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제 아내입니다
(64/112)
64. 제 아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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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제 아내입니다
2022.05.11.
결국 전날 밤의 열기가 미처 가시기도 전에 욕실에서 또 한 번 사랑을 나눈 뒤, 진이 다 빠진 겨울은 한껏 늘어진 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그런 겨울을 안아서 차에 태운 시후는 늦지 않게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전날 내렸던 폭설로 인해 아직 얼어 있는 도로에서도 시후의 차는 흔들림 없이 매끄럽게 나아갔다.
덕분에 한껏 늘어진 채로 조수석에 앉아 안온하게 이동하는 겨울의 입가에는 슬며시 미소가 감돌았다.
후끈한 밤을 보내고 나니 남편을 향한 하트가 더욱 커진 겨울은 이른 아침에도 조금의 굴욕도 없이 완벽한 시후의 옆모습을 흘끗흘끗 훔쳐보았다.
“왜 그렇게 흘끔거려?”
도둑고양이 같은 시선을 느낀 시후가 살포시 웃었다.
“사고 나겠어.”
그 나지막한 미소가 겨울의 심장을 바싹 조였다.
쏟아지는 까만 눈빛에서는 추운 겨울과 어울리지 않는 온기가 느껴졌다.
잠기운이 달아나지 않은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을 붙잡으며 겨울이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뒷통수 뒤로 집요하게 느껴지는 시후의 눈빛은 겨울의 가슴을 계속해서 건드렸다.
때마침 바뀐 붉은 신호 앞에서 부드럽게 멈춰선 시후가 은근슬쩍 손을 뻗어 겨울의 손을 움켜쥐었다.
입가로 번지는 미소를 삼키지 못한 겨울이 배시시 웃어버렸다.
“사고 난다며?”
“신호 바뀔 때까지만.”
장난스럽게 대답한 시후가 겨울의 하얗고 자그마한 손을 쪼물딱거리며 만졌다.
“어떻게 사람 손이 이렇게 작지.”
보들보들한 손등을 문지르던 커다란 손이 손가락 틈새를 가볍게 건드렸다.
“이왕이면 좀 더 작아져 봐. 함겨울 통째로 주머니에 넣고 다니게.”
“치, 오빠나 작아져. 오빤 너무 과하게 크다고.”
“뭐가?”
“……키가.”
그리고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복합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지만 입에 담는 대신 전날 밤의 잔상을 떠올리며 양 볼을 붉혔다.
“우리 여보, 왜 얼굴이 새빨개졌을까.”
“몰라, 바보야! 운전에 집중이나 해.”
“아침부터 너무 밝힌다.”
짓궂은 장난에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겨울의 얼굴을 즐겁게 보며 시후가 겨울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신호가 바뀌고 인디고블루 컬러의 스포츠카는 시원스럽게 고속도로 위를 주행했다.
서울 톨게이트를 막 지나고 클레르로 향하는데, 일순 시후의 휴대전화로 전화가 걸려왔다.
겨울에게 양해를 구하고 차량의 블루투스로 기능으로 전화를 연결한 시후가 심드렁한 음성을 내었다.
“어, 홍 비서.”
-네, 대표님…….
“지금 서울 들어왔으니 10시 이전에 도착할 거야. 회의 준비하라고 전달하고.”
-……아니요. 그게 아니라…….”
수화기 건너편으로 당황이 읽히자 시후의 한쪽 눈썹이 올라섰다.
-지금 인터넷에 기사가 떴는데요……. 한번 확인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기사?”
-포털 사이트 한번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예나의 말에 운전을 하고 있는 시후 대신 겨울이 서둘러 휴대전화를 주워들었다.
빠르게 포털사이트 앱을 누르자마자 겨울의 동공이 커다랗게 뜨여졌다.
메인 페이지에 1면에 큼지막하게 잡힌 기사의 헤드라인은 경악 그 자체였다.
[강성호 KU그룹 회장의 장남 강시후. 결혼 9개월 만에 파경, KU그룹 경영 본격 참여]
놀란 겨울이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기사를 클릭하자 내용은 더욱더 가관이었다.
[KU그룹 강성호 회장의 장남이자 현재 넥스트 게임즈의 CEO인 강시후 대표는 이달 초, 넥스트 게임즈의 대표이사직을 사임하고 KU전자의 해외사업본부 소속 팀장으로 입사하여 그룹 경영에 참여할 것을 알렸다. 그와 함께 지난 3월 결혼한 일반인 아내 함모 씨와 이혼 조정신청서를 접수한 사실이 확인됐다.]
……이혼?
KU 전자 입사?
상상도 못 한 기사가 동시다발적으로 보도되자 놀란 겨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오빠, 우리가 이혼한다는데?”
“뭐?”
그 말에 곧바로 핸들을 돌린 시후가 갓길에 차를 멈춰 세웠다. 비상등을 켠 시후가 다급하게 겨울의 휴대전화를 넘겨받아 기사를 확인했다.
빠르게 상황 파악을 마친 눈동자에 날카로운 균열이 일었다.
“이게 무슨…….”
단정하던 입매가 험악하게 구겨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미간을 좁힌 시후가 겨울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두통이 시작된 머리를 짚었다.
“홍 비서, 이 기사 처음 올라온 출처가 어디야.”
-그게…… 제가 알아봤는데…….
머뭇거리던 예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KU그룹 홍보팀에서 의도적으로 유포한 기사 같습니다.
……하.
한동안 조용하다 싶더니.
역시 뒤에서 이따위 추잡한 짓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건가.
순간 뇌관을 휩쓰는 서늘한 한기와 함께 입술 틈으로 헛숨이 터져 흘렀다.
으득 입안을 씹은 시후가 증발하려는 이성을 가까스로 붙잡고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강성호 회장님 비서실로부터 연락받았는데, 기사를 내리고 싶으면 오전 안으로 회장실로 오시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 미친 노인네…….
시후의 손등 위로 억센 힘줄이 곤두섰다. 겨울의 옆이라는 것도 잊고 욕지거리가 새어 나오려는 걸 간신히 막았다.
“일단 전 직원들에게 대표이사직 사임은 사실무근이라고 전달해. 나머진 내가 해결할 테니.”
-네, 알겠습니다.
시후가 전화를 끊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하기만 했던 차 내부의 공기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침묵이 흐르는 공간 안에서 겨울은 애꿎은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렸다.
잠시 입술을 말아 삼킨 겨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혼 신청한 건 사실이잖아. 아직 취하서도 제출하지 않았고.”
“아니. 전부 오보라고 정정 보도 낼 거야.”
“…….”
“어차피 우린 이제 헤어질 일이 없잖아.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사에 일일이 이혼 신청 취소니, 뭐니 할 것 없어.”
단호한 음성이었으나 겨울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혼 관련 기사를 유포한 사람이 시후의 아버지라는 사실에 경련하는 손발이 진정되지 않았다.
말로 채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몰아치고 머리가 새하얗게 백지처럼 물들었다.
“…….”
강성호, 그 인간은 무고한 아버지에게 횡령의 누명을 씌워 교도소에서 생을 마감하게 했다.
그와 더불어 뻔뻔하게 아버지의 장례식에 근조화환을 보내 농락까지 했던 악마 중의 악마였다.
……그뿐인가.
심지어는 시후에게 겨울과 어울리면 어떻게서든 구실을 만들어 퇴학시키고 겨울의 인생을 망쳐놓겠다고 협박까지 했었다.
‘그런 내가 아예 집안에 며느리로 들어왔으니…….’
소리소문없이 겨울을 죽여 사별로 꾸미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인간이었다.
아마 지금 당장이라도 겨울과 그녀의 가족들을 이 세상에서 영영 치워버릴 정도의 힘을 갖추고 있을 터였다.
“내가 말했지, 넌 생각이 너무 많다고.”
나직한 목소리에 바닥없는 상념에 빠져 있던 겨울의 눈이 커졌다.
“걱정하지 마.”
커다란 손이 뺨으로 다가와 감기며 날렵한 턱선이 사선을 그리며 내려왔다.
“넌 내가 지켜.”
입술 바로 앞에서 속삭이자 겨울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어디에선가 갑자기 서늘한 미풍이 심장 속으로 불어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두 손을 작게 오므린 겨울이 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은 하루 휴가를 내고 쉬라는 시후의 제안을 완곡히 거절했다.
집에서 휴식을 취하면 오히려 상념이 짙어질 것 같아, 일에 몰두하기로 하고 클레르로 데려다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시후의 예상대로 클레르의 입구에는 냄새를 맡고 찾아온 기자로 추정되는 무리가 진을 치고 있었다.
겨울도 이상한 기류를 눈치챘으나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차 문을 열고 나간 후였다.
상황 파악을 마치고 곧바로 다시 차에 올라타려 했지만, 우르르 몰려온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것은 순식간이었다.
“강시후 대표님 아내분 맞으십니까?”
돌연 산탄총처럼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플래시 소리에 당황한 겨울이 하얗게 질렸다.
특종의 냄새를 맡은 수많은 기자는 시후의 스포츠카 주위로 득달같이 모여 있는 대로 셔터를 눌러댔다.
“강 대표님과 이혼하신다는 게 사실이십니까?”
플래시 소리와 함께 정신없이 뒤엉켜 여린 고막을 찔러대는 것은 기자들의 무례한 질문들이었다.
“예전부터 이혼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일을 그만두지 않으셨던 게 맞나요? 왜 KU그룹의 맏며느리가 되신 후로도 계속 스파에서 일하셨던 겁니까?”
“이전에도 부부 사이에 불화가 있으셨습니까? 현재 50억대 위자료 청구 소송 중이라는 것이 사실인가요?”
“쇼윈도 부부였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는데, 한 말씀 해주시죠!”
숨이 턱 막힌 겨울이 주춤 뒷걸음질 쳤다. 손발이 서늘하게 식고 눈앞이 팽글팽글 돌았다.
뭐라 말을 해야 하는데 바보처럼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심장이 엄청난 속도로 뛰고 공황증세가 몰려오자 겨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쩔 줄 모르고 두 눈을 확 감아버린 순간, 돌연 머리 위로 무언가가 따스하게 내려앉았다.
시후의 재킷이란 것을 눈치챈 겨울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동시에 여린 어깨를 확 끌어당긴 시후가 겨울의 얼굴을 재킷으로 가리며 떨리는 입술을 단번에 감쳐 물었다.
파드득 놀란 겨울이 반사적으로 떨리는 눈꺼풀을 닫고 시후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겨울의 아랫입술을 빨아들이던 시후가 살짝 끝을 깨물자 놀란 입술이 반사적으로 벌어졌다.
그 여린 점막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헤집는 감촉에 겨울의 가슴에 거센 해일이 일었다.
넋 놓고 멍하니 바라보던 기자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현장을 사진에 담기 위해 황급히 셔터를 눌렀다.
짧지만 강렬했던 키스 끝에 입술을 떼어낸 시후가 재킷으로 겨울의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여린 어깨를 품에 당겨 안았다.
“답이 되었습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 여자에게 목매며 비틀리던 턱선이 기자들을 향해 돌아갔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플래시가 터지는 카메라 렌즈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시후가 낮게 읊조렸다.
“제 아내입니다.”
더는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