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 오늘 한 침대에서 잘까 (54/112)


54. 오늘 한 침대에서 잘까
2022.04.06.


오늘 시후는 아침부터 밤까지 빽빽하게 짜여 있는 스케줄을 소화한 뒤, 밤이 이슥한 시간이 되어서야 퇴근길에 오를 수 있었다.

겨울을 데리러 가고 싶었으나, 마지막 일정인 거래처 미팅이 예정보다 훨씬 늦게 끝나는 바람에 곧장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워가 지난 시간이었기에 도로는 한산했지만, 타이밍 좋지 않게 번번이 빨간불로 바뀌는 신호 때문에 시후의 마음은 조급했다.

노래라도 틀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내비게이션 화면으로 가득 차는 것은 아버지, 성호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미간을 좁힌 시후의 입술 틈으로 깊은 한숨이 흘렀다.

잠시 생각에 잠긴 채 액정에 떠오른 번호를 지그시 바라보던 시후가 이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16550884929237.jpg

-네가 감히 나를 욕보여?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시후는 온종일 차곡차곡 쌓였던 피로가 더욱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

16550884929237.jpg

-10년 넘게 키워준 제 어미와 피 섞인 동생인데, 떠나는 길 배웅하지도 않냐? 이게 대체 어떤 경우야?

1655088492925.jpg

“한번 들렀으면 된 거 아닙니까. 끝까지 자리 지킬 의무, 제게는 없습니다.”

……진짜 가족도 아니니까.

낮게 시선을 내리깐 시후가 뒷말을 읊조리자, 수화기 너머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16550884929237.jpg

-주가는 나날이 바닥을 치고 있는 와중에 한다는 소리가……. 창영이 놈까지 그렇게 됐고, 네가 하루빨리 회사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아야 안정이 될 게 아니냐?

성호의 말에 시후가 입술을 짓씹었다. 아내와 친아들을 일시에 사별한 사람의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는 그저 밤낮으로 어떻게 하면 회사를 더 키울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밖에 없는 괴물이었다.

16550884929237.jpg

-이제 내가 일전에 제안한 것에 대한 대답을 들려줄 때가 된 것 같은데.

1655088492925.jpg

“아버지 회사에 들어갈 생각 없습니다.”

세게 핸들을 쥔 시후가 나직하게 말했다.

1655088492925.jpg

“넥스트 게임즈는 제가 끝까지 책임질 거고, 이혼 신청도 철회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고개를 낮춘 시후의 눈이 번뜩였다.

1655088492925.jpg

“이제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을 겁니다.”

16550884929237.jpg

-뭐, 뭐야?!

1655088492925.jpg

“앞으로 제게 용건이 있으면, 비서 통해서 연락하세요.”

16550884929237.jpg

-강시후, 네 녀석이 지금……!

1655088492925.jpg

“그만 끊겠습니다.”

일방적으로 통보한 뒤 시후는 그대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더 이상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버지에게 소중한 것을 짓밟히고 살아가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이 한목숨을 전부 바쳐서라도,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은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집 근처에 도착해서 주차장으로 들어가려는데, 일순 아파트 앞에 주차된 차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내리는 것을 목격했다.

겨울이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그 차 앞으로 앞질러 간 뒤 빠르게 브레이크를 잠갔다.

차에서 내리자 놀란 듯 커진 눈을 한 겨울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옆에서 여유롭게 웃고 있는 석우의 얼굴에 시후는 부아가 치밀었다.

1655088492925.jpg

‘……또 저놈이야?’

겨울이 쓰러졌을 때, 아내가 아픈 줄도 몰랐던 거냐며 제대로 돌보라고 주제넘은 소리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심지어 예전에는 겨울에게 번호를 달라고 들이댔다가 제게 들켰던 적도 있는 놈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왜 둘이 같이 차에서 내리느냐고 따지고 싶었으나, 겨울과 겨우 사이가 좋아진 마당에 다시금 불화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속은 이미 질투로 화르르 불타고 있었지만, 가까스로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한 척 연기하며 얼굴을 굳혔다.

16550884963484.jpg

“안녕하세요. 저번에 뵙고 또 인사드리네요.”

1655088492925.jpg

“네, 그러네요.”

16550884963484.jpg

“겨울 씨가 늦게 끝나셨길래, 집도 근처라고 하셔서 모셔다드렸어요.”

1655088492925.jpg

“예, 감사합니다.”

말이 길어지면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일일이 따지고 들 것 같아 일부러 짧게 답했다.

그렇게 석우가 떠난 뒤, 집으로 향할 때까지 시후는 자꾸만 굳어지려고 하는 표정을 가까스로 제어했다.

질투하는 것을 티 내면 겨울이 질척인다고 생각하거나, 제게 질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며 집으로 들어선 시후는 샤워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섰다.

잡념을 없애기 위해 차가운 물을 맞았으나 계속해서 머릿속을 파고드는 것은 석우와 겨울이 다정하게 차에서 내리던 모습이었다.

1655088492925.jpg

“……하.”

결국 짧게 숨을 터뜨린 시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쏟아지는 물을 잠근 시후가 무언가 결심한 사람처럼 비장하게 가운을 걸치고 욕실을 나왔다.

16550884963508.jpg

 

***


16550884963513.jpg

“어떻게 그래?! 이제 잡은 물고기다 이거야?”

1655088492925.jpg

“갑자기 무슨 말이야?”

이미 질투로 한바탕 불타올랐던 시후의 속은 전혀 알 길이 없는 겨울이 단단히 심통 난 채 소리쳤다.

16550884963513.jpg

“오빠는 질투도 안 나?!”

세상 뾰로통한 표정으로 원망을 쏟아내는 겨울에 시후는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질투도 안 나냐니…….

16550884963513.jpg

“자기 아내가 밤늦은 시간에, 잘생긴 남자 차 타고 왔는데 질투도 안 하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주형이네 집에 가서 잤다고 할 때는 세상 무너진 표정이더니……!”

잔뜩 성이 난 겨울이 씩씩거리며 콧김까지 내뿜었다.

16550884963513.jpg

“설마 진짜 어장 속 물고기다, 이거야?”

1655088492925.jpg

“…….”

당황한 시후는 뭐라 할 말도 찾지 못하고 멍한 얼굴로 계속해서 울분을 쏟아내는 겨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태도에 더욱 토라진 겨울은 얼굴까지 붉으락푸르락 붉히며 아무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16550884963513.jpg

“오빠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 나 아직 오빠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거 아니거든?”

1655088492925.jpg

“…….”

16550884963513.jpg

“막 그렇게 미치도록 엄청나게 많이 좋아하는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 꺅!”

갑자기 허리를 감아 끌어당기는 단단한 팔의 힘에 놀란 겨울이 짧은 비명을 질렀다. 시후가 잘록한 허리를 감싸 제 품으로 끌어당긴 탓이었다.

자그마한 엉덩이가 튼실한 허벅지 위로 꾹 눌리자 겨울이 화들짝했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허벅지 근육의 촉감에 놀란 겨울이 일어나려고 했으나, 저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굵은 팔뚝의 힘에 벗어날 수가 없었다.

16550884963513.jpg

“뭐, 뭐 하는 거야…….”

이 와중에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한 제 심장을 느끼며 겨울이 입술을 옹송그려 물었다.

16550884963513.jpg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이야?”

떨리는 가슴을 들키지 않게 새침하게 쏘아붙이며 나름 흉흉한 눈으로 시후를 흘겨보았다.

도끼눈을 하고 저를 보는 겨울을 똑바로 응시하며 시후가 낮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말은 그렇게 해도 생딸기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귀엽다 못해 사랑스러웠다.

1655088492925.jpg

“난 너 미치도록 좋은데.”

비스듬히 고개를 틀자 커다랗게 뜨여진 눈이 깜빡거렸다.

1655088492925.jpg

“너는 아니야?”

픽 웃으며 겨울의 뺨을 가볍게 꼬집자 붉은 입술이 톡 튀어나왔다.

할 말을 잃은 듯 바쁘게 구르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테이블 위에 있는 차 키 세 개를 주워들었다.

1655088492925.jpg

“손 줘봐.”

16550884963513.jpg

“……손은 왜?”

1655088492925.jpg

“일단 줘.”

주춤거리며 슬쩍 펼쳐진 작은 손바닥에 차 키 세 개를 일렬로 올려놓았다.

겨울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커다란 두 눈을 깜빡이며 세 개의 열쇠들을 바라보았다.

전부 억대를 자랑하는 초고가의 대형 세단과 수입 스포츠카들이었다.

1655088492925.jpg

“골라.”

숨이 뚝 하고 멈추었다.

1655088492925.jpg

“앞으로 네가 타고 다닐 차.”

홀린 듯 고개를 드니 저를 바라보는 시후의 까만 눈동자와 마주쳤다.

겨울의 동공이 가늘게 흔들렸다.

1655088492925.jpg

“너 다른 남자 차 타고 다니는 거, 못 보겠다고.”

여린 심장에서 쿵 소리가 났다.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시후를 바라보자 그가 나직하게 웃었다.

1655088492925.jpg

“매일 데리러 가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도 있으니까. 앞으로는 출퇴근할 때 내 차 타고 다녀. 면허 있지?”

16550884963513.jpg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상상도 못 한 전개에 당황한 겨울이 입술을 달싹였다.

질투를 안 한다고 생각해 토라진 거였는데, 실상은 질투 때문에 억 단위의 차를 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서운했던 감정은 눈 녹듯이 사라졌으나, 눈앞에 보이는 세 개의 차 키가 새로운 고민으로 부상했다.

전부 겨울이 수년을 일한다고 해도 사들이기 어려운 차들이었다.

16550884963513.jpg

“꼭 이 중에서 골라야 해? 너무 부담스러운데.”

1655088492925.jpg

“아니면 네 명의로 새로 뽑아줄까?”

16550884963513.jpg

“뭐? 됐어! 뭘 그렇게까지…….”

말끝을 흐린 겨울이 도저히 고르기 어려운 세 가지의 선택지 앞에서 전전긍긍했다.

16550884963513.jpg

“나 역시 못 고르겠어. 그냥 택시나 지하철 타고 다니는 게…….”

1655088492925.jpg

“안 고르면 내 맘대로 고를게.”

이번만큼은 고집부리겠다는 듯이 시후의 말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세 차 중에서도 가장 고액의 슈퍼 카로 향하는 시후의 손길을 보며 당황한 겨울이 그의 손을 잡아챘다.

16550884963513.jpg

“자, 잠깐!”

이렇게 비싼 차를 몰고 다니다가는 제 명에 못 살 것 같았다. 그나마 비교적 저렴한 가격의 국산 차의 키를 집어 든 겨울이 다급하게 말했다.

16550884963513.jpg

“이거! 이거로 할게.”

국산 차였지만 무려 1억이 넘는 국내 최고가의 대형 세단이었다. 그래도 나머지 두 개의 스포츠카보다는 양반이었으니 차선책으로 아무렇게나 선택했다.

1655088492925.jpg

“그래, 착하네.”

다정한 눈빛이 겨울을 쓰다듬듯이 내려왔다.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시후의 입술이 길게 늘어졌다.

1655088492925.jpg

“이제 다른 남자 차 타지마.”

일순 웃음기가 사라진 시후의 눈동자가 어둑했다.

1655088492925.jpg

“질투 나니까.”

끈적한 음성이 겨울의 입술 위로 야릇하게 달라붙었다. 겨울의 심장이 거칠게 떨렸다.

은연중에 느껴지는 짙은 소유욕이 겨울의 머리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16550884963513.jpg

“……치, 얼굴색 하나도 안 바뀌고 뻔뻔하게 잘도 말하네.”

작게 쫑알거리며 고개 돌리자 시후가 픽 하고 웃었다.

그는 제 품에 안긴 겨울의 젖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1655088492925.jpg

“머리 아직 안 말렸네. 내가 말려줄까?”

뜻밖에 던져진 제안에 겨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잠시 머뭇거리던 겨울이 시후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자그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5088492925.jpg

“그럼 욕실로 가자.”

겨울의 허리를 잡고 소파에서 일어난 시후가 그녀의 손을 움켜쥐고 욕실로 향했다.

그녀의 뒤에 서서 드라이기를 켠 시후가 비단처럼 곱고 긴 생머리를 흐트러뜨리며 천천히 말려주었다.

제 머리카락으로 와닿는 부드러운 손길과 간질간질한 미풍에 겨울의 머릿속이 어지럽게 흐트러졌다.

긴장한 겨울이 침을 꼴깍 삼키고 거울 속의 시후를 흘끗 보았다.

16550884963513.jpg

“…….”

한편, 온 신경이 겨울에게로 쏠린 시후는 심장이 엄청난 속도로 뛰는 중이었다.

별 뜻 없이 머리를 말려주겠다고 한 것이었지만, 막상 그녀를 앞에 세우니 온 오감이 날뛰어 야단이었다.

긴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기 때문에 하얀 티셔츠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그 안으로는 붉은 속옷이 언뜻 비쳐 보이고 있었다. 그 야릇한 색채에 입술이 마르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 위로는 새하얀 목덜미가 무방비하게 드러나 있었는데, 욕실의 조명을 한껏 받은 뽀얀 살결이 시후의 시야를 아찔하게 자극했다.

생과일처럼 풋풋하고 달콤한 냄새가 코끝에서 진하게 어른거리자 굳게 닫힌 입술이 벌어졌다.

겨울의 체향인지, 샴푸의 향기인지 알 수 없었다. 심장이 가파르게 뛰었다.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나 있는 목덜미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 같았다.

그리고 그 깨끗한 피부의 오른쪽 위에는 까맣고 작은 점이 자리하고 있었다.

늘 머리카락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점…….

홀린 듯이 드라이기를 끈 시후가 점 위를 엄지로 살짝 문지르자 놀란 겨울의 귓가가 붉어졌다.

16550884963513.jpg

“뭐, 뭐야……?”

1655088492925.jpg

“목 뒤에 점이 있었네.”

16550884963513.jpg

“그래? 거기 점 있는지는 나도 몰랐네.”

가만히 목덜미 위의 점을 쓰다듬던 시후가 일순 그 위로 입술을 묻었다.

뜨거운 입술이 제 목덜미에 와닿자 놀란 겨울의 입술이 툭 벌어졌다.

이내 느껴지는 촉촉한 감각에 벌어진 틈으로 야릇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반응을 즐기는 듯 입을 벌린 시후가 살짝 베어 물자 당황한 겨울이 제 입가를 틀어막았다.

1655088492925.jpg

“또 어디에 숨겨져 있어?”

느릿하게 두 팔을 벌린 시후가 겨울의 잘록한 허리를 끌어안아 제 몸으로 딱 붙였다.

1655088492925.jpg

“안 보이는 곳에도 있나.”

등 뒤로 느껴지는 탄탄하게 부푼 가슴 근육과 뜨거운 남자의 체온에 겨울의 가슴이 일렁였다.

묵직하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귓가를 함빡 적시자 이성이 마비되는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그 격정적인 박동은 마치 그의 마음이 온전히 제게 향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1655088492925.jpg

“겨울아.”

숨소리를 가득 섞은 섹시한 목소리가 살결 위로 잠겼다. 온몸이 흐물흐물 녹아버리는 듯했다.

……내 이름이 이렇게 달콤했던가.

1655088492925.jpg

“오늘 한 침대에서 잘까.”

이성을 산산이 부수는 위험한 목소리였다.

그 나른한 음성과 함께 예리한 남자의 콧대가 목덜미 위로 미끈하게 비벼졌다.

1655088492925.jpg

“혼자 두고 싶지 않아.”

과열된 숨결이 하얀 목덜미를 함빡 적셨다.

척추 위를 쓸어내리는 길쭉한 손가락의 감각에 겨울의 아랫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야성적인 색기가 숨통을 조이고 온몸에 전류가 짜릿 흐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1655088510502.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