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내 여자
(57/112)
57. 내 여자
(57/112)
57. 내 여자
2022.04.17.
“나 두 사람, 쇼윈도 부부인 거 아니까 괜히 힘 빼지 마요.”
입술 선을 따라 립스틱을 바르던 겨울의 손목이 삐끗했다.
일순 제 귀를 의심한 겨울의 눈이 커다랗게 뜨여졌다.
고개 돌려 떨리는 동공으로 민주를 바라보자 그녀가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했다.
“작년에 겨울 씨 웨딩드레스 고를 때, 시후 비서랑 같이 골랐잖아요. 결혼식 준비도 다 혼자 한 거로 알고 있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누구한테 그런 헛소리를 듣고…….”
“헛소리라니요. 시후가 직접 나한테 말해준 건데.”
비스듬히 고개를 튼 민주가 비웃는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시후가 나한테 그랬거든요. 명목뿐인 가짜 결혼이라고.”
팔짱을 끼고 도도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에 겨울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가짜 결혼?
그는 분명히 제게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했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라고.
물론 그동안 겨울은 석연치 않은 점을 많이 느꼈고, 시후와 정상적인 부부 사이가 아니었을 것 같다고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진실을 듣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
“기억을 잃었다더니 진짜인가 보네…….”
당혹감에 가만히 서 있는 겨울에게 민주가 작게 중얼거렸다.
똑똑히 제 귀를 파고드는 소리에 겨울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뭐라고요?”
“아, 이거 비밀인가?”
일부러 흘려놓고 실수인 척 입가를 가렸다.
그 행동을 보는 겨울의 동공이 거칠게 뒤흔들렸다. 누군가 망치로 뇌를 깨부순다고 해도 이런 충격은 아닐 터였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혼란한 반응을 즐기는 듯 민주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남들한테는 말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입 무거운 거 알고, 시후도 나한테만 말한 거거든요.”
……정말 그가 이 여자에게 이 모든 걸 말한 걸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 걸까.
쇼윈도 부부였다는 건 대체 무슨 말이고, 기억을 잃은 사실은 왜 알고 있는 건지…….
머리가 깨질 것처럼 혼란스러웠으나, 가까스로 표정 관리한 겨울은 독하게 민주를 노려보았다.
“대체 무슨 망상에 빠진 건지 모르겠네요. 소설은 오민주 씨 혼자 쓰세요.”
진실을 듣더라도 그녀가 아닌 시후의 입에서 들을 것이라 다짐했다. 한 글자, 한 글자 박아넣듯이 또박또박 발음하자, 민주가 팔짱을 풀었다.
곧장 제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보석을 빼어낸 민주가 겨울의 눈앞에서 가볍게 흔들었다.
“겨울 씨, 전에 이 반지에 관심 가졌었죠?”
“…….”
이를 앙다문 겨울이 민주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가느다란 손가락 틈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반지는 시후의 왼손 약지에 늘 끼워져 있는 반지와 똑같이 생긴 한 쌍의 반지였다.
그리고 자선 파티에서, 민주는 시후와 자신이 맞춘 우정 링이라고 말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내 직업상 결혼을 쉽게 할 수가 없잖아요. 내가 비혼주의기도 하고…….”
“…….”
“그래도 시후와 나는 뭐랄까, 떼려야 뗄 수 없는 실과 바늘 같은 사이거든요. 그래서 대신 이렇게 표식을 한…….”
“헛소리하지 마세요.”
도저히 더는 들어줄 수가 없었다. 겨울이 민주의 말을 끊으며 예리하게 공기를 갈랐다.
“그건 제 결혼반지라고 알고 있는데요.”
“어머, 기억도 없으면서 무슨…….”
빨간 입술 틈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법적으로 부부라고 해서, 본인 반지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 자만 아닌가요? 내가 다 얼굴이 붉어지네요.”
“유부남이 반지를 끼면 당연히 아내 반지죠. 그게 하다못해 첩 반지는 아니잖아요?”
“뭐라고요, 첩……?”
노골적인 단어에 일순 평정이 흐트러진 민주의 얼굴이 흉악스럽게 일그러졌다.
“하.”
헛숨을 터뜨린 민주가 두 눈을 번뜩였다. 내내 여유롭게 웃고 있던 입가가 일그러지고 본색이 드러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이봐요. 지금 나한테 첩이라고 했어요?”
“아, 생각해보니 첩은 아니네요. 정정할게요.”
턱 끝을 치켜올린 겨울이 입술을 움직였다.
“어떻게든 우리 부부 사이, 방해하려고 나타난 유치한 악역 정도인가.”
“…….”
“주연도 아니라 평생 조연으로 소비되다가 사라질, 가엾은 악당 1, 2…….”
설핏 웃음을 터뜨리며 말끝을 늘이자 약이 오른 민주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꽉 쥔 주먹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며 겨울이 가소롭다는 듯 실소했다.
“대학 동창이든 비즈니스 파트너든, 내 남편 옆에 붙어 있고 싶으면 선 넘지 말고 감정 숨겨요.”
“…….”
“안 좋아하는 척 연기라도 하던가. 그게 당신 전문 분야잖아.”
똑같이 민주의 속을 긁어 놓자, 결국 내내 가식적으로 웃던 가면 뒤의 추악한 민얼굴이 드러났다.
“어린 게 싸가지까지 없네…….”
민주가 싸늘하게 속삭였다.
“너, 네 남편하고 잔 적은 있니?”
숨이 뚝 끊겼다. 겨울의 입가가 일순 굳었다.
“애 생기면 남편 몰래 지우겠다는 계약서에 사인이나 하고…….”
날붙이처럼 고막을 파고드는 소리에 여린 동공은 거칠게 흔들렸다.
“여자로서 쪽팔리지도 않나 봐.”
……이 여자, 대체 어떻게 그 계약서의 존재까지도 알고 있는 거지?
그 계약서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나와 유서진, 강시후 세 사람뿐인데…….
“시후는 침대 위에서가 진짜로 죽여주는데. 멍청해서 그걸 써먹지를 못하네…….”
기세등등하게 목소리를 높인 민주가 겨울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겨울은 구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안 그래도 쓰린 속이 온통 뒤집히고 아침에 먹은 음식들이 내장을 타고 역류하는 듯했다.
당장에라도 뺨을 올려붙이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으며 숨을 집어삼켰다.
무례에 더한 무례로 답하는 것은 패배를 인정하고 하수를 자처하는 행동이었다.
“……남의 남편을 그따위로 말하지 마세요. 더는 그쪽과 할 말 없으니 갑니다.”
핸드백을 움켜쥔 겨울이 곧장 등을 돌려 화장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러나 복도로 나서기도 전에 문 옆의 벽에 기대 서 있는 남자와 어깨를 부딪쳤다.
충격에 몸이 뒤틀렸으나 거센 힘이 어깨를 붙잡아 지탱했다.
고개를 들자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서 섬광처럼 번졌다.
“…….”
울컥한 겨울이 입술을 깨물었다. 원망 서린 눈으로 시후를 바라보았다가 움찔했다.
그는 당장에라도 모든 걸 부숴버릴 사람처럼 험악하게 화가 난 표정이었다.
오싹한 겨울이 숨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자, 화장실 입구로 민주가 뒤따라 나왔다.
곧바로 시후를 발견한 민주는 아연실색하더니, 이내 귀신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창백하게 질렸다.
“시, 시후야…….”
당황한 민주가 손을 벌벌 떨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했던 얼굴이 잔뜩 겁을 먹어 핏기 하나 없었다.
“저기, 이건 그냥…….”
“겨울아.”
제 팔뚝을 잡으려는 민주의 손을 쳐낸 시후가 겨울을 향해 고개 돌렸다.
“잠깐 룸에 가 있을래?”
낮게 뱉는 얼굴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섬뜩한 표정이었다.
“…….”
겨울은 등골이 싸늘했다. 화가 난 정도로 따지면 겨울도 밀리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저 말을 무시하고 식당을 뛰쳐나가고 싶었으나 그의 표정이 너무도 무서워 반기를 들 수 없었다.
항상 다정하게 저를 바라보던 강시후와 지금 민주를 노려보는 강시후가 동일 인물이란 걸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가슴이 서늘해진 겨울이 고개를 끄덕이고 뒷걸음질 치다가 룸으로 도망치듯이 걸었다.
뒤도 돌아볼 수 없었다. 그저 복도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 무작정 룸으로 들어왔다.
“…….”
머리가 마비된 것처럼 차갑고, 손이 떨렸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갈피 잃은 동공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헛숨이 터져 나왔다.
이성이 돌아오자,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대체 내가 왜.
왜 내가 저 둘을 같이 두고, 여기에 혼자 앉아 있어야 하지?
계속 이곳에 앉아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건 겨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겨울이 룸 밖을 나가기 위해 문에 손을 댄 순간, 굳게 닫혀 있던 미닫이문이 먼저 열렸다.
움찔한 겨울이 시선을 들어 올리자 룸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시후가 아닌 민주였다.
문을 닫은 그녀는 두 손을 모으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뭐예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겨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민주는 겨울의 눈도 쳐다보지 못하고 덜덜 손발을 떨었다.
“……죄송합니다…….”
“…….”
“아까 제가 실언했던 모든 말,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저기요. 지금 울어요?”
“정말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당황한 겨울이 난색을 표했다.
갑자기 룸 안으로 들어온 민주가 눈물을 흘리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연신 사과를 하는 탓이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더듬더듬 움직이며 민주는 진실을 털어놓았다.
“사, 사실 전부 시후가 말한 게 아니라 시후 어머님한테 들었어요……. 어머님 살아계실 때 저하고 같은 골프 모임이어서 자주 만났었거든요……. 함겨울 씨, 기억 잃은 것도 그분한테 들었고…….”
훌쩍거리며 어수선하게 말을 잇는 통에 겨울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그리고…… 시후랑 잔 적은 커녕 손잡아 본 적도 없고요……. 제가 시후 좋아한 건 사실인데 일방적인 감정이었어요. 주제도 모르고 함겨울 씨한테 폭언한 거 정말 죄송합니다…….”
“……저기요. 갑자기 왜 그래요?”
한 대 얻어맞은 사람도 이렇게 행동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대체 저가 없는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 기세등등하던 여자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연신 사과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형편없이 덜덜 떠는 게 무릎만 안 꿇었지, 세상 비굴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 반지.”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낸 민주가 바르르 떨리는 손을 뻗어 겨울에게 건넸다.
“함겨울 씨 결혼반지 맞아요. 제가 겨울 씨 사고 났을 때 우연히 근처에서 차 타고 이동 중이었는데……. 그때 길에 떨어져 있는 거 주웠어요……. 바, 바로 돌려드렸어야 했는데, 그러긴커녕 거짓말까지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줄줄 흐르는 눈물을 아무렇게나 닦은 민주가 고개를 숙였다.
“요, 용서해주세요…….”
“…….”
“그, 그러니까…… 제발 시후한테 잘 좀 말해주세요…….”
저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며 너저분하게 말을 잇는 민주를 보며 겨울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정말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당혹감을 지울 새도 없이 민주는 마스크와 모자로 제 얼굴을 가리고 룸 밖을 나섰다.
머지않아 주머니에 손을 질러 넣은 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무표정한 시후였다.
어안이 벙벙해진 겨울이 넋을 놓은 표정으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태연한 표정의 시후를 보며 가늘게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알려줬을 뿐이야.”
까만 눈동자가 비스듬히 아래로 내려왔다.
“나한테 여자는 함겨울 하나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