처받은 겨울의 입술이 떨렸다. 겨울이 잘못한 건 맞지만, 손바닥 뒤집듯 바뀐 시후의 태도에 가슴에 커다란 생채기가 났다. 코끝이 찡해지고 울컥 시큰해진 눈가가 아릿했다.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또 바보처럼 눈물이 날 것만 같아 입술을 짓씹었다.
“그게 전부야?”
형편없는 목소리가 목울대를 울리며 너저분하게 흘러나왔다.
“주형이랑 같이 있었던 게 싫은 이유, 그게 전부냐고.”
“그러면 달리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차갑게 쏘아붙인 시후는 더욱더 냉정해지려고 노력했다. 겨울을 놓아주기로 한 이상, 더는 그녀를 제 욕심대로 흔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이게 오빠 진심이었어?”
“…….”
“또 이렇게 쉽게 등 돌릴 거, 지금껏 왜 안 놓아주고 질질 끌었는데?”
상처받은 듯 일그러진 겨울의 얼굴을 보는 시후의 가슴이 깨질 것처럼 욱신거렸다. 당연히 이 모든 건 진심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인생에 오점 남기기 싫어서 그랬어.”
“……뭐?”
“이혼하고 실패한 결혼 했다는 거, 남들한테 비웃음당하기 싫어서.”
……나는 예나 지금이나, 네 인생의 악역이었을 뿐이었다. 어렸던 시절 너는 나를 미워해야만 살 수 있었고, 나는 너에게 상처를 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한심하게도 서른이 넘은 지금도 널 울리기만 하니까.
“…….”
겨울은 온몸의 피가 전부 빠져나가는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입술을 달싹였으나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그의 다정함에서 진심을 느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전부 착각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지금껏 그가 자신을 지독하게 붙잡았던 것도, 사랑이 아니라 제 인생에 오점을 남기기 싫어서.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던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겹겹이 쌓여왔던 어둑한 감정이 기어코 폭발했다.
“애초에 나랑 결혼은 왜 했어?”
목 안이 찢어질 듯 따끔거렸다. 새어 나온 눈물이 오랜 상처까지 건드리며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잘난 데다가 너 좋다고 따라다니는 오민주하고 결혼하지, 왜 나처럼 뭣도 없는 여자하고 결혼했는데.”
격양된 겨울의 말에 시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녀가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상처 내는 말을 하는 것이 싫었다. 심장에 칼날이 꽂힌다 한들 이보다 괴롭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애써 말을 아꼈다. 입을 벌렸다가는 제 본심이 나올 것만 같아서. 또 그녀를 흔들어 놓을 것만 같아서.
“난 오빠가 그렇게 남들 눈 신경 쓰는 사람인 줄 몰랐네.”
제 얼굴을 함빡 적신 눈물을 아무렇게 닦은 겨울의 눈매가 차가워졌다.
“그렇게 남들 눈치 봐서 오민주하고 호텔에서 사진 찍혔니?”
시후의 미간이 거세게 찌푸려졌다.
“뭐라고?”
“자선 파티에서 들었어. 내가 그딴 소리를 듣고 살아야겠어?”
“누구한테서 들은 얘기인지 모르겠지만, 그건…….”
작게 한숨 쉬자 표독스럽게 굳어진 겨울의 표정이 시야에 가득 찼다. 마른 숨을 삼킨 시후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오민주와의 관계를 오해한 그녀는 제게 완전히 정이 떨어진 듯 보였다.
“……됐다.”
“뭐?”
“네가 낮에 한 말처럼, 우리는 이미 이혼할 사이인데 이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하.”
겨울이 헛숨을 터뜨렸다. 아릿했던 눈물샘이 한순간 마르고 허탈한 숨이 내면을 가득 채웠다. 이제는 해명할 가치도 없다는 건가 싶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상황이 악화한 건가 돌이켜보았으나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래도 해.”
우리는 서로에게 비밀이 너무 많았다. 한 번도 솔직한 적이 없었다.
“변명이든 해명이든 하란 말이야!”
“그러는 넌,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어?”
“……또 무슨 뜻이야.”
“네가 나 몰래 유서진과의 계약서에 사인한 건 말이 되고?”
겨울의 심장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어떻게 안 거지? 거칠게 뒤흔들리는 동공으로 그를 바라보자 굳은 표정이 점점 더 냉정해졌다. 마른침을 삼킨 겨울은 엄청난 속도로 뛰기 시작한 가슴을 느끼며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설마 내 가방 뒤졌어?”
“지금 그게 중요해?”
“난 기억에도 없는 일이야. 그걸로 나한테 추궁할 생각하지 마.”
겨울이 차갑게 쏘아붙이자 시후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최악으로 치달아버린 갈등과 함께, 겨울과 시후의 날이 선 감정은 돌풍처럼 거세게 부딪혔다. 더는 시후와 마주 보고 있기 힘들었던 겨울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쾅, 다시금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시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껏 내내 참아왔던 감정이 터져 겨울에게 심한 말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정을 떼어낼 수 없을 터였다.
“……하.”
마음 같아서는 전부 다 버리고, 겨울과 함께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 원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는 날 사랑하지 않으니까. 내 옆에서 그녀는 행복할 수 없으니까. 시후는 굳은 채 소파에 앉아 한참 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겨울의 방 안에서 어수선하게 들려오던 소음이 멎고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열렸다. 그곳으로 향한 시후의 눈이 커다랗게 뜨여졌다. 겨울이 방 안에서 캐리어를 끌고 나온 탓이었다. 놀란 시후가 반사적으로 소파에서 일어났으나, 겨울은 그런 시후 쪽으로는 눈길 하나 주지 않고 현관으로 향했다.
“갑자기 어딜 가는 거야.”
“확인 기일까지 우리 따로 지내. 이 집에서 도저히 못 살겠으니까.”
“지금 시간이 몇 시인 줄은 알고 이러는 거야? 왜 이렇게 막무가내야.”
사후는 다급하게 겨울을 붙잡았다. 그 손길에 애써 시선을 들어 올린 겨울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상처 주고 싶다. 울리고 싶다. 이 남자가, 오로지 나 때문에 상처받아 울게 하고 싶다. ……이 감정은 대체 뭘까.
“주형이네 집에 갈 거야.”
겨울의 말에 시후의 숨이 우뚝 굳었다.
“나 이혼하는 거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검은 눈동자가 거칠게 뒤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