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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항상 네 곁에 있을 테니까 (60/112)


60. 항상 네 곁에 있을 테니까
2022.04.27.


호랑이 교도관보다 더욱 무서운 CEO가 부재한 넥스트 게임즈는 평소보다 긴장이 한결 풀어진 상태였다.

바쁜 프로젝트도 모두 끝난 뒤였기에 한 해에 두세 번 있을까 말까 한 평화가 본사 건물을 따뜻하게 감쌌다.

시후의 친구이자 프로그램 파트의 팀장인 재환은 평소와 달리 기분 좋게 콧노래를 부르며 사무실을 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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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그러다 문득, 디자인 파트 팀장인 김은성이 내뱉는 깊은 한숨에 재환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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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성 님. 왜 갑자기 한숨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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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게…….”

은성이 난처한 기색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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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이 사모님 친구 소개 주선해주시기로 했는데……. 사실 제가 어제 새벽에 전 여자 친구가 찾아와서 회포 좀 풀고, 재결합했거든요. 그래서 소개팅을 못 하게 될 것 같은데 날짜가 오늘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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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그런 걸 고민하고 있어요?”

재환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음흉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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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준비된 소개남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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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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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이 오늘 저녁이라는 거죠? 그 소개팅 나한테 넘겨요. 내가 대신 나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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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대표님한테 허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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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표님한테 말하고 허락받을게요. 그럼 되죠?”

이 소개팅은 죽어도 자신의 것이라는 듯 손가락을 하나 펼쳐 보인 재환이 호탕하게 웃었다.

쇳불도 단김에 빼랬다고, 은성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곧장 핸드폰을 주워든 재환이 시후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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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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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대표야. 이번에 네가 은성 님 시켜준 소개팅 내가 대신 나가면 안 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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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든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해. 오늘 하루 전화하지 마.

뚝.

퉁명스럽게 할 말만 하고 끊어진 전화에 재환이 잠시 두 눈을 끔뻑거렸다.

그 반응에 은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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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이 뭐라고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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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흔쾌히 나가라고 하네요.”

능청스럽게 대답한 재환이 웃으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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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분 번호 좀 알려주세요. 어디서 만나기로 했어요?”

 

***

늦은 시간까지 겨울 바다를 즐기고 예약해둔 오션뷰 레스토랑에서 오붓하게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은 시후의 완벽한 데이트 플랜이었다.

계획대로 레스토랑에 도착해 코스 요리를 먹는 도중, 불청객에게 방해를 받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재환에게서 온 전화를 뚝 끊어버린 시후는 귀찮다는 듯 핸드폰을 코트 안주머니로 밀어 넣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겨울이 딱 한입 남은 수프를 깔끔하게 떠서 먹으며 가볍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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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야? 오빠 회사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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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신재환. 프로그램 파트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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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때문에 전화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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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전에 네 친구, 민희수 씨 소개해 주는 거 대신 나가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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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 희수도 괜찮아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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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까불거리긴 해도, 사람 자체는 괜찮아. 나쁜 놈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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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꽤 오래 알고 지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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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대학 시절 때부터 계속 옆에서 봐왔으니까.”

시후의 대답에 일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린 겨울이 두 손뼉을 짝 소리가 나게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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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전에 말했던 그 창업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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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다 나가고 아직 회사에 남아 있는 건 신재환 하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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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 있는 사람이네.”

겨울이 작게 웃으며 물잔으로 입가를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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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친구니까 분명히 괜찮은 사람이겠지. 희수랑 잘 되었으면 좋겠다.”

전 남자친구와 헤어진 이후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연애를 안 해봤다며 투덜거리던 희수를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윽고 가까이 다가온 직원이 수프가 담겼던 접시를 치우고 코스의 정점인 메인디쉬를 서빙했다.

그릴에 가볍게 구운 채끝 스테이크가 식탁에 오르자마자 시후는 겨울의 작은 입 크기에 맞춰 알맞게 자른 뒤 겨울의 접시와 바꾸어주었다.

한결같은 배려에 기분이 좋아진 겨울이 웃으며 와인잔을 들었다.

시후가 건배에 응하자 가볍게 유리가 부딪치는 소리가 감미로운 클래식이 흐르는 레스토랑을 잔잔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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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 궁금한 게 하나 있어.”

잔을 입에서 떼어낸 시후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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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어쩌다가 지금 직업을 선택하게 된 거야? 어렸을 때부터 네 꿈은 계속 의사였잖아.”

그 말에 겨울이 쓴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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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무슨…… 그 당시 입에 풀칠할 돈도 없었는데 언감생심 어떻게 의대를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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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공부 잘했잖아. 장학금 받고 충분히 갈 수 있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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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다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됐고, 정서적으로도 안정되었으니까 잘했던 거지.”

시선을 들어 올리며 과거를 회상하는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아픔뿐이었던 옛날이야기를 이렇게 입 밖으로 꺼내는 것도 들어주는 이가 강시후니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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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렇게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간 후로…… 난 잠 시간까지 줄여가며 아르바이트해야 했어. 동생은 아직 너무 어렸고, 엄마는 몸이 많이 안 좋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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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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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까지 일하느라 학교에서는 매일 엎드려 잠만 잤고……. 당연히 고등학교 성적은 처참했지, 뭐. 학교도 자주 결석해서 졸업장만 겨우 딴 정도였어.”

하루하루 생존이 우선이었던 겨울에게 꿈이란 더 이상 가슴을 뛰게 하는 단어가 아니었다.

그저 아이들에게나 재미있을 동화나 허무맹랑한 망상 따위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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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에 대학 가는 건 불가능했고, 바로 취직할 생각으로 고3 때 피부미용 자격증을 취득해서 스파에 취업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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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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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안 힘들었다면 거짓말이겠지.”

겨울이 픽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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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직업을 선택한 것도 별로 대단한 이유는 없었어. 아무것도 없는 사회초년생이 이만큼 돈을 벌 수 있는 직무는 많지 않았거든.”

일반회사에 사무직으로 들어가서 받는 월급보다 스파에서 오버타임으로 일하는 게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럴 뿐만 아니라, VIP 고객에게 지명을 받으면 인센티브 또한 꼬박 지급되었으니, 겨울의 상황에 이만한 직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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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엄마도 옛날부터 꿈이었던 카페 하고 있고, 이경이도 마지막 학기라 이제 졸업하고…….”

겨울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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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잘됐지, 뭐.”

재벌가의 하나뿐인 공주님으로 태어나 하루아침에 바닥으로 처박히기까지, 실질적인 가장이자 대한민국의 장녀로 세상 온갖 상처를 떠안고 살아왔던 겨울에게도 끝은 있었다.

이제 더는 가족들은 저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겨울의 어깨를 짓누르던 중압감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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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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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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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너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고 있잖아.”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진 것처럼, 겨울의 눈동자가 소리 없이 일렁였다.

엄마도 동생도, 모두가 원하는 바를 이루고 안정을 되찾았지만, 겨울은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방황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끝없는 미로의 한복판에 매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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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 위해주느라 지금까지 희생하며 살아온 거잖아.”

시후의 말에 겨울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지금껏 한 번도 제 행동에 대해 희생이라고 말해준 사람이 없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 대한민국에서 장녀로 태어났으면 당연히 짊어져야 할 무게라고만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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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겨울이 조심스럽게 포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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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말해서, 엄마랑 동생이 원망스럽지 않았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말할 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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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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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서 울고 싶을 때도 많았고, 일하기 싫은 날도 많았고……. 나도 다른 대학생 애들처럼 유럽으로 배낭여행 같은 것도 가보고 싶었고, 시험공부 하기 싫다고 투정도 부려보고 싶었어. 미팅 같은 것도 나가보고 싶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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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미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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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야, 농담.”

겨울이 빠르게 수습하며 머쓱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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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나도 그렇게 남들처럼 놀면서 즐기면서 살고 싶었어.”

아픔뿐이었던 과거를 더듬자 또다시 눈가가 욱신거렸다.

쓰게 웃음을 터뜨린 겨울이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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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라도 재밌게 즐기면서 살면 되지.”

그 위로 쏟아진 따뜻한 음성에 떨리는 시선이 느슨하게 위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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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해외여행도 가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여기저기 많이 놀러 다니자.”

다정한 속삭임에 겨울은 조금 젖은 눈동자로 시후를 가만히 보았다.

부드럽게 올라가는 입꼬리와 함께 시후가 길쭉한 팔을 벌려 겨울의 머리 위를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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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미팅은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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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참, 뒤끝은.”

살풋 웃음을 터뜨린 겨울이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시후는 진중하게 눈을 맞춰오며 입술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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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가족을 위해 살아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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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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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의 삶은 오로지 함겨울 널 위해 살았으면 해.”

겨울의 가슴이 조금씩 빠르게 뛰었다.

어린 시절, 지울 수 없는 상처이자 하나뿐인 구원이었던 남자가…….

이렇게 다시금 돌아와 새롭게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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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항상 네 곁에 있을 테니까.”

이제는 지난날의 악몽이 아닌 달콤한 꿈으로.

오로지 겨울에게만 고정된 눈동자가 그녀의 심장에 파동을 일으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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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한편 퇴근 후 소개팅 약속 장소로 향하던 희수가 문자를 확인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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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소개팅 상대가 바뀌었다고? 이름이…… 신재환?”

묘한 불길함이 스멀스멀 엄습하기 시작했다. 오래전에 서로 볼꼴 못 볼꼴 다 보고 지저분하게 헤어졌던 전 남자친구의 이름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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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설마……. 흔한 이름이잖아.”

대한민국에 재환이란 이름을 가진 남자가 아마 시장터에 널린 오징어보다도 많을 터였다.

같은 사람일 리 없다고 확신한 희수가 고개를 좌우로 내젓고 시간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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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러다 늦겠다!”

시간이 빠듯했기에 서두르지 않으면 지각 확정이었다.

첫 만남부터 약속에 늦어 첫인상을 망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던 희수가 바쁘게 걸음을 재촉했다.

육상선수에 빙의해 달리자 약속 장소인 카페의 간판이 보이고 희수가 가빠진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돌연 뒤에서 불쑥 나타난 자전거 때문에 휘청 몸이 왼쪽으로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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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그 탓에 바로 앞에 가만히 서 있던 남자의 등에 부딪혀 비틀거렸다.

일순 넘어질 뻔했으나 두 다리에 힘을 줘 가까스로 지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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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괜찮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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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괜……악!!!”

그러나 뒤돌아보며 묻는 남자의 팔꿈치에 코를 퍽 얻어맞아 결국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바닥에 쿵 소리 나게 엉덩방아를 찧은 희수가 부서질 듯 얼얼한 코를 쥐며 육두문자를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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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씨, 지금 뭐 하는……!”

열 뻗친 희수가 확 내지르려다가 멈칫했다. 일순 질겁한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부딪친 남자의 정체에 너무 놀라 가쁜 숨을 삼키고 두 눈을 정신없이 깜빡거렸다.

희수의 얼굴을 알아본 재환도 화들짝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녀에게 손을 뻗은 채 그대로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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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신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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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

두 사람의 눈동자에는 미리 짜기라도 한 듯이 동시에 거센 지진이 일어났다.

길 한복판에서 오래전 헤어진 전 애인을 만난 것처럼 당혹스러운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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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녕. 오랜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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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래…… 반갑네.”

재환의 말에 어리숙하게 대답한 희수가 그의 손을 잡지 않고 홀로 벌떡 일어났다.

당황한 희수가 서둘러 뒤를 돌며 빠르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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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약속이 있어서 가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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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희수야!”

황급히 떠나려는 희수의 손을 붙잡은 재환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 손길에 우뚝 멈춘 희수가 그에게 붙잡힌 왼손을 당혹스러운 눈으로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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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왜?”

설마…… 아직 나한테 미련이 남았나?

그래서 붙잡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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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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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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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코피…….”

그 말과 동시에 희수의 콧구멍 두 개에서 무언가 뜨끈한 액체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코를 문지른 희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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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씨…….”

졸지에 전남친에게 쌍코피를 발사하는 장면을 보인 것보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이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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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내, 내 실리콘……!”

의느님의 손에서 새로 태어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신선한 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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