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한 침대에 누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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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한 침대에 누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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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한 침대에 누울 여자
2022.04.20.
토요일이었지만 언제나 그랬듯 업무를 보기 위해 회사에 출근한 시후는 겨울과의 저녁 약속 시간에 맞춰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곧바로 차에 올라탔으나 도로 사정으로 인한 차량 정체 때문에 약속 시간에 약 5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빠른 걸음으로 안내받은 룸으로 들어가니 시후를 맞이하는 것은 홀로 놓여 있는 겨울의 가방뿐이었다.
잠깐 화장실을 갔겠거니 생각하며 시후도 손을 닦기 위해 룸 밖을 나섰다.
복도를 따라 남자 화장실로 다가가는데,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여자 화장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후가 나한테 그랬거든요. 명목뿐인 가짜 결혼이라고.”
단정하던 미간이 삽시간에 구겨졌다. 듣기 싫은 하이톤 음성의 주인은 오민주가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대화 상대는…….
아마도 겨울일 터였다.
……명목뿐인 가짜 결혼.
그건 겨울이 기억을 잃기 전의 결혼생활을 뜻하는 말이었다.
한집에 살면서 인사도 하지 않고 서로를 유령 취급하며 그저 동거인으로만 살았던 그때.
하지만 시후는 그 당시 겨울과의 결혼의 실상을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대외적으로는 철저하게 행복한 신혼부부를 연기했기 때문에, 모두가 겨울과 자신을 죽고 못 사는 잉꼬부부라고 떠들어댔다.
……그런데 오민주가 어떻게 진실을 알고 있는 걸까.
“기억을 잃었다더니 진짜인가 보네…….”
이윽고 자그마한 소리로 흘러나온 겨울의 약점에 시후의 미간이 사납게 좁아졌다.
겨울이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 또한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순식간에 서늘해진 혈관으로 피가 느리게 흘렀다.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남들한테는 말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입 무거운 거 알고, 시후도 나한테만 말한 거거든요.”
내가…….
네까짓 여자한테 함겨울의 약점을 알렸다고.
하, 헛숨이 터지고 불뚝 치밀어 오르는 화에 핏줄이 곤두선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오민주는 지금껏 한 번도 제 앞에서 대놓고 겨울에 대해 악의를 표하거나, 제게 안 좋은 소리를 늘어놓은 적이 없었다.
귀찮게 구는데도 계속 비즈니스 파트너로 곁에 둔 것도 그녀가 선을 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껏 뒤에서 남의 아내에게 저딴 소리나 지껄이고 다녔다는 건가.
고개 돌린 시후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씹어먹을 것처럼 바라보았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뇌관을 뒤덮었다.
‘……설마.’
예전 자선 파티에서 겨울이 갑자기 싸하게 태도를 바꾼 것도 오민주 때문이었나.
억세게 다문 턱으로 힘이 들어가고 이성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당장에라도 저 대화를 중단시키고 겨울을 빼내 오기 위해 식당의 여직원을 호출하려던 찰나였다.
“대체 무슨 망상에 빠진 건지 모르겠네요.”
명료한 음성이 귓가에 날아와 박히자 시후가 멈칫했다. 겨울의 똑 부러진 응수에 조금 놀란 시후의 눈이 커졌다.
“소설은 오민주 씨 혼자 쓰세요.”
그 말은 오민주의 말보다 시후를 더 신뢰한다는 뜻이었다.
순간적으로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오고 가슴 한쪽이 미약하게 욱신거렸다.
저도 모르게 뻐근한 감각이 이는 심장 부근에 손을 올리자 오민주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겨울 씨, 전에 이 반지에 관심 가졌었죠?”
……반지?
무슨 반지를 말하는 걸까.
“내 직업상 결혼을 쉽게 할 수가 없잖아요. 내가 비혼주의기도 하고……. 그래도 시후와 나는 뭐랄까, 떼려야 뗄 수 없는 실과 바늘 같은 사이거든요.”
그 말에 시후의 동공이 탁 풀렸다. 정신에 문제가 있지 않고서야 저 정도 헛소리를 지껄일 수는 없다.
“헛소리하지 마세요. 그건 제 결혼반지라고 알고 있는데요.”
겨울의 강경한 대응에 시후의 한쪽 눈썹이 내려앉았다. 자연스럽게 흐른 시선 끝에 시후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반지가 위태롭게 걸렸다.
겨울이 기억을 잃었던 사고 당시,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후와 그녀는 심하게 말다툼을 했었다.
화가 났던 겨울이 반지를 빼서 손에 쥐고 차에서 뛰쳐나갔던 것까지는 기억하지만, 사고 이후에는 시후도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반지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반지를 오민주가 갖고 있다고?
대체 왜?
“어린 게 싸가지까지 없네…….”
상념에 빠진 시후의 숨을 가른 것은 민주의 추악한 본성이었다.
“너, 네 남편하고 잔 적은 있니? 애 생기면 남편 몰래 지우겠다는 계약서에 사인이나 하고…….”
안 그래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 와중에 겨울에게 돌이킬 수 없는 무례를 저지르는 민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이성이 증발했다.
“시후는 침대 위에서가 진짜 죽여주는데. 멍청해서 그걸 써먹지를 못하네.”
네깟 여자와 한 침대에 누울 리가, 입안을 짓씹자 핏물이 터졌다.
살면서 겨울 외에 그 어떤 여자도 맘에 품어 본 적 없었고, 겨울을 다시 만난 뒤로는 그 누구와도 손가락 하나 얽혀 본 적 없었다.
마음과 더불어 몸까지 쾌락을 베풀어주고 싶다고 생각한 여자는 오로지 겨울뿐이었다.
실제로 입술로 정성을 다해 제 흔적을 새긴 여자도 그녀가 처음이었다.
“…….”
화장실에서 나오던 겨울의 눈이 시후를 발견하고 놀라 한껏 커졌다.
시후는 곧 눈물이라도 터뜨릴 것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보자 더 이상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고 참아왔던 화가 폭발하며 꽉 쥔 주먹이 떨려왔다.
곧바로 화장실 안에서 뒤따라 나온 오민주를 바라보는 시후의 눈빛에서 불길이 일었다.
감히…….
저딴 싸구려 혓바닥이 내 여자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시, 시후야…….”
귀신이라도 만난 것처럼 창백하게 질린 오민주의 얼굴에 심사가 뒤틀렸다.
지금껏 겨울 앞에서 신나게 지껄이던 주둥이를 떨며 바라보는 민주에 시후의 신경은 점점 더 어긋났다.
“저기, 이건 그냥…….”
“겨울아.”
선을 넘었으니 이제 그 대가를 치를 차례다.
“잠깐 룸에 가 있을래?”
다른 건 다 부수고 없애버려도…….
단 하나, 함겨울 만큼은 건들지 말았어야지.
고개를 끄덕인 겨울이 룸으로 향하자 시후의 시선이 느릿하게 민주에게로 꽂혔다.
제 발 저렸는지 온몸을 떨고 있는 민주를 말없이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잠시 적막이 주위를 휩쓸고 겁에 질린 민주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입을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누르며 코트 안에서 핸드폰을 꺼낸 시후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홍 비서.”
낮은 음성이 목울대를 긁으며 흘러나왔다.
“오민주가 나온 우리 회사 광고, 지금 이 순간 부로 전부 내려.”
그 말에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경악하며 달려들었다.
“시, 시후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인벤티에 연락해서 광고모델 교체할 예정이니까 기획 새로 하라고 전달하고.”
“제발…… 내가 잘못했어. 그러지 마. 어?”
“데이앤데이 오민주 콜라보 캐릭터 판매 중단하고 이벤트 굿즈도 전량 폐기하라고 전해.”
“시후야!”
할 말만 한 뒤 전화를 끊은 시후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어디서 목소리를 높여.”
“…….”
“여기서 이목 끌어봐야 불리한 쪽이 누군지 모르나?”
새빨간 입술이 퍼석하게 말랐다. 바르르 경련하다가 하얀 이로 살짝 짓눌렸다.
이내 진하게 화장한 눈가가 부들부들 떨리더니, 까만 마스카라가 형편없이 번지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시후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하얗게 질린 볼을 타고 투명한 물줄기가 가느다란 자국을 남겼다.
“우리 대학 시절 때부터 10년을 친구로 지냈잖아. 겨우 결혼한 지 1년도 안 된 여자 때문에 날 버리겠다고?”
“착각하지 마.”
“…….”
“네가 내 사람이었던 적이 없는데, 어떻게 버린다는 거지?”
“……내가, 내가 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래서 한 침대에 누웠었다고 떠들어댔나?”
냉소를 머금은 입술이 민주의 심장에 아프게 박혔다.
“……그건, 내가 너 아직도 많이 사랑해서 그랬어. 네가 결혼하고 나서는 나랑 말도 안 섞으려고 하니까…….”
“입 닥쳐.”
너저분하게 쏟아진 고백을 자르는 거친 말투에 민주의 가슴이 오싹하게 내려앉았다.
“아까 지껄인 개소리 누구한테서 들었는지나 말해.”
“……전부 어머님께 들었어. 겨울 씨가 사고 때문에 기억 잃었다고……. 그래서 피임계약서 쓴 것도 기억 못 한다고.”
“그럼 이 반지는 왜 네가 갖고 있는 건데.”
민주의 손에 들린 반지를 뺏어 들며 묻자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숨을 헐떡였다.
“사고 당시에 우연히 지나가다가 주웠어…….”
“그딴 말을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진짜야!”
민주는 울부짖듯이 외쳤다.
“내가 이제 와서 너한테 무슨 거짓말을 하겠어!”
시후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민주를 노려보자 그녀의 어깨가 거세게 들썩였다.
“……시후 너, 설마 나 의심하는 거야?”
“…….”
“내가 함겨울을 차로 치어 죽이려고 했다는 거야, 뭐야…….”
엉엉 울며 소리치던 민주를 내려다보며 시후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한 모든 얘기, 누구한테 말했지?”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함겨울 씨 관한 건, 나도 얼마 전에 어머님 돌아가시기 직전에 들은 거고.”
“그럼 앞으로도 영원히 입 다물고 있어.”
오싹한 경고에 민주의 몸에서 핏기가 전부 가셨다.
일순 억울함이 몰려온 민주가 치기 어린 입술을 아무렇게나 움직였다.
“말하면 어떻게 되는데……?”
시후의 입가가 험악하게 비틀렸다.
“뭐?”
“……비밀 지켜주는 대가로, 나랑 한 번만 자자.”
“네 눈엔 내가 발정 난 쓰레기로 보이나?”
“왜? 다른 남자들은 나랑 자지 못해서 안달인데…….”
살벌하게 어둑해진 까만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민주가 간절하게 중얼거렸다.
“한 번만 안아주면, 나도 너에 대한 미련 깔끔하게 버리고 연락도 안 할…….”
“머리가 나빠서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인데.”
시후의 까만 눈이 민주를 씹어 먹을 것처럼 흉흉하게 직선으로 내려왔다.
“내가 한 침대에 눕는 건, 영원히 함겨울 하나뿐이야.”
“…….”
“그러니 떠벌리고 싶으면, 어디 네 멋대로 혀 놀려 봐.”
제 코트 안으로 무자비하게 손을 쑤셔 넣은 시후가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긴장한 민주의 시선이 일정하게 움직이는 시후의 손가락 끝에 닿았다.
이내 액정에 한가득 띄어진 사진을 본 민주의 동공이 거칠게 뒤흔들렸다.
“……이, 이걸 어떻게 네가…….”
몇 년 전, 유부남인 계형석 감독과 몰래 불륜을 저질렀던 때의 사진이었다.
새파랗게 질린 민주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겁에 질린 민주가 파들파들 떨며 눈물 젖은 눈으로 시후를 올려다보았다.
“시, 시후야…….”
“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허술한 새끼가 아니야.”
언제든 약점을 틀어쥐고 숨통을 조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제 계획에 반하는 건 그 어느 것도 용납할 수 없었으니까.
“내가 잘못했어. 한 번만 용서해줘.”
곧장 시후의 팔을 동아줄처럼 붙잡았으나 그가 거세게 뿌리쳤다.
“제, 제발 살려줘. 시후야…….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지, 네가 더 잘 알잖아…….”
평생에 뼈를 깎는 노력으로 쌓아 올린 커리어가 단번에 무너질 만한 추악한 스캔들이었다.
스스로도 그것을 알기에, 현 상황에서 주제 파악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무작정 두 손을 모은 민주가 자존심도 전부 버리고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제발 부탁이야……. 영원히 사라져서 다시는 네 눈앞에 나타나지도 않을게…….”
“살고 싶으면, 가서 빌어.”
“……어?”
민주의 동공이 휑하니 울렸다.
“내 여자 기분 풀리도록, 무릎을 꿇어서라도 빌라고.”
살기 어린 눈빛이 민주의 심장을 바싹 조였다.
“겨울이 반응에 따라…….”
까만 시선이 사선을 타고 내려와 민주의 숨통을 단번에 졸랐다.
“널 죽일지 살릴지 결정할 테니까.”
침을 꿀꺽 삼킨 민주가 경직된 고개를 필사적으로 끄덕였다.
***
“알려줬을 뿐이야. 나한테 여자는 함겨울 하나뿐이라고.”
시후의 말에 겨울은 완전히 얼이 나가버렸다.
아직도 겨울의 머릿속으로는 무자비하게 얻어맞기라도 한 사람처럼 온몸을 벌벌 떨며 연신 죄송하다고 사과하던 민주의 잔상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눈 건 불과 10분 남짓한 시간이었는데,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그 기세등등하던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빌고 또 빌었던 걸까.
“혹시…… 오민주 씨, 때리기라도 한 거야?”
시후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걜 왜 때려. 손대기도 싫은데.”
“그럼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저렇게 덜덜 떨면서 사과를 해? 저 잘난 맛에 사는 여자가…….”
“우리 회사 광고모델에서 잘렸어.”
겨울이 마른 숨을 삼켰다.
“이미 찍은 광고들은 전부 내리라고 지시했고. 이제 더는 비즈니스든 사적으로든 절대 엮일 일 없을 거야.”
놀란 겨울이 눈을 깜빡였으나 시후는 태연하게 테이블 의자를 빼주며 겨울을 앉혔다.
온몸에 힘이 빠진 겨울은 얼떨결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시후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아니……. 설마 나 하나 때문에 지금…….”
“너 하나 때문이라니.”
겨울과 시후의 시선이 진득하게 뒤엉켰다.
“내게 너보다 중요한 건 없어.”
겨울의 심장에서 저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제 다 버려도, 너 하나는 못 놔.”
연약한 갈색 눈동자가 풍랑을 맞은 듯 거침없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