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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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이면
2022.06.05.
겨울이 잠든 것을 확인한 시후가 조심히 몸을 일으켜 침실 밖을 나섰다.
그녀가 깨지 않도록 천천히 문을 닫은 뒤 한 손으로 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올렸다.
온종일 많은 일이 한꺼번에 겹쳐 극심한 피곤이 몰려왔으나, 뒤숭숭한 마음 때문에 쉬이 잠을 청할 수는 없었다.
서재로 향한 시후는 의자에 앉아 지그시 떨리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
창밖으로 고개 돌린 시후가 희미한 불빛이 어른거리는 냉기 어린 새벽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성냥갑처럼 줄지어 늘어서 있는 건물들을 바라보자 숨이 막힐 듯이 가슴이 갑갑했다.
모조리 부수고 쓸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억세게 쥔 손등 위로 핏대가 불뚝 곤두섰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겨울을 지키고 그녀를 제 곁에 둘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이제 단순히 겨울의 안위를 두고 위협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하.”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한 USB를 가만히 바라보던 시후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어떻게 해야 할지, 길을 잃은 기분에 깊은 한숨이 입술 틈으로 흘렀다.
자그마한 USB를 움켜쥐고 만지작거리던 시후는 이내 깊은 상념에 빠졌다.
복잡한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것은 불과 몇 시간 전, 회장실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
“그 계집애하고 이혼하고 회사 들어와라. 네 와이프, 제 아비 따라 스스로 목매다는 꼴 보기 싫으면.”
강성호 회장의 말에 시후의 새까만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진짜 옥중 병사인 줄 알았냐? 네 아비는 그렇게 허술한 놈이 아니야.”
소름 끼치는 성호의 웃음 소리를 들으며 시후의 맥박이 조금씩 빠르게 뛰었다.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명확히 알 수 없었으나 겨울의 아버지, 함병식 회장의 죽음과 관련하여 자신이 모르는 진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껏 너를 봐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네 옆의 그 쪼끄만 년 따위 소리소문없이 치워버리고, 네 회사도 업계에서 발 디디지 못하게 지워버리면 그만인 것을…….”
말끝을 늘인 성호의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그래도 자식새끼라고 봐준 것이다. 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넌 이 강성호의 핏줄이니까.”
그 말을 들은 시후는 속이 뒤집히는 듯한 착각에 이를 악물었다.
자식은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없이 잔인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생각해보면 항상 원흉은 그 계집애였다. 아비 말에 단 한 번도 거역한 적 없던 네가, 어렸을 때 그 애한테 홀려서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지?”
“…….”
“제 아비 얼굴에 침을 뱉어도 유분수지, 어디 여자가 없어서 그런 천박한 집구석과 사돈을 맺게 만들어?”
“말은 똑바로 하셔야죠.”
시후가 낮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애초에 이 모든 일을 시작한 건 당신입니다.”
“……뭐야?”
“12년 전, 겨울이를 망가뜨려 놓겠다고 협박한 순간부터, 이미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구나. 내 자식이 그런 쓰레기 같은 집안의 계집과 어울리는데 지켜만 볼 부모가 있느냐?”
“……선 넘는 말씀 삼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말대꾸하지 마라. 마지막 경고라고 했어. 그만 고집부리고 그 집안과 연 끊고 회사 들어와.”
이야기는 몇 번을 돌고 돌아 결국 제자리였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고 판단을 내린 시후가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제 결정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 자식이 끝까지…….”
“이제 겨울이에게 손대려거든 저부터 치우셔야 할 겁니다.”
하, 가소롭다는 듯 성호의 입가로 헛웃음이 터졌다.
그 비웃음을 뒤로하고 곧장 몸을 튼 시후가 회장실 문으로 걸어갔다.
“진실을 알게 되어도 그 애가 네 곁에 붙어 있을 것 같냐?”
등 뒤로 쏟아지는 걸걸한 목소리에 시후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진실?
“넌 어차피 그 계집애와 잘 될 수 없다.”
……역시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
고요하게 모여든 시후의 미간 사이로 주름이 깊게 팼다.
“됐으니 가보거라. 이 대한민국을 휘어잡고 주무르는 나와, 내 발끝도 못 미치는 강시후 너. 누가 이기는지 한번 해보자꾸나. 언론부터 정·재계, 사법계까지 좌지우지하는 내 힘은 네가 제일 잘 알겠지.”
“…….”
“더 이상 이 아비 뜻을 거역하면 그 애 목숨이 위험해져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다.”
그 말에 시후의 얼굴이 서늘하게 식었다.
“정리할 시간은 길게 못 준다. 올해 안에 전부 끝내고 회사로 들어와.”
말이 안 통하니, 대화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더는 같은 공간에 숨 쉬고 싶지 않았기에 곧장 회장실을 빠져나온 시후는 쾅, 문을 세게 닫았다.
폭발할 것만 같은 분노를 가까스로 삭이며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갔다.
지하 1층 버튼을 꾹 누르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니.”
마지막 경고를 어긴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야.
긴장해.
앞으로 내 모든 걸 걸고 당신을 무너뜨릴 거니까.
오후 8시가 되어 시후는 강성호 회장의 저택으로 조용히 이동했다.
그의 집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이 전부 퇴근하고, 미리 귀띔을 해둔 가정부 김미숙만 홀로 집에 남는 시간이었다.
강성호 회장 쪽에는 은밀히 사람을 붙여 고의로 교통사고를 만들어 귀가 시간이 늦어지도록 손을 써두었다.
즉, 앞으로 최소 1시간은 집으로 들어오지 않을 터였다.
“회장님이 아시면 경을 치실 텐데요…….”
성호의 곁에서 일한 지 어느덧 30년이 된 입주 가정부 미숙은 시후의 부탁대로 대문을 열어주긴 하였으나, 걱정을 떨치지 못하고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주머니. 어렸을 때부터 이 집에서 일하셨죠.”
“……그렇죠. 저야 도련님 친어머님 추천으로 이 집에 들어온 거니까요.”
“그럼 저희 어머니가 왜 그렇게 되신 건지도 알고 계실 거고요.”
“…….”
시후의 어머니의 추천으로 30년 전 성호의 집에 들어왔던 미숙은 그가 시후의 어머니에게 얼마나 끔찍하고 악독한 짓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처가의 회사인 일성디스플레이가 몰락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눈앞에서 대놓고 외도를 저지르고, 밖에서 난 자식과 내연녀를 집 안으로 들인 것도 모자라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 참혹한 광경을 똑똑히 기억하는 미숙은 입술을 일 자로 다물었다.
“문제 생겨도 아주머니께 피해 가지 않도록 제가 해결할 겁니다.”
슈트 안쪽에 손을 집어넣은 시후가 미리 준비해둔 돈 봉투를 건넸다.
“막내 따님이 이제 막 대학 입학한다고 들었습니다. 이걸로 학비에 보태세요.”
“아니, 도련님…….”
어쩔 줄 몰라 하는 미숙의 손에 봉투를 쥐여준 시후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오늘부터 아주머니는 제 눈과 귀가 되어주셔야 합니다.”
까만 동공이 꿰뚫을듯해 미숙이 몸을 떨었다.
“전 보상은 확실히 하는 사람입니다.”
적의 목을 치기 위해서는 가장 경계가 풀어지는 공간에서부터 은밀하게 접근해야 했다.
어디에서든 날을 세우는 맹수가 유일하게 풀어지는 곳은 다름 아닌 집이었다.
작게 한숨 쉰 미숙이 이내 따라오라는 듯 시후에게 손짓했다.
“이 집무실이에요. 여긴 회장님이 돌아가신 사모님이나 작은 도련님조차 출입하지 못하게 하셨거든요. 오로지 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 회장님 감시하에 청소하기 위해 들어가는 곳이에요.”
“감사합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일 보고 계세요.”
“……네. 회장님 곧 귀가하실 테니까 최대한 빨리 끝내시고 나오세요.”
수심이 가득 찬 목소리로 중얼거린 미숙이 종종걸음으로 주방을 향해 멀어졌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간 시후가 침착을 유지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냥감의 숨통을 쥐려면 가장 먼저 약점을 찾아야 하는 것이 순리였다.
단기간에 기하급수적으로 몸집이 커진 KU그룹이기에 그 이면에 불법적인 그림자가 없을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
눈으로 보기에는 이상한 부분이 전혀 없는 평범한 집무실이었지만, 본인 외에 가족까지도 출입을 금한 데에는 전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방에 적이 도사리고 있는 인간이었으니 제 약점을 아무렇게나 드러내진 않았을 터.
무언가 숨겨진 공간이 있을 거라 확신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내 묘한 위화감을 느낀 시후의 시선은 한 면을 채우고 있는 책장에서 멈추었다.
붙어있는 두 개의 책장 중 오른쪽에는 책이 몇 권 꽂혀 있지 않은 반면, 왼쪽 책장에는 각종 서적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둘 중 듬성듬성 채워져 있는 책장을 가만히 바라보던 시후는 문득 책장 아래의 바닥에 일자로 스크래치가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본능적으로 어딘가 이상함을 느낀 시후는 그 스크래치를 따라 책장을 오른쪽으로 밀었다.
필시 그 뒤에 무언가 있을 것이라 확신했으나 드러난 것은 문이나 비밀 공간이 아닌 하얀 벽뿐이었다.
미간을 좁힌 시후가 그 벽을 자세히 관찰하다가 두어 번 두드려보았다.
“이건…….”
두드렸을 때의 소리가 옆의 다른 벽과 확연히 달랐다. 틀림없이 건너편에 다른 공간이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건너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시후는 왼쪽의 빼곡한 책장의 네 번째 칸만 책이 오른쪽으로 쏠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책을 전부 왼쪽으로 옮기니 시야에 들어찬 것은 지문 인식 잠금장치였다.
“……찾았다.”
시간이 넉넉지 않았다. 벽 너머의 비밀 공간은 강성호의 손가락 지문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정도쯤은 예상했던 시후가 미리 강성호의 지문을 채취해 3D프린터로 제작한 가짜 손가락을 안쪽 주머니에서 꺼냈다.
다른 지문이 묻지 않게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져 있는 가짜 손가락을 지문 인식 부분에 가볍게 눌렀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벽으로 위장되어 있던 문이 열리고 안쪽으로 비밀 공간이 드러났다.
긴장감이 몰려오고 마른침을 삼킨 시후는 문을 밀며 밀실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각종 서류가 파일철에 담겨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출처를 알 수 없는 금괴와 달러도 한쪽 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게 전부는 아닐 텐데…….”
강성호의 치밀한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가장 중요한 일급 기밀 사항은 따로 보관하였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나 다를까, 벽 한쪽을 가득 메우고 있는 금괴를 치우자 또 다른 금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밀번호…….”
마지막 관문을 앞에 둔 시후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휴대전화가 울리고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
떨리는 손으로 확인한 시후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교통사고 현장 정리를 김 실장에게 일임한 강성호가 집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다급해진 시후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강성호란 인간이 어떤 족속인가.
오로지 회사를 키우고 배를 불리는 데에만 머리가 돌아가는 인간이었다.
그토록 회사에 미쳐 사는 인간이라면…….
마른침을 삼킨 시후가 KU그룹의 모태인 성호화학공업의 창립 기념일을 눌렀다.
“……하.”
굳게 닫힌 금고 문이 열리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안에 있는 것은 일급기밀 프로젝트별로 정리된 파일철과 그 내용이 고스란히 담긴 USB들이었다.
곧장 미리 준비한 USB 복사기를 이용하여 모든 내용을 카피한 시후가 서둘러 금고를 닫았다.
다급하게 밀실을 나와 가구들을 원래의 위치로 돌려놓은 뒤 곧바로 저택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그 길로 다시 회사에 들어온 시후는 금고에서 가져왔던 USB를 컴퓨터에 연결했다.
그 안에는 선대 회장의 뒤를 이어 강성호가 실질적 경영을 맡기 시작한 시절부터의 기밀 프로젝트가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각종 계열사의 재무제표부터 정치인들이나 언론인, 법조인들에게 불법으로 전달한 자금 내역까지 세세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 정도로는 안 돼…….”
그의 말마따나 언론부터 정·재계, 사법계를 모두 주무르는 인간이었다.
이런 문서 파일쯤 조작이라고 잡아떼거나 다른 누군가에게 뒤집어씌워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게 틀림없었다.
그렇기에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잡아 제대로 옥죄고 파고들어야만 했다.
“핵심적인 약점이 필요한데…….”
한 방에 보내버릴 방법이.
마우스 스크롤을 올리며 기밀 프로젝트 목록들을 빠르게 확인하던 시후는 일순 숨이 우뚝 끊어졌다.
[제이지코스메틱 합병 프로젝트]
“이건…….”
겨울의 아버지, 함병식 회장 회사의 이름이었다.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을 느낀 시후가 천천히 그 파일을 클릭했다.
그 안의 내용을 확인한 시후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