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애증
(7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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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애증
2022.06.01.
“……가지 마.”
현관으로 향하던 시후의 걸음이 나지막한 목소리에 우뚝 멎었다.
“나 또 버림받는 기분 들게 하지 마…….”
물기에 젖은 속삭임이 시후의 고막을 애처롭게 파고들었다.
보이지 않는 힘에 묶인 듯 가만히 서 있던 시후가 이내 겨울을 향해 성큼 다가갔다.
겨울은 멀어지지 않고 제게 다가온 시후를 올려다보며 눈물샘을 터뜨렸다.
낮게 숨을 뱉은 시후가 두 팔로 여린 몸을 끌어안았다. 느껴지는 온기에 겨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런 말 하지 마…….”
겨울의 귓바퀴를 타고 시후의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내가 널 어떻게 버려.”
시후의 뜨거운 숨이 겨울의 이마를 무덥게 적셨다.
“……네가 내 전부인데.”
제 이마로 문질러지는 다정한 감촉에 겨울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미끄러지듯 흐른 입술이 겨울의 젖은 눈가에 머물렀다.
“버려도 네가 날 버려.”
그 말에 겨울의 심장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조금 전 서른아홉의 강시후의 목소리와 지금 그의 속삭임이 겹쳐 들리는 탓이었다.
‘날 버려.’
모든 미래를 알고 있는 그는 그렇게 속삭였었다.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지 마.’
애원하듯 속삭이던 그 절망적인 목소리를 다시금 떠올리자 또다시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고여 들었다.
사실 제게 사랑하는 사이라고 거짓말을 했던 그에게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아프고 고통스러워도. 아니, 설마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그의 곁에 남아 있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자신에게 가장 많이 화가 났다.
정작 이 남자는 미래에도 지금도, 계속 자신을 버리라는 말만 반복하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자 겨울은 그저 고개를 떨구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후에게 소리치고 악을 썼으나 그래도 제 곁에 있어 줬으면 하는 이기적인 바람이 스스로도 죄악 같았다.
……내 감정은 이토록 서투르고 볼품없어서.
아직도 17살, 버림받았던 그 시절에 머물러 있고…….
“……흐……윽.”
대체 내 사랑은 왜 이렇게 힘든 걸까.
평범한 사람들처럼 쉽게 사랑하고 질리고 잊을 수는 없는 걸까.
겨울은 심연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고개를 파묻었다.
“울지 마.”
시후의 엄지가 겨울의 눈가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하얗게 질린 볼 위로 흐른 손이 겨울의 물기를 전부 거두어갔다.
“네가 울 때마다…….”
먹먹해진 고막으로 애절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심장이 찢겨나가는 것 같아.”
한숨 같은 음성이 겨울의 가슴에 오래도록 잔류했다.
헤집어진 심장처럼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늘어져 있는 흑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올린 시후가 굽혔던 허리를 폈다.
“들어가서 씻고 자. 네 옆에 있을 테니까.”
하얀 얼굴을 보듬는 손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다정했다.
“……재워줄게.”
눈물을 삼킨 겨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운 겨울은 오래도록 잠이 들지 못했다.
그래도 억지로 두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 애쓴 것은 전부 시후 때문이었다.
재워준다는 약속을 지키려는 것처럼 그는 겨울의 옆에 누워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따금 머리를 쓰다듬거나 가슴께를 토닥이는 손길에 울컥 감정이 올라왔으나 가까스로 삭이며 참고 또 참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겨울이 잠이 들었다고 생각한 시후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방 밖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고 어둠이 찾아들자 줄곧 닫혀 있던 겨울의 눈꺼풀이 슬며시 열렸다.
뜨거워진 눈동자로 또다시 투명한 막이 드리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겨울은 제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오빠.’
사실 말이야.
난 지금까지 오빠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심지어는 우리가 계약으로 묶여 허울뿐인 부부생활을 하고 있을 때조차…….
오빠를 사랑해서 하루하루가 지옥이었고 괴로웠어…….
떨리는 눈을 감은 겨울은 그동안 제 머릿속에서 사라졌었던 지난 1년간의 기억을 떠올렸다.
***
“결혼하자고.”
겨울은 시후가 드디어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게 저따위 제안을 할 리 없었으니까.
“네가 나에게 진 모든 빚을 전부 탕감해주는 조건이야. 그리고 너와 네 어머니의 채무까지도 모두 대신 갚아주지.”
그 말을 듣고 눈앞이 노랗게 물들며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치열이 떨렸다.
가까스로 지탱해왔던 자존심이 산산이 박살 나며 두 주먹이 떨려왔다.
정신이 나간 게 아니고서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남자에게 팔려 갈 여자는 없었다.
더욱이 제 아버지에게 횡령죄를 뒤집어씌우고 죽음으로 몬 악마의 집안의 며느리로 들어가라니…….
꼭지가 돌아 있는 대로 폭언과 악담을 퍼부어주었으나 시후의 표정은 균열 하나 가지 않은 채 덤덤했다.
“영리하게 굴어. 무작정 성질대로 들이받지 말고.”
“…….”
“나쁘지 않은 조건인 거 너도 알잖아.”
더는 들어줄 이유가 없는 말이었다. 견딜 수가 없어서 자리를 박차고 떠나려는 찰나였다.
“네 동생 졸업 때까지의 교육비와 생활비를 전부 지원해주지. 집도 너희 가족들이 생활하기 더 좋은 곳으로 이사시켜 줄 거고.”
그 말에 우뚝 멈춰 선 것은, 겨울이 더는 세상 물정 모르는 열여덟 살의 어린 소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10년이란 세월 동안 세상에 때와 오물을 뒤집어쓴 채 닳고 닳은 스물여덟의 어른에게 자존심이란 건 현실의 파도 앞에서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 같은 것이었다.
“……왜 결혼을 하려고 하는 건데?”
“지금 당장 결혼해야만 아버지가 상속 유언장을 써준다고 하셨으니까.”
“그럼 굳이 내가 아니라 다른 여자여도 되잖아.”
강시후는 그 옛날, 겨울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무참히 짓밟았던 남자였다. 그런 그에게 겨울을 고집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날 절대 사랑하지 않을 여자가 필요해. 귀찮아지는 건 딱 질색이니까.”
그러나 곧바로 쏟아진 대답에 납득이 갔다. 가슴에 비수를 꽂고 유년 시절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았던 남자를 사랑할 여자는 없었으니까.
심지어 돈으로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쇼윈도 아내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줄 여자로서는 겨울만 한 적임자가 없었을 터였다.
“그냥 결혼식하고 혼인신고만 하면 돼. 네가 해줄 건 그게 전부야. 방은 각방을 쓸 거고, 네게 어떠한 부부로서의 책임도 의무도 요구할 일 없을 거야. 당연히 결혼 후, 시댁엔 평생 가지 않아도 되고.”
나쁘지 않은 제안이란 걸, 아니 과분할 정도로 실리 있는 제안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최소 1년만 버텨. 1년 후 이혼하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해줄 거고. 대신 조건이 있어.”
“……무슨 조건?”
“나와 이혼하게 되면, 그때는 가족들하고 외국으로 떠나. 너와 네 가족 모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지원해줄 테니까.”
……이미 단물 빠진 구정물과는 섞이고 싶지 않으니 눈앞에서 사라지라는 건가.
그렇다. 결국 이 남자에게 자신은 그런 존재밖에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용 가치가 떨어지면 언제든지 쉽게 버리고 치워버릴 수 있는 소모품.
눈물이 날 것 같았으나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가까스로 울음을 삼켰다.
“그래, 하자. 대신 약속 지켜.”
그렇게 어딘가 뒤틀린, 거짓 결혼생활은 시작되었다.
결혼식을 준비하는 동안 겨울은 시후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몇 번 없었다.
항상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그는 결혼에 대한 모든 결정을 웨딩플래너와 겨울에게 일임했고, 새신부가 된 겨울은 시후가 붙여준 그의 비서와 함께 드레스부터 반지, 식장 등을 보러 다녔다.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하고, 그는 얼굴도 몇 번 비추지 않은 채, 그의 비서와 함께 드레스와 결혼반지를 맞추러 다니는 내내 겨울의 가슴은 조금씩 병들어갔다.
비록 현실의 벽에 부딪혀 팔려 가는 선택을 했다고 하지만, 겨울도 남들처럼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행복한 결혼을 하고 싶은 소망이 있었다.
불쑥 억울함과 서러움에 눈물이 날 것 같을 때, 겨울은 그럴수록 두꺼운 가면을 쓰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새신부를 연기했다.
그 누구도 우리의 사랑을 의심하지 못하게…….
그렇게 결혼 후 정식으로 부부가 되어 한집에 살게 된 후, 겨울과 시후는 서로 유령 취급을 하며 인사도 하지 않는 허울뿐인 부부로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어떠한 감정의 교류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불어오는 강시후의 다정함에 냉랭하게 얼은 가슴이 흔들리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
하루는 밤 중에 물을 마시고 계단을 타고 올라가다가 어둑한 시야 탓에 넘어진 적이 있었다.
“아, 아파…….”
무릎이 멍들고 발목을 삐끗한 것이었다.
아픈 부위를 문지르며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키는 동안, 당연하게도 침실에 있던 시후는 어떠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늘 서로를 유령 취급했으니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2층으로 올라간 뒤,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출근 준비를 마치고 아래로 내려왔다.
“……이게 뭐지?”
항상 밤이면 어두워서 올라가다가 넘어지기 일쑤였던 계단의 전등이 전부 센서 등으로 바뀐 것이었다.
겨울의 움직임에 따라 저절로 켜지고 꺼지는 전등에서는 그녀가 더는 넘어지지 않길 바라는 시후의 마음이 읽혔다.
“…….”
일렁이는 제 가슴을 외면한 겨울은 잇새를 악물었다.
바보처럼 이런 사소한 일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절대 그에게 또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속으로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그는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여자가 필요하다고 했고, 그 적임자는 자신이었다.
이 형식뿐인 결혼은 다시 사랑하게 되는 순간 무너지는 계약이었다.
그걸 하루에도 몇 번이고 머릿속에 새기며 일부러 시후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애써 유령 취급을 하려 한다고 한들, 강시후란 남자의 존재감은 겨울의 일상 속에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면 훗훗하게 느껴지는 사람의 온기, 현관에 제 신발과 나란히 놓여 있는 커다란 남자의 구두, 종종 불현듯 가구에서 느껴지는 그의 시원한 스킨 냄새…….
그런 것들에 가슴이 떨릴 때마다 겨울은 처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루는 지독한 몸살감기에 걸린 날이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손가락 하나 들 힘도 없어 휴가를 내고 침실에 틀어박혀 온종일 앓았었다.
40도에 가까워진 고열 때문에 정신이 혼미하고 숨을 쉬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그렇게 끙끙 앓고 있는데 돌연 이마로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에 겨울이 움찔했다.
불덩이 같던 체온이 내려가며 한결 살 것 같은 기분에 숨을 몰아쉬었다.
비몽사몽 간에도 커다란 손이 제 손을 꼭 붙잡는 걸 느꼈다.
이 집에 사는 사람이라고는 겨울과 시후 단 둘뿐이라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탁 풀린 동공이 희미하게 뜨여졌다.
뿌연 시야로 보이는 것은 다시금 수건을 얼음물에 담가 차갑게 적시고 있는 시후의 모습이었다.
얼마나 수건을 얼음물에 적시기를 반복했는지, 그의 길쭉한 손가락은 붉게 얼어붙어 있었다.
물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수건을 꽉 짜는 손등에 선 핏줄을 가만히 바라보던 겨울이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제 머리 위에 다시금 찬기가 올라오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조금 전 보았던 걱정이 가득 서린 그의 표정은 도무지 저를 싫어하는 남자로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사랑하는 여자를 보는 듯이 애틋했다.
겨울은 울컥 감정이 치솟고 눈물이 날 것 같았으나 가까스로 눌러 참았다.
천천히 제 뺨을 쓰다듬는 손길은 더없이 자상하고 부드러웠다.
‘날 절대 사랑하지 않을 여자가 필요해. 귀찮아지는 건 딱 질색이니까.’
……그렇게 말한 주제에, 왜 이렇게 다정한 건데.
내가 이 방에서 혼자 앓든지 말든지, 매몰차게 신경도 쓰지 말아야지.
다시 사랑하게 되는 게 가장 두려웠는데…….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는데.
……강시후를 미워해야만 이 결혼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를 증오하고 원망하고 싫어해야만 이 세상에 숨 쉬고 살아갈 수 있었다.
이를 악물고 사랑에 빠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
아니, 이미 그에게 스며들었음에도…….
“강시후, 네가 뭔데 우리 집에 들러서 사위 행세를 해?”
살기 위해 억지로 외면했다.
“어머니께서 부르시는데, 그럼 무시해?”
“우리 진짜 부부도 아니잖아! 선 넘지 말고 최소한만 해. 계약서 내용대로!”
그렇기에, 그에게 마음이 향할수록 겨울은 오히려 마음에 벽을 치고 더욱 차갑고 냉랭하게 그를 대했다.
“차 세워. 걸어서 집 갈 거니까.”
“함겨울.”
“세워!”
그날은 감정이 북받쳐 시후와 심하게 말싸움을 하게 된 날이었다.
“이제 지긋지긋해, 이 허울뿐인 결혼생활. 숨 막혀. 연기하는 것도 지겹고…….”
강시후 너를 좋아하기 싫어. 미워하고 싶어.
“나도 이제 그만 평범하게 살고 싶어. 사랑받으면서, 또 사랑하면서.”
아니, 사실 사랑하고 싶어…….
“그런데 우린 아니잖아. 서로 사랑하지 않잖아.”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한심한 거지, 그렇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우리는.
만난 것부터가 악연의 시작인 걸까?
말해 봐, 강시후.
날 조금도 사랑하지 않아……?
콰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아스팔트에 내던져진 겨울은 골이 뒤흔들리는 충격을 느꼈다.
“함겨울!!!”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제게 달려오는 시후를 보며 서서히 의식이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차라리 이대로 눈을 뜨지 않기를 바란다.
다시 눈을 뜬다면,
더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