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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거짓보다 잔인한 진실 (65/112)


65. 거짓보다 잔인한 진실
2022.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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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이 되었습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 여자에게 목매며 비틀리던 턱선이 기자들을 향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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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플래시가 터지는 카메라 렌즈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시후가 낮게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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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내입니다.”

모조리 씹어먹을 듯한 매서운 눈매를 마주한 기자들은 위세에 눌려 하나둘 들고 있던 카메라를 내리며 주춤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모든 카메라의 플래시 소리가 멎고 일대에 소름 끼치도록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순식간에 혼란한 상황을 정리한 시후는 곧장 겨울을 도로 조수석에 태우고 클레르 앞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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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놀랐지?”

겨울은 아직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경련하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미세하게 벌어진 입술 틈으로는 연약한 바람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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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하기 힘들 것 같으니까…….”

작게 한숨 쉰 시후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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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서 쉬고 있어.”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겨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 출근을 고집했다가는 되려 클레르와 고객들에게 폐만 끼칠 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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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주변에도 기자들이 수없이 깔려 있었지만, 한국에서 가장 삼엄한 경비를 자랑하는 아파트였기 때문에 아무도 내부까지 침입하지는 못했다.

완전히 녹초가 되어 채로 집에 들어온 겨울은 불이 난 듯 계속해서 울려대는 통에 꺼두었던 휴대전화의 전원을 도로 켰다.

가장 먼저 실장에게 연락을 취하려고 했는데, 이미 모든 상황을 파악했는지 당일 예약 손님은 전부 취소할 테니 출근하지 말고 푹 쉬라는 내용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20통이 넘는 부재중 전화의 기록의 대부분은 어머니 혜숙으로부터 걸려온 것이었고, 나머지는 희수와 클레르의 동료들, 주형 그리고 남동생 이경으로부터 걸려온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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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 기사에 나오는 함모 씨 정말 언니예요? 지금 클레르 안까지 기자들 들어와서 완전 쑥대밭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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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기사 대체 뭐야? 전화는 왜 안 받고. 엄마 충격으로 쓰러져서 몸져누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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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야, 너 괜찮아? 요즘 남편이랑 잘 지냈잖아……. 무슨 일이야,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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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아. 기사 봤는데……. 남편하고 이혼 취소한 거 아니었어?]

동료들도 가족도 친구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두 심란한 겨울의 마음을 난도질하듯 들쑤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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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말도 안 되는 루머야. 나 절대 남편하고 이혼 안 해.]

심지어는 몇 년을 넘게 연락 안 하고 지내던 옛 지인들로부터도 문자가 수북이 와 있었고, 차례를 지켜 일일이 답장하던 겨울은 결국 참지 못하고 폭발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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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해. 안 해. 이혼 안 한다고!”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 겨울이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구름 위를 나는 것처럼 행복했는데 이제는 그저 깜깜한 터널 속에 홀로 갇힌 기분이었다.

저와 법적으로 얽힌 남자가 얼마나 세간의 주목을 받는 남자였는지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여러 가지 상념에 빠진 채 약 한 시간 동안 송장처럼 누워 가만히 천장만 바라보고 있던 겨울은 끝도 없이 침몰하는 기분에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시후와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그에게 연락을 취하려고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바로 그 순간, 하도 울려대는 바람에 무음으로 설정해두었던 겨울의 휴대전화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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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시후?”

미래에서 온 서른아홉 살의 강시후로부터 온 전화였다.

그에게 8년 뒤 이혼하게 되더라도 지금 스스로의 감정에 충실하기로 했다며, 이혼을 종용하지 말라고 문자를 보낸 뒤 오랜만에 온 연락이었다.

잠시 받을지 말지 고민하던 겨울이 이내 표정을 굳히고 통화 수락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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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겨울이 작게 중얼거렸으나 수화기 건너편으로는 한참 동안 정적만이 흘렀다.

결국 끝없는 고요를 참다못한 겨울이 먼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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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얘기는 다 끝난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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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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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강시후와 이혼할 생각 없어요. 어차피 또 그 말 하려고 연락한 거죠?”

오늘 있었던 스캔들은 잠시간 불다가 사라질 바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한 8년 뒤 서로 오만 정이 다 떨어져 이혼하게 된다는 미래도 틀림없이 바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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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 할 말이 있어.

오랜 침묵을 뚫고 들려온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한껏 상한 음성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였다.

무엇보다도 서른아홉의 강시후는 항상 위압적이고 단호한 명령조로 말해 겨울의 가슴에 시린 바람이 불곤 했는데, 지금의 그는 어느 때보다도 약해진 듯 보였다.

묘하게 느껴지는 이상한 기류에 겨울이 소리 없이 미간을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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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할 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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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묵고 있는 호텔로 와. 일단 만나서 얘기해.

겨울이 작게 숨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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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제 더는 거기 안 갈 거예요. 그리고 지금 무슨 루머가 나도는지 다 알잖아요? 괜히 호텔 같은 데 갔다가 사람들 눈에 띄여서 사진이라도 찍히면 어쩌라고…….”

사서 일을 만들지 않아도 인터넷에서는 이미 괴상망측한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누가 불륜을 저질렀느니, 숨겨진 사생아가 있다느니, 쇼윈도 부부라느니, 50억대 이혼 소송이 중이라느니…….

막장 드라마 한 편을 찍고도 남을 만큼 황당한 이야기들이 온갖 커뮤니티의 댓글 창에 주렁주렁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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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호텔 말고, 처음으로 네게 내 정체를 말했었던 한강 다리 밑으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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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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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일방적으로 선전포고한 그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자신의 할 말만 하고 끊어진 휴대전화를 황당하게 바라보며 겨울이 헛숨을 터뜨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 어떤 말로 훼방을 놓아도 제 굳건한 결정은 절대 바뀔 리 없다고 확신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저녁이 되었으나, 아버지에게 호출당했다던 시후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전화를 계속 걸어도 받지 않았고, 문자를 보내놓아도 확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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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왠지 모를 불안감이 샘솟았지만, 그저 기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심란한 마음을 안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겨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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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비가 계속 내리네.”

전날 내렸던 폭설에 이어 이제는 폭우가 한창이었다.

순간 자신이 올 때까지 다리 밑에서 기다리겠다던 서른아홉의 강시후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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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아직도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다리 밑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심한 폭우 아래에서는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전부 젖을 터였다.

한참 동안 창밖을 보며 전전긍긍하던 겨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 밖을 나섰다.

아직도 입구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의 눈을 피해 밖으로 빠져나온 겨울은 곧바로 택시를 탔다.

다리 근처에서 내린 겨울은 우산을 꼭 움켜쥐고 종종걸음으로 빗속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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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겠지……. 없을 거야.”

그렇게 되뇌며 다리 밑으로 다가간 순간, 겨울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서른아홉의 강시후는 얼굴을 가리지 않은 모습으로 다리 밑에서 모든 비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자 겨울의 가슴 한쪽에서 우지끈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찌 됐든 이 남자도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미래인데, 이런 엉망이 된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선 겨울이 말없이 그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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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으로 기다리는 게 어디 있어요.”

날이 선 목소리에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그의 고개가 느슨하게 올라섰다.

빗물로 한가득 젖은 얼굴이 평소보다 배는 까칠해 보였다.

대체 그동안 어떻게 지낸 건지 눈 밑은 짙은 응달로 꺼져 있었고 안색도 나빴다.

한참 동안 겨울을 내려다보던 시후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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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아.”

내리는 비만큼이나 물기 어린 음성이었다. 그의 눈가는 미미하게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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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의 가슴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이 8년 뒤의 강시후가 자신을 이름으로만 다정하게 불러준 것은 처음이었다.

무엇보다도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에서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애절한 감정이 읽혔다.

항상 모든 정이 다 떨어진 것처럼 차갑게 쏘아붙이던 말투와 매정한 눈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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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부탁할게…….”

고단한 숨이 흘러나온 입술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겨울의 뺨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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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를…….”

흠칫 놀란 겨울이 뒷말을 흐렸다.

단단한 팔을 뻗은 그가 제 어깨를 강하게 감싸 꽉 끌어안은 탓이었다.

일순 커다란 품에 안긴 겨울이 가시에 찔린 것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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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버려.”

목울대를 긁으며 올라온 낮은 음성이 겨울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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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지 마.”

그 말에 겨울의 가슴은 또다시 아프게 찢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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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왜 어떻게 해서든 우리가 함께하는 미래를 없애려고 온갖 수를 다 쓰는 걸까.

그러고 보면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했다.

날 바라보는 그의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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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래요?”

종종 그가 내게 보내는 알 수 없는 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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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가 당신을 사랑하면 안 되는데요?”

어두운 눈동자를 똑바로 올려다보는 겨울이 제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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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당신이 숨기는 게 뭐예요.”

떨리는 음성은 갈라지듯 형편없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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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우리는 왜 헤어진 거예요?”

겨울은 벅차 오는 숨을 몰아쉬며 흔적만이 보이던 진실의 꼬리를 붙잡았다.

시후과 겨울의 시선이 치열하게 뒤엉키고, 두 눈동자 사이로 거센 해일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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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실…….”

굳게 닫힌 입술이 느릿하게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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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없는 미래에서 왔어.”

……내가 없는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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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대체 무슨…….”

말끝을 흐린 겨울은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처럼 눈가가 욱신거렸다.

그의 표정이 너무도 아파 보였던 탓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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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3개월 뒤…….”

낮게 숨을 몰아쉰 시후가 숨겨왔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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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살리려다가 죽어.”

……이 말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서든 네가 두려워하지 않도록 너를 지켜주려 했는데.

억지로 발음하는 목울대가 찢어질 듯 아파와 숨을 쉴 수 없었다.

시후는 제 가슴에 칼이 날아와 꽂히는 고통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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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널 살리기 위해 내가 미래에서 찾아온 거야.”

총알처럼 내리쬐는 빗방울이 겨울의 머리를 관통했다.

거센 바람과 함께 퍼부어 내리는 폭우의 소리가 잦아들며 주위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흔들리는 겨울의 동공이 휑하니 울렸다.

가쁜 숨을 토해내자 우산을 들고 있던 손이 아래로 힘없이 추락했다.

……때로는 거짓보다 잔인한 진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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