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상처
(72/112)
72. 상처
(72/112)
72. 상처
2022.06.08.
[제이지코스메틱 합병 프로젝트]
“이건…….”
겨울의 아버지, 함병식 회장 회사의 이름이었다.
점차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을 느낀 시후가 천천히 그 파일을 클릭했다.
새까만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믿을 수 없는 내용에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류에는 12년 전, 제이지코스메틱의 제조공장에 공급될 예정이었던 남원화학의 원료를 KU그룹에서 모조리 사들여 폐기한 기록이 적혀 있었다.
“……뭐야.”
제이지코스메틱의 위기의 시작은 원료 공급 회사인 남원화학의 배신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 배후에 아버지가 있었다고……?”
제이지코스메틱의 원료를 빼돌린 사람은 다름 아닌 강성호였다.
누구를 통해, 어떤 방식을 취했는지까지, 모든 내용이 세세하게 적힌 서류를 읽는 시후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악의를 갖고 화장품 제조에 필요한 원료를 전부 빼돌려 원료 공급을 중단시킨 아버지는 다른 납품 업체들에게 뇌물을 전달해 제이지코스메틱에 원료 납품을 하지 못하게 손을 썼던 것이었다.
심지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몇몇 기자들을 포섭하여 온라인에 제이지코스메틱의 화장품에 중금속류가 발견됐다는 루머를 퍼뜨린 정황까지 적혀 있었다.
“……이게 무슨…….”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진실에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갈라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 문서는 명백하게 자신의 아버지가 겨울의 회사 제이지코스메틱을 인수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거래처를 모두 매수하고 판로를 막은 다음 궁지로 몰고, 악성 루머까지 퍼뜨려 주가를 폭락시키고 몰락으로 이끌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
강성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거액의 부채가 생겨 부도 위기에 봉착한 제이지코스메틱의 주거래 은행의 은행장을 포섭하여 자금줄마저 틀어막은 뒤 인수합병을 제안했다.
애초에 모든 게 그가 계획한 일이던 것이다. 겨울의 아버지의 회사를 집어삼키기 위해…….
등골이 오싹해진 시후의 얼굴로 핏기가 전부 말랐다.
그 당시, 겨울의 아버지는 KU그룹으로 들어가 근무하다가 얼마 되지 않아 횡령죄로 교도소에 수용되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일도 전부 강성호의 조작이었다.
그가 함병식 회장에게 임원 자리를 내어주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뇌물 수수 혐의를 물어 억울하게 쫓아냈다는 사실까지 서류에는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
시후의 손이 거칠게 떨려왔다.
믿기지 않는 사실에 귀가 먹을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가까스로 붙잡고 있었던 정신이 끊어질 것 같아 이마를 짚은 순간 견딜 수 없는 구역감이 몰려왔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시후는 곧장 욕실로 향해 세면대의 물을 틀고 차가운 물에 반복해서 손을 닦았다.
제 손에 묻은 강성호의 오물을 씻어내려는 듯이, 몸 안에 흐르고 있는 악마의 피를 전부 뽑아내고 싶다는 듯이.
피부가 벗겨지도록 수도 없이 손을 거칠게 닦자 마찰한 살갗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아버지를 향한 증오심으로부터 발현하여 오랫동안 지독하게 겪어왔던 결벽 증세가 또다시 나타나고 만 것이었다.
“하…….”
거친 숨을 토해낸 시후는 쾅, 오른손으로 세게 욕실 벽을 내려쳤다.
까만 동공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거칠게 흔들렸다.
애초에 겨울의 집안이 몰락하기 시작한 것은 전부 아버지의 계획이었다. 심지어는 횡령했다는 죄목 또한 전부 치밀한 계획 아래 조작된 것이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이런 추악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인가.
제 몸에 흐르는 강성호의 피를 모조리 뽑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 이런…….”
어린 시절, 강성호는 늘 겨울의 아버지인 함병식이 제 회사에서 도둑질했다면서, 그런 쓰레기 같은 집안과 어울리지 말라며 시후에게 소리치고는 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전부 연기였다니…….
“…….”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지금껏 10년 넘도록 아버지가 저지른 극악무도한 만행을 모르고 살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심지어 어렸을 때, 아버지의 말만 곧이곧대로 믿고 겨울을 미워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 시후를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이 사실을 겨울이 알게 됐을 때 그녀가 받을 충격과 상처였다.
시후가 이를 바득 씹었다.
집안을 풍비박산으로 만들고 심지어는 아버지를 죽인 인간의 아들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겨울이 얼마나 더 무너질지 알 수 없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잔인한 현실에 시후는 얼얼한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더는 겨울을 볼 낯이 없었다.
비록 그녀가 충격을 받더라도 그녀에게 진실을 털어놓고 처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 다 기억났어.”
하지만, 집에 돌아온 겨울이 뱉은 말에 시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잃어버렸던 1년간의 기억. 우리가 어쩌다가 결혼하게 됐는지, 어떤 결혼생활을 했는지까지…… 전부.”
겨울과 다시 시작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이라고 거짓말했던 것이 결국 업보가 되어 돌아왔다.
이미 배신감을 느끼고 괴로워하는 겨울에게 그보다 더 잔인한 진실을 알리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자신이 없었다.
***
하루 동안 있었던 많은 일을 다시금 떠올린 시후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시후가 금고에서 빼 온 파일에는 제이지코스메틱 합병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시후의 외할아버지의 회사였던 일성디스플레이와 관한 문서도 있었다.
강성호는 처가의 회사인 일성디스플레이도 제이지코스메틱과 비슷한 방식으로 수를 써서 몰락으로 이끌어 합병했었고, 이는 전부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아마도 어머니의 죽음 또한 이와 관련되어 있을 터였다.
“…….”
끊어질 것 같은 이성을 부여잡고 가까스로 냉정을 찾은 시후가 USB를 서랍에 넣어놓았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뒤 홀린 듯 겨울이 잠들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벽을 향해 돌아누운 채 웅크리고 자는 겨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시후가 부서질 듯 옥죄어오는 가슴을 느꼈다.
눈가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목 안쪽이 아릿했다.
울컥 감정이 밀려왔으나 괴로워할 자격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차가워진 새벽의 냉기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어 살이 에이는 듯했다.
오늘만큼은 겨울을 끌어안고 아무 생각 없이 잠들고 싶었다.
천천히 겨울의 옆에 누웠으나 차마 그녀를 안을 자신은 없었다.
시후는 벽을 향해 잠든 겨울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괴로운 신음을 삼켰다.
제게 등 돌린 겨울이 꼭 앞으로의 미래처럼 느껴져서 숨을 쉴 수 없었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순간, 시후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
겨울은 잠들지 않았던 것인지, 몸을 돌려 시후의 품에 폭 안겼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겨울은 가늘게 호흡하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품으로 더욱 파고드는 자그마한 체구에 시후는 가슴 속에서 번지는 파동을 느꼈다.
떨리는 손을 뻗어 겨울의 동그란 어깨를 안고 숨을 몰아쉬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으나 잇새를 깨물고 인내했다.
적어도 오늘 밤만큼은…….
이대로 그녀를 품에 안은 채 현실을 잊고 싶었다.
***
다음 날 아침, 커튼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에 겨울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텅 빈 베개가 망막을 스쳤다.
홀로 누워있는 침대는 무척이나 컸고, 주위는 숨결 하나 없이 조용했다.
밀려오는 공허함을 느끼며 침실을 나서자 시후가 차려놓은 아침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일찍 출근했나 보네.”
거르지 말고 챙겨 먹으라는 짤막한 메모를 본 겨울이 작게 숨을 내뱉었다.
이러니 원망하고 싶어도 도무지 원망할 수 없는 남자였다.
혼자서 고요함 속에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까지 끝낸 겨울이 곧바로 클레르의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실장님, 안녕하세요.”
-응, 겨울 씨.
“다름이 아니라…… 오늘 출근 때문에 연락드렸어요.”
-그래,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는데…… 이번 주까지는 쉬어. 아직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죄송해요.”
-아니야. 다음 주쯤이면 좀 잠잠해질 테니까. 많이 힘들면 더 휴가 내도 되니까 편하게 말하고.
“네…… 감사해요, 실장님.”
-그래, 쉬어.
짧은 통화 끝에 전화가 끊어지고 겨울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전날 클레르 앞에서 시후와 키스를 나눈 사진이 SNS에서 간혹 돌아다니기는 했으나, 이상하게도 이혼설과 대표이사직 사임설에 대한 정정 보도는 한 줄도 뜨지 않았다.
하릴없이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던 겨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그럼 이렇게 마무리해서 픽스합시다.”
대회의실을 울리는 시후의 목소리에 직원들의 얼굴에 안도가 감돌았다.
어느 프로젝트에서든 항상 완벽을 추구하는 시후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한마디를 남긴 시후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하고 회의실 밖으로 나섰다.
복도를 따라 걷는 동안 시후의 뒤로는 직원들의 속닥거림이 계속되었다.
대표이사직 사임이 사실무근이라고 전해 들었으나, 정작 인터넷에서는 정정 보도가 한 줄도 뜨지 않으니 모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왜 아직도 기사가 안 뜨는 겁니까?”
물론 가장 속이 답답한 사람은 다름 아닌 시후였다.
“오늘 아침까지 반드시 정정 보도 내라고 경고했을 텐데요.”
-아휴, 거참……. 데스크에서부터 통과가 안 되는데 어떻게 기사를 냅니까?
기자들에게 연락을 취해 정정 보도를 하라고 압박을 넣었지만, 강성호 회장의 압력에 눌린 이들은 모두 거절의 의사를 표할 뿐이었다.
-고소하신다고 해도 이제 어쩔 수 없습니다. 그만 끊겠습니다.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어지자 잇새를 악문 시후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언론을 꽉 쥐고 있는 인간답게 뒤에서 무슨 수를 썼는지 겨울과의 이혼과 KU그룹 입사 루머에 대한 정정 기사는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얼굴을 굳힌 시후의 눈매가 날카롭게 길어졌다.
이 정도의 난항은 이미 예상했던 시후가 계획을 이행하기 위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긴 통화 연결음 끝에 한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