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인연 혹은 악연2022.03.09.
“주형이네 집에 갈 거야.”
겨울의 말에 시후의 숨이 우뚝 굳었다.
“나 이혼하는 거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검은 눈동자가 거칠게 뒤흔들렸다.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이 진짜인지, 순간 믿을 수 없었다. 충격에 물든 시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한 대 맞은 사람처럼 그녀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이내 불안정하던 호흡이 끊기고 시후는 다급하게 겨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건…….”
온몸에 피가 다 빨린 듯 시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건 안 돼.”
경직된 입술을 아무렇게나 움직였으나 뒤죽박죽으로 꼬인 발음은 형편없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왜? 오빠하고 상관없는 일이잖아.”
“…….”
“지금껏 나 붙잡은 이유, 사랑이 아니라면서. 인생에 이혼이라는 오점 남기기 싫어서 붙잡은 거라며.”
싸늘하게 표정을 굳힌 겨울은 부러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럼 내가 누굴 만나든 상관없잖아?”
심장에서 무언가 엇나가는 소음이 들려왔다. 가슴이 서늘해진 시후의 사고가 완전히 마비되어 버렸다. 고장난 기계처럼 굳어 있는 시후를 보며 겨울이 입술을 아릿하게 깨물었다.
“그리고…… 애초에 여긴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었어.”
돌아가신 아버지를 사지로 몰았던, 원수의 아들과 결혼이라니.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시후와 겨울의 사이에는 온통 이루어지면 안 되는 이유뿐이었다.
“이혼 확인 기일까지, 웬만하면 얼굴 보지 말자.”
차갑게 한마디를 남긴 겨울은 그대로 굳어 있는 시후를 지나쳐 집 밖을 나섰다. 그 뒤에 홀로 남겨진 시후는 한참 동안 그대로 서서 굳게 닫힌 현관문을 응시했다. 뒤늦게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동들이 솟구치고 시후가 가파른 숨을 토해냈다. 걱정, 질투, 절망, 갖가지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자 더는 버티고 있기 힘들었다. 비틀거리던 시후는 그대로 쓰러지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시후는 자정이 넘어서도 부동자세였다. 당연히 겨울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박주형의 집으로 갔을 거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파고들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1시, 2시, 야심한 새벽이 되어갈수록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시후는 미니바에 놓인 양주를 잔에 따르지도 않고 꿀꺽꿀꺽 아무렇게나 들이켰다. 숯덩이처럼 타들어 가는 속이 지독한 알코올의 잔향 탓인지, 겨울을 향한 감정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하…….”
이혼 서류를 제출하고 온종일 한 끼도 먹지 않은 빈속에 연거푸 술을 들이켰으니 위장이 남아날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후는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무자비하게 알코올을 강제로 제 몸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한 병을 전부 마신 시후는 그대로 소파에 누워 제 눈을 손등으로 가렸다.
“꼴사납게…….”
지금 겨울을 붙잡을 자격이 제게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애초에 이 모든 게 제 이기적인 욕심이었을지도 모른다. 결혼 후 기억을 잃기 전 때까지, 그녀는 단 한 번도 제게 웃음을 지어 보여준 적이 없었다. 웃음은커녕 서로 제대로 된 인사조차 한 적 없었고, 그저 서로를 유령 취급하며 남보다 못한 사이로 몇 개월을 지냈었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그녀는 못 볼 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고, 말을 붙일 때면 뼛속까지 시린 찬 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왔다. 그 태도만 보아도 그녀가 제게 가진 감정이 어떤지는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했던 이 결혼이 그녀를 구속하고 갉아먹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이제 지긋지긋해. 이 허울뿐인 결혼생활. 숨 막혀. 연기하는 것도 지겹고……. 나도 이제 그만 평범하게 살고 싶어. 사랑받으면서, 또 사랑하면서.’
그녀는 사고가 일었던 날, 제게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했었다. 그 소망을 들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제대로 된 부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랑할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으니까.’
그래서 시작된 거짓말이었다.
‘작년에 다시 만난 후로 다른 평범한 연인들처럼 썸 탔고, 연애했고, 곧바로 결혼에 골인했어.’
거짓으로 시작된 관계는 결국 거짓만 남을 뿐이란 걸. 알면서도 외면하고 그녀를 억지로 붙잡아보려 했다. 이건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이었다는 걸 안다. 이제 정말, 그녀를 놓아주어야 할 때란 것도. *** 띵똥. 막 잠이 들려던 희수는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뭐야……?”
이 시간에 누구지?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이었고 혼자 사는 빌라였기에 잔뜩 경계한 희수가 현관문 근처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희수야. 나야. 겨울이…….”
“어?”
놀란 희수가 벌컥 문을 열자 코끝이 새빨갛게 얼은 겨울의 모습이 보였다. 눈까지 내리는 밖에서 얼마나 배회했던 건지 그녀는 머리카락마저 뻣뻣하게 얼어 있었다. 당황한 희수가 다급하게 담요를 가져와 겨울에게 둘러주며 그녀를 집 안으로 데리고 왔다.
“밖에 많이 춥지? 기다려 봐.”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희수가 따뜻한 물에 녹차 티백 하나를 담가서 겨울에게 건넸다. 빨갛게 얼은 손으로 잔을 받아든 겨울이 흐릿한 숨을 내뱉었다.
“고마워, 희수야.”
“그런데 겨울이 네가 이 밤에 웬일이야? 그 캐리어는 또 뭐고.”
“…….”
겨울은 대답 대신 입술을 꼭 깨물었다. 차마 무어라 말을 할 수 없어 애꿎은 숨만 삼킬 뿐이었다. 그런 겨울의 눈가가 빨갛게 부어 있는 것을 본 희수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혹시 남편이랑 싸웠어?”
“…….”
“무슨 일이야, 대체.”
“……희수야…….”
겨울은 떨리는 눈을 천천히 눌러 감았다. 그러자 내내 눈가에 고여 있던 이슬 한 방울이 볼을 타고 소리 없이 굴러떨어졌다.
“겨울아, 너 왜 그래…….”
20살 때 처음 만난 이후, 9년간 겨울이 우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희수의 동공이 흔들렸다. 늘 독하고 강하다고 생각했던 제 친구가 이토록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마. 울고 싶으면 그냥 다 울어버려.”
겨울을 끌어안은 희수가 그녀의 등을 천천히 토닥거렸다. 다정한 목소리에 울컥 감정이 올라온 겨울은 결국 참았던 눈물을 전부 쏟아내었다. 억울하고, 서럽고, 괴로운 마음을 한껏 폭발시켜 아이처럼 엉엉 목을 놓아 한참을 울었다. 희수는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녀의 등을 쓸어줄 뿐이었다.
한참 뒤 울음을 그친 겨울은 흔쾌히 자고 가도 좋다는 희수의 말에 세안한 뒤 옷을 갈아입었다. 같이 침대에서 자자는 희수에 배려에 폭신한 이불 속으로 들어간 겨울은 멍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해?”
희수가 묻자 겨울이 작게 입술을 벌렸다.
“그냥…….”
마른 숨을 삼킨 겨울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있지, 희수야. 나…….”
적막한 방 안에 겨울의 여린 목소리가 공명했다.
“나 좋아해.”
“응? 누구를?”
“……남편을…….”
신음처럼 뱉어진 음성이 길게 번졌다.
“좋아하게 됐어.”
“……뭐야, 그게. 새삼스럽게. 염장 지르냐?”
픽 웃음을 터뜨린 겨울이 쓰게 자조했다.
“그러게…… 뭘까. 새삼스럽게.”
……나는 강시후 너를, 원망하고 미워해야만 살 수 있었는데.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다시 사랑하게 되는 게,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가장 두려웠는데……. 너로부터 상처받아 온종일 눈물뿐이었던, 과거의 나한테 미안할 짓을 하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난 다시 바보처럼 사랑에 빠져버렸다. 사랑하면 안 되는 남자를, 또다시 사랑하게 되었다. 지독하게 헤어나올 수 없는, 인연……. 혹은 악연. *** 다음 날, 평소보다 훨씬 퀭한 모습으로 출근한 시후는 여느 때와 똑같이 빡빡한 일정을 소화했다. 오전에는 새롭게 개발에 들어가 시연회를 앞둔 신규 게임 ‘제3의 노이즈’의 최종 프레젠테이션에 참석했는데, 프로그램 파트의 직원들은 각자 시후의 눈치를 보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저기, 그게…… 그…… 대표님?”
프레젠테이션 전까지는 멀쩡하다가 돌연 문제가 발생하자, ‘제3의 노이즈’의 담당 프로그래머인 직원이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 이게 버그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음, 이게 버그가 맞는 것도 같은데…… 버그가…….”
“다들 여기 놀러 오셨습니까?”
시후의 싸늘한 한마디에 회의실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당장 내일이 시연회인데 대체 정신 얻다 빼고 있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밤새워서라도 시연회 전까지 잡겠습니다.”
“죄송할 일을 애초에 안 만드는 게 정상 아닙니까? 그리고 얼마나 무능하면 이거 하나 잡는데 밤까지 새워야 한다는 겁니까. 30분이면 잡고도 남겠는데.”
“……죄송합니다.”
“최종 프레젠테이션에서 이 꼴이라니…….”
“……죄, 죄…….”
“할 줄 아는 말이 ‘죄송합니다’밖에 없는 것 같은데, 이만 여기서 회의 접죠. 밤새워서 잡을 필요 없이 내가 직접 해결합니다.”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린 시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깊게 한숨을 내쉰 직원이 저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강 대표 또 지랄이야. 한동안 분위기 좋다가 갑자기…….”
저도 모르게 뇌까렸던 직원이 소리 내서 말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프로그램 파트 팀장인 재환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 어색하게 웃었다. 재환이 작게 한숨 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회의실을 나갔다. 대표실로 돌아온 시후는 신규 게임에 발생한 버그를 직접 해결하기 위해 점심시간을 반납했다. 오후에도 일정이 빡빡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30분도 채 걸리지 않아 문제를 해결한 시후는 깊은숨을 몰아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
지금처럼 잠시라도 틈이 생기면, 자꾸만 머릿속으로 사념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맴도는 것은 어제 겨울이 제게 남기고 갔던 말들이었다.
‘주형이네 집에 갈 거야. 나 이혼하는 거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결국 겨울은 정말 아침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해가 뜰 때까지 잠 한숨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건지 계속해서 되새기게 되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단 한 번도 겨울에게 솔직하게 제 모든 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녀가 상처받을까 봐, 마음에 짐을 얻을까 봐, 두려움을 느낄까 봐……. 갖은 이유를 들어 켜켜이 쌓인 비밀은 결국 이토록 아픈 후유증을 낳았다.
‘대체 오빠 진심이 뭐였던 거야?’
그때라도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았더라면…… 상황은 조금 달라졌을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잖아. 네가 무사한 게 중요하지, 누가 널 구했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될 일은 없었을까? 그녀를 놓아주자고 굳게 마음을 다잡았다고 생각했는데, 후회가 몰려오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오래도록 상념에 빠진 시후의 정신을 깨뜨린 것은 대표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대표님. 손님 오셨습니다.”
동시에 열린 문틈으로 걸어들어온 사람에 놀란 시후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