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 그림자 (66/112)


66. 그림자
2022.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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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3개월 뒤…… 날 살리려다가 죽어.”

총알처럼 내리쬐는 빗방울이 겨울의 머리를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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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널 살리기 위해 내가 미래에서 찾아온 거야.”

거센 바람과 함께 퍼부어 내리는 폭우의 소리가 잦아들며 주위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흔들리는 겨울의 동공이 휑하니 울렸다.

가쁜 숨을 토해내자 우산을 들고 있던 손이 아래로 힘없이 추락했다.

겨울의 입술이 파르르 경련했다.

……3개월 후에,

내가 죽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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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린 바람이 불어온 듯 가슴이 서늘해졌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애꿎은 입술을 달싹이자 시후가 그런 겨울의 어깨를 양손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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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떠나지 않으면, 결국 똑같은 미래가 반복될 거야.”

가녀리게 떨리던 겨울의 숨이 시후의 말에 우뚝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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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날 사랑할 수 있어?”

파르르 경련하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시후는 하염없이 흔들리는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억눌린 음성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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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시후가 낮게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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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못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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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겨울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녀가 죽고 8년이란 세월을 지독한 고통 속에 빠져 살았다.

만약 그녀를 살리지 못하고 미래로 돌아가게 된다면, 시후도 함께 겨울을 따라 생을 마감할 생각이었다.

그녀가 없는 세상에 1분 1초도 숨 쉬고 살아가고 싶지 않았으니까.

오로지 함겨울이란 여자가…….

이 생에 유일한 미련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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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 때문에 세상을 떠나는데…… 날 구하려다가 목숨을 잃었는데.”

낮은 음성이 목울대를 긁으며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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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널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어.”

떨어지는 빗물과 함께 겨울은 저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마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바다 위를 표류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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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버리고 떠나.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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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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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 누구의 손도 닿지 않는, 아주 먼 곳으로 떠나.”

내리는 빗물이 겨울의 머리를 차갑게 때렸다. 온몸이 얼어붙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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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유일한 방법이야.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던 겨울은 끝없는 심해로 끌어내려져 서서히 잠기고 있었다.

그 어떤 몸부림도 잊은 채, 영혼이 전부 증발한 것처럼 어둠에 잠식되어가고 있었다.

세상 모든 괴로움과 슬픔이 뒤엉킨 얼굴을 한 시후를 멍하니 바라보던 겨울은 마른 숨을 뱉어냈다.

더는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없어 망연하게 뒤를 돌았다.

바닥에 떨어뜨린 우산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쏟아지는 빗속을 향해 도망치듯 걸었다.

멀어지는 겨울의 뒷모습을 황망하게 바라보던 시후가 힘없이 다리 기둥에 등을 기댔다.

비에 젖은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올리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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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끝까지 밝히고 싶지 않았는데.

어쭙잖은 거짓말을 해서라도 그녀의 마음을 지켜주고 싶었는데…….

진실을 숨기고 미래를 바꾸는 것은,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릴없이 고개를 아래로 떨군 시후는 떨리는 눈을 감았다.

몸속을 파고드는 빗물의 찬기로부터 떠오르는 것은 악몽 같았던 지난 세월의 잔상이었다.

***

시후는 겨울이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었을 때,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고 부단히도 애를 썼다.

조금 비겁하긴 해도, 그녀의 사라진 기억에 힘입어 숨겨왔던 제 감정을 가감 없이 표현했다.

그 노력의 산물로 겨울은 굳게 닫혔던 마음을 열었고, 서로 오해를 풀고 화해로 향하자 온전한 부부로 다시 출발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없이 사랑하고 또 사랑받기에 하루하루 행복한 날들 뿐이었다.

겨울과 함께라면 앞으로도 그런 나날들이 계속될 거라 굳게 믿었다.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봄이 찾아오기 직전의 늦겨울이었다.

시후는 넥스트 게임즈의 상장을 앞두고 사업 확장을 위해 밤낮으로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해외에서 1,000억 원 규모의 프리IPO 투자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고, 투자사의 대표와의 성공적인 미팅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당시 홍콩 투자사 대표는 시후에게 한국 법인의 직원을 시켜 인천공항에서 시후를 픽업해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호의를 보였고, 원만한 관계 유지를 위해 시후는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렇게 공항에 도착해 홍 비서와 함께 저를 마중 나온 남자 직원의 안내를 받아 차에 올라탔었다.

얼마 가지 않아 무언가 독한 냄새가 코를 찌른 순간, 이상함을 감지했으나 의식이 끊어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처음 보는 차 안이었다.

절벽 끝에 위태롭게 서 있는 차의 뒷좌석에 갇혀있는 시후는 양손과 양발이 모두 밧줄로 묶인 상태였다.

몸을 속박한 채로 시후의 손목과 차 뒷좌석 손잡이를 수갑으로 연결해놓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빠르게 상황 파악을 마친 시후는 잇새를 거세게 악물었다.

투자사에서 시후를 납치해 감금할 이유는 없을 터이니, 다른 누군가가 악의를 갖고 중간에 빼돌린 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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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아직 마취가 제대로 풀리지 않아 머리가 깨질 것처럼 욱신거리고 정신이 몽롱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데, 일순 차 밖에서 누군가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후는 청각이 온전치 않은 상황에서도 그 목소리가 겨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격양된 채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듯했는데 무어라고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지끈거리는 두통에 시후가 두 눈을 감았다가 뜬 순간, 돌연 차 뒷문이 벌컥 열리며 겨울이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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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마취가 덜 풀린 혀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급해 보이는 겨울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들고 있던 열쇠를 무작정 시후의 손목 수갑의 구멍에 끼워 넣었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이내 잘그락 소리와 함께 수갑이 풀렸다.

그리고 그 순간, 차의 운전석에서 무언가 스위치가 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삐, 삐, 삐, 뇌관을 뒤흔드는 듯한 경고음이 세차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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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고막을 찌르는 듯한 소음에 운전석 쪽을 건너다본 겨울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시후가 상황 파악을 채 하기도 전에 그의 몸이 차 문밖으로 거세게 밀쳐졌다.

흙바닥을 나뒹군 시후가 놀라 고개를 들어올린 찰나였다.

쾅!!!

하늘을 쪼개는 듯한 굉음이 청각을 마비시키고 시후가 타고 있던 자동차가 눈앞에서 폭발했다. 산산이 조각난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고 순식간에 불길이 치솟았다.

동시에 오른쪽 어깨와 팔에서 타들어 갈 듯한 통증이 느껴지자 시후가 이를 악물었다. 내려다보니 폭발의 파편이 온몸에 박혀있었고 오른팔은 살갗이 전부 녹아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시후의 심장은 곤두박질쳤다. 몸에 불이 붙은 겨울이 폭발한 차와 함께 절벽 아래로 떨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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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아.”

탁 풀린 검은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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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창백하게 질린 시후가 성대가 찢어지도록 소리쳤다.

이성을 잃은 그가 그녀를 따라 뛰어내리려고 했으나 여전히 묶여 있는 손발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패닉이 온 시후는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밧줄에 묶인 팔과 다리를 풀기 위해 몸부림쳤다.

몸에 느껴지는 화상의 통증보다 심장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에 발악했다.

피와 수분이 전부 증발한 사람처럼 창백해진 시후가 부서진 절벽 끝을 바라보며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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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겨울!!!”

일순 하늘이 오열을 터뜨리는 것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쏟아지는 폭우 속 시후의 처절한 외침이 일대를 울렸다.

감당할 수 없는 비극에 시후는 목이 시퍼렇게 변할 때까지 절규하고 또 절규했다.

온몸을 휩쓰는 절망감에 숨을 쉴 수 없었다.

세상이 무너져내린다고 해도 이보다 아플 수는 없었다.

악을 쓰며 겨울의 이름을 부르짖는데, 얼마 가지 않아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귓전을 거세게 울렸다.

앰뷸런스와 경찰차가 몰려오고 시후는 그들에게 겨울을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후는 겨울이 살아 있을 거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다시 마주한 겨울은 온기 하나 없이 싸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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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후는 얼굴을 알아보기도 어려울 만큼 망가진 겨울의 시신을 한참 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직접적인 사인은 익사였다.

절벽 아래 강으로 떨어진 직후에는 살아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되었다.

폭발 때문에 온전한 모습을 갖추지도 못한 시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내내, 시후는 도저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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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아.”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며 겨울의 훼손된 얼굴을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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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거친 호흡을 내쉬던 시후가 잇새를 악물었다.

온몸을 내리누르는 절망감에 잠시도 숨을 쉴 수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박동하며 과호흡이 일어났다.

며칠 전 현관에서 환하게 웃으며 출장 잘 다녀오라고 말했던 겨울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런데…….

밝고 사랑스러운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차갑게 식은 겨울의 시체만이 제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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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전신을 옥죄어오는 고통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이성을 잃은 시후는 한참 동안 울부짖으며 싸늘해진 그녀의 시체 앞에서 오열했다.

시후는 겨울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히기 위해 못할 짓이 없었다.

경찰에게 모든 걸 믿고 맡길 수 없었기에 직접 발벗고 뛰어 비극이 일어난 정황을 파악했다.

먼저 투자사 측에 연락을 취하니, 인천공항으로 마중을 갔던 직원이 괴한에 의해 습격을 당해 공항에 가지 못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즉, 사고가 일어난 당일 시후를 마중 나왔던 남자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람이며, 납치 사건은 자신들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곧바로 그 남자의 몽타주를 기억한 시후가 수배를 내렸고 며칠 지나지 않아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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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을 매어 스스로 숨통을 끊은 모습으로.

시후를 납치했던 범인이 진술을 할 수 없는 주검으로 나타났으니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남자의 신원을 파악했으나 시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으며 집 주소도 불분명한 노숙인으로 추정되었다.

더불어 사고가 일어난 절벽은 CCTV도 없는 시골의 외진 곳이었으며, 폭발한 차의 블랙박스는 발견하지 못하였고 목격자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이후 시후의 휴대전화를 사고 지점 근처에서 발견하여 포렌식한 결과, 겨울은 괴한으로부터 협박을 받아 사고 장소로 온 듯 보였다.

손발이 묶인 채 의식을 잃은 시후의 모습을 찍은 범인은 시후의 휴대전화를 이용해 겨울에게 연락을 취한 것으로 보였다.

이어 ‘네 남편은 오전 1시에 죽는다.’라는 경고 메시지로 시작한 문자는 시후를 살리고 싶으면 경찰이나 주변에 알리지 않고 혼자 오라며 장소를 알려주는 내용이었다.

물론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범인은 죽어버렸고, 이 사건을 계획한 진짜 배후가 누구인지는 결국 밝혀지지 않았다.

시후는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 배후가 밝혀진다고 해도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겨울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견딜 수 없는 괴로움에 며칠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술만 들이켰다.

밥도 먹지 않고, 일도 하지 않고, 집 밖에는 나서지도 않으며…….

평생 손대본 적 없는 담배를 하루에 두세 갑씩 피우며 온종일 겨울을 향한 그리움과 죄책감에 몸부림쳤다.

그렇게 약 한달을 폐인으로 살았다.

도저히 이 끔찍한 악몽 속에서 더는 참고 버틸 수 없었던 시후는 어느 날 홀린 듯 한 가지 생각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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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되돌리면.’

누가 들으면 미쳤다고 할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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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사랑하는 여자를 보고 싶은 간절함이 도를 지나쳐,

비현실적인 생각에라도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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