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네가 내 곁에 있어서2022.03.27.
“12년 전 우리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고개를 들어올린 시후가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너희 아버님께서 유명을 달리하시고, 우리 사이는 완전히 틀어졌었잖아.”
나직한 목소리가 흐르고 머릿속을 파고드는 오래전의 기억에 겨울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때 걱정돼서 너한테 전화했었는데…… 번호를 바꿨더라고. 그래서 반으로 찾아가기도 했지만, 결국은 만날 수 없었지.”
그 당시, 매일같이 걸려오는 빚쟁이들의 독촉에 밤낮없이 시달렸던 겨울에게, 핸드폰이란 건 사치였다. 게다가 그 시점에는 아버지끼리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 때문에 이미 시후와 사이가 소원해진 상태였기에 핸드폰을 없앤 사실을 알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난 어린 마음에…… 네가 나한테 말 안 하고 번호를 바꿨다고 생각해서 실망하고, 서운했던 것 같아. 그러는 와중에, 내가 네 반으로 찾아갔다는 걸 아버지가 알고…….”
“…….”
“너와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했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겨울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아니, 어울리면 억지로 구실을 만들어서 널 퇴학시키고, 네 인생을 망쳐놓겠다고 협박했지.”
겨울의 입술이 파르르 경련했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가슴이 오싹하게 저렸다. 오랫동안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진실은 이토록 잔인한 것이었다. 악한 인간인 줄은 알았으나, 그보다 훨씬 추잡하고 흉악스러운 인간이었다.
“난 그때 너무 어렸고…… 사랑하는 여자 하나 지켜줄 힘이 없었어. 결국 널 위해서, 네게 등 돌릴 수밖에 없었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몰아치고 겨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머릿속이 까맣게 물들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불안정한 호흡이 흘러나왔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왜 아버지에 이어 딸인 자신까지 바닥으로 끌어 내리려고 한 걸까. 사람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 그 끝을 보여주는 듯했다.
“불타는 창고에서 널 구했을 때는…… 의식이 없는 널 보고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
겨울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려왔다. 전날 채연의 입을 통해 들었던 그날의 진실이 떠오르며, 겨울의 가슴이 일렁였다.
“그때 생각했지. 내가 네 인생에 끔찍한 악역이 되더라도, 도저히 네가 잘못되는 건 볼 수가 없겠다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살아가게 만들겠다고.”
“…….”
“네가 날 미워할지라도 말이야.”
가슴에 날붙이가 날아와 박히는 듯했다. 그의 말대로 겨울은 시후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혐오하며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아버지에게 빌었어. 세상에서 제일 증오하는 인간 앞에 무릎을 꿇고 빌고 또 빌었어……. 겨울이만큼은 건들지 말아 달라고.”
겨우 열아홉 살이었던 그가 느꼈을 인생의 무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을 터였다. 그 당시 시후가 느꼈던 온갖 괴로움이 온몸으로 느껴지자 손발이 아찔하게 떨려왔다.
“그리고 장모님께 드렸던 천만 원은…… 네가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드렸던 거였어.”
울컥한 겨울의 눈가가 욱신거렸다.
“……그럼 솔직하게 말했으면 됐잖아. 왜 그렇게 심한 말을 해서 평생 오빠를 원망하며 살아가게 만들어…….”
“내가 솔직하게 말했다면, 넌 돈을 받지 않았을 것 같았어.”
겨울의 가슴이 아프게 조여왔다. 짐작하고 있었던 대로 그는 겨울을 위해 일부러 악역을 자처하고 천만 원을 쥐여준 것이었다
“그렇게 해야 네가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날 미워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겨울은 또다시 눈가가 시큰거리는 감각을 느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독하게 쏘아붙였던 시후의 심정은 저 못지않게 괴롭고 아팠을 터였다.
“하지만 이제는 깨달았어. 내가 오만했다는 걸. 내 말이 오히려 널 더 상처 입힐 거란 걸 몰랐어.”
애절한 눈빛이 내려오자 겨울의 가슴은 산산이 찢기는 듯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나는…….”
겨울의 눈가에 물기가 서렸다.
“돈보다도 내 편이 필요했어…….”
겨울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지며 흘러나왔다.
“17살의 나한테는, 돈도 뭣도 아무것도 필요 없었어. 그냥 날 사랑해주고, 내가 사랑할 사람……. 내 곁에서 날 믿어줄 내 편.”
시후가 등을 돌렸을 때, 겨울은 혼자 끝없는 사막에 버려진 기분이었다. 겨우 초등학생인 동생, 밤낮없이 일하느라 제게는 조금도 신경 써주지 못하던 엄마. 유일한 제 편이었던 가족도 그 당시에는 그저 짐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 겨울에게 강시후란 존재는 제게 힘이 되어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유일한 희망이었다. 울먹이는 겨울을 보는 시후의 가슴이 저며왔다. 심장을 칼로 도려낸 것처럼 쓰리고 아팠다. 겨울이 느꼈을 고통과 아픔은 짐작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약속할게.”
떨리는 손을 뻗어 겨울의 손을 움켜쥔 시후가 강인한 음성으로 말했다.
“다시는 네 손 놓지 않겠다고.”
겨울의 눈이 뒤흔들렸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까만 눈동자에 겨울의 가슴에서는 거센 파도가 일어났다. 결국 겨울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따뜻한 온기를 가진 엄지가 하얀 뺨을 쓸며 과거의 상처에서 흐르는 진물을 닦아내었다. 그 다정한 손길을 느끼며 겨울은 눈물 젖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날 창고에서 구해줬던 건, 왜 비밀로 한 거야? 난 그것도 모르고 그렇게 오랫동안 오빠를 원망만 했는데…….”
“너한테 마음의 짐을 지워주고 싶지 않았어. 네가 괴로운 것보다, 차라리 날 미워하면서 그 힘으로 살아가길 바랐거든.”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없어, 오빠.”
시선을 들어 올린 겨울은 시후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앞으로는 숨기지 말고, 전부 솔직히 말해줘.”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잠기자 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 잡은 손으로 느껴지는 가느다란 떨림에 시후가 그녀의 손을 단단하게 움켜쥐었다.
“나 오빠 등에 흉터…… 자세히 봐도 돼?”
“……흉해서 보기 싫을 텐데.”
“그런 말 하지 말고…….”
속상하게 하는 말이 서운해 겨울이 시후의 어깨를 툭 쳤다.
“보여줘, 응?”
간절하게 쏟아지는 눈빛에 차마 거절하기 어려웠던 시후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고 있던 티셔츠를 천천히 벗었다. 그가 등을 돌리자 겨울의 시야로 보기만 해도 쓰라린 흉터가 한가득 들어찼다. 그날 창고에서 조금도 다친 곳 없이 무사히 빠져나왔던 겨울과 달리, 시후의 등에는 이토록 아픈 흉터가 남았던 것이었다. 떨리는 손을 뻗어 시후의 흉터를 쓸어내리던 겨울이 벅차오르는 숨을 토해냈다. 마음이 옥죄어와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또다시 눈물이 터져 흐르고, 겨울은 자꾸 울기만 하는 자신이 부끄러워 고개를 떨구었다.
“……울어?”
등 뒤로 들려오는 여린 훌쩍거림에 살짝 턱을 비틀었다.
“안 울어.”
살짝 창피해진 겨울이 자그마한 소리로 부인하며 딴청을 피우자 시후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겨울이, 오늘 평생 흘릴 눈물 다 흘리네.”
“놀리지마, 바보야.”
장난스러운 시후의 말에 헛웃음을 터뜨린 겨울이 곱게 눈을 흘겼다.
“그래도…… 날 구해준 사람이 오빠여서 좋아.”
슬며시 입꼬리를 들어 올린 겨울이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 모습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워서 시후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 손을 뻗었다. 살짝 떨리는 손끝이 겨울의 머리 위로 부드럽게 잠겼다.
“나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쓰다듬는 것처럼 움직이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네가 내 곁에 있어서 행복해.”
천천히 어루만지던 손길은 아래로 내려가 겨울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끌어당겼다. 그 힘에 끌려간 겨울이 살며시 눈을 감으며 시후의 목덜미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꽃의 줄기처럼 가느다란 팔이 제 목을 감싸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비스듬히 튼 시후가 겨울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겹쳤다. 야들야들한 아랫입술을 머금고 빨아당기자 여린 몸이 움찔거리며 시후의 품으로 가쁘게 안겨 왔다. 물기에 젖은 점막이 끈적끈적하게 비벼지고 겨울은 제 뒷머리를 헤집는 커다란 손의 감촉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결이 좋고 몰캉한 것이 입술을 핥자 겨울의 입안이 흥건하게 젖어 들었다. 그 촉촉해진 샘을 가르고 들어간 시후의 형체가 겨울의 입안을 쓸어올렸다. 부드럽게 율동하기 시작한 시후의 움직임은 이내 인내심을 잃고 조금씩 거칠어졌다. 온통 질척이는 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저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몰아붙이는 시후에 겨울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달뜬 호흡이 격렬하게 뒤섞이고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액체가 점막을 끈적하게 적셨다. 앞에서 밀어붙여 오는 강렬한 힘에 뒤로 넘어간 겨울은 그대로 소파에 흐드러지게 눕혀졌다. 하아, 입술이 떨어지자 벌어진 틈으로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 천장의 불빛을 가리는 남자의 단단한 상체에 겨울의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다시금 무너지듯 상체를 내린 시후가 겨울의 입술에 격정적인 키스를 퍼부었다. 생경한 감촉에 자지러진 겨울이 움찔움찔 떨자 단단한 팔이 잘록한 허리를 휘감아 제 몸에 밀착시켰다. 조금의 틈도 없이 맞붙은 아랫배로부터 열감이 피어오르자 겨울의 정신이 아득하니 멀어졌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심장이 뛰고, 호흡하기가 버거웠다.
“……!”
흠칫한 겨울이 야트막한 숨을 터뜨렸다. 목덜미로 파고든 뜨거운 입술의 감촉 때문이었다. 성급하게 입술을 묻은 시후는 하얀 목덜미 위로 팔딱팔딱 뛰는 정맥을 따라 부드럽게 키스하며 내려갔다. 얼굴을 화끈하게 붉힌 겨울이 어쩔 줄 모르고 손을 꼼지락거리자, 시후가 자그마한 손 위로 제 손을 부드럽게 겹쳤다.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사이로 길쭉한 손가락이 맞물리자 겨울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오, 오빠아…….”
귓바퀴로 와닿는 말랑한 입술에 겨울은 정신이 혼미했다. 감각이 점점 더 진해지자 야릇하게 젖은 소리가 고막을 축축하게 적셨다. 노골적으로 들려오는 문란한 소리에 질끈 눈을 감은 겨울의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귓바퀴를 타고 귓불로 향한 입술이 말랑한 살결을 빨아당기며 애정을 흩뿌렸다. 온 신경이 귓가로 집중된 와중에 불쑥 파고든 커다란 손이 겨울의 허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으앗!”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낸 겨울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동시에 시후의 입술이 떨어지고 겨울은 빨개진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오, 오빠. 이건 너무…….”
흘끗 눈동자를 굴려 시후를 올려다본 겨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내려다보는 어둑한 시선에서는 들끓는 욕망이 느껴진 탓이었다. 쏟아지는 까만 눈빛만으로도 온몸이 전율하며 떨려왔다.
“싫어?”
나직한 물음에 겨울의 심장에서 어긋나는 소음이 들려왔다. 그렇게 물으며 바라보는 눈빛에서 숨 막힐 듯 아찔한 섹시가 팡팡 터졌다.
“못 참겠어…….”
벌어진 입술 틈으로 거친 호흡을 터뜨리는 그의 모습은 야릇하다 못해 색정적으로 느껴졌다. 거친 숨을 따라 요동치는 탄탄한 가슴 근육에 심장이 온몸에서 뛰어다니는 기분이었다.
“그, 그게 그러니까…….”
이 숨 막히게 섹시한 남자 앞에 대고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여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결국 겨울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대로 먹혀버린다고 해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